<--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것들 -->
로징턴은 수도 외곽쯤에 있는 작은 시골 영지였다. 물론 여가시설은 없었고 길거리에는 비료 냄새가 나는 동네였지만 땅이 작은데다가, 수도에 가까이 있어서 다른 귀족들의 저택이나, 편의시설로의 접근성은 최고였다. 그래서 수도에 있는 다이애나의 저택으로 가는 데에는 기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마차가 멈추자 심호흡을 크게 했다. 나는 그녀를 품에 넣고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율리아는 마차에 탄 뒤로부터 말이 없었다. 그녀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다이애나는 눈물만 대충 닦은 채로, 자세를 곧게 하고 표정을 천천히 지웠다. 그때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늘만 가득했던 마차에 따뜻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레이디 그린힐.”
“친구랑 함께 왔다고 저택에 알리세요.”
그리고 그녀는 문을 연 사내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사내는 우리에게도 뒤이어 손을 건넸고, 나는 율리아 다음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다이애나의 집에 처음 와보는 일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기함했다.
“가자.”
다이애나가 우리를 돌아보고 손짓했다. 나는 율리아와 함께 다이애나를 사이에 끼고 걸음을 옮겼다. 마차에서 한없이 나약해만 보였던 다이애나의 걸음은 확신에 차 있었다.
저렇게 거대한 저택이라니……. 나는 가까워지는 그녀의 푸른 지붕 궁전을 바라보았다. 대저택의 위용이 느껴졌다. 이런 순간은 꼭 내가 짭 귀족이 된 것만 같다.
우린 걷고, 또 걸었다. 실내에 들어가자 큰 건물 특유의 싸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다이애나의 걸음이 미세하게 빨라진 것은 거대한 방문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푸른 색 벨벳으로 견고히 서 있는 문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에드거의 것이라는 게 확실했다.
다이애나는 결국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서늘한 의사의 목소리였다.
“블루 다이아몬드는 내 집이다. 그리고 당신이 진찰하는 사내는 내 오라비지.”
“알고 있습니다.”
의사는 코끝에 걸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마님께서는 레이디를…….”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아픈 주인과는 다르게 완강했다.
“필립. 나가.”
“하지만 존경하는 그린힐 부인께서는…….”
“꺼져. 나한테 이딴 짓을 한 작자들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으니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늙은 의사가 고개를 조아리고 나갔다. 다이애나는 당장 제 오빠에게로 달려갔다.
“오, 에드거.”
“다이애나.”
“에드거, 다리는. 몸은 좀 괜찮은 거야?”
“그래.”
에드거는 비 오는 어제 새벽에 술을 마시고 말을 타다가 낙마했다고 한다. 그리고 에드거를 발견한 것은 오늘 오후쯤 돼서였고.
치료가 지체되어서였는지 에드거의 몸 상태는 별로 좋지 못했다. 게다가 비에 맞아서 열병까지 얻어온 덕분에, 그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딴 짓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의사가 오빠한테 무슨 일이라도…….”
“내가 치료를 거부하자 의사가 약초로 기절시키더군. 눈을 떠보니 몸이 치료되어 있었지.”
“그래서 지금 몸은 어때?”
“끔찍해.”
나는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가 에드거를 가만 바라보았다.
에드거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정말 준수한 미남에 속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기사도에 통달한 젠틀맨정도.
카밀리아의 취향이 성직자라던가, 기사라던가, 절도와 예의가 몸에 밴 단정한 남자인 건 알고 있었는데, 그걸 현실로 빚어낸 듯 한 사람과 사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고, 항상 멀리서 지켜본 나였기에, 동생의 애인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레이디께서…….”
“아, 네. 카밀리아의 언니, 세실리아 로즈입니다.”
“레이디 로즈. 제가 일어나서 인사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아뇨, 아뇨. 누워 계세요. 몸도 불편하신데.”
그가 낮게 웃었다.
“분명 다른, 데.”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는 듯 보였다.
“닮았습니다. 눈의 총명함이 닮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닮았,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오빠, 다 좋으니까 이제 좀 쉬어. 응? 지금 말하는 것도 힘들잖아.”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손을 움직여 내 손을 잡았다.
“제가, 카밀리아를 감히,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아…….”
그의 남색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남색 눈동자가. 나는 마차를 타면서 무슨 얘기를 할지 준비하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우리 카밀 고운 눈에 눈물이 났잖아요! 라던가. 내 동생을 갖고 놀다니 피눈물이 나게 해주겠어!(패악을 부리는 거지 실제로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라던가.
하지만 그의 눈을 본 순간, 나의 모든 두려움과 분노는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순간 또 눈물이 났다. 그의 크고 남자다운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영원히, 그녀가 또, 힘들 일이 없도록…….”
에드거가 숨을 몰아쉬었다.
“제가 이제부터 그 옆을, 지키겠습니다. 레이디 로즈, 대신으로.”
요즘 울 일이 많았다. 나는 울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것으로, 되었습니다. 카밀이 언니를 많이 존경하고 있더군요. 부디 걱정 마시길…….”
그가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입가에서 낮은 숨이 출납했다. 그리고 한참동안 고요가 일었다. 그는 잠이 들었음에도 내 손만큼은 꼭 붙잡고 있었다.
그의 손. 그의 말. 그의 눈빛. 나는 그 세 가지 만으로도 두 사람이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이애나를 보니 그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오빠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어.”
정적을 깬 것은 다이애나였다.
“그래서 기다린 거일거야, 아마도. 널 불러달라고 했거든.”
“…….”
“그랬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결국 잘될까?”
“……자식 이기는 부모 봤니?”
“아니.”
그리고 다이애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 모두 똑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마셨다. 다이애나의 집에서.
“어머니랑 아버지는 블루번에서 지금 오고 계실거야. 그럼 오라버니가 잘 말해보겠지. 나도 도울게. 사실 나는 네 동생이 삼천 골드 없이도 충분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다이애나 특유의 칭찬법이었다. 나는 속을 진정시키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삼키고는,
“고마워, 다이애나.”
미소지어보였다. 그리고 이때쯤 나는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 다만 내가 세상의 좋은 측면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뿐이지.
다이애나의 단정한 응접실에 따사로운 빛이 내렸다. 그래, 비가 그치면 항상 해가 뜨기에. 이렇게 힘든 나날도 지나가면 언젠간 고요한 행복이 올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내 가족이 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어.”
다이애나가 부끄러운 듯 찻잔을 꼼지락거렸다.
“그럼 우리 쇼핑도 가고, 같이 무도회도 다니고. 어쨌던 그래서.”
“어머, 나도 너랑 가족 하고 싶어!”
율리아가 끼어들었다.
“세실, 너 우리 동생 한번 만나볼래? 연하도 괜찮다면야…….”
나는 웃었다.
“안 돼. 또 다시 레이디들의 질문세례속에 파묻히고 싶지 않아.”
“오스카가 그렇게 인기가 좋았었나? 난 모르겠는데.”
율리아의 겸양이었다. 다이애나가 피식 웃으며 거들었다.
“동생이라 그렇지 사교계에서는 정말 잘나가는 사람인 걸 모르시나.”
그리고 작은 미소와 함께 모두가 편안히 그 조용한 침묵 속으로 녹아들었다.
“고마워 얘들아. 어쨌던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지.”
다이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야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확신이라도 주듯 거듭 힘을 주어 말했다.
왕국에서 가장 성공한 요리사, 가필드 테네시가 단백질은 쾌락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옳았다.
“난 고기를 사랑해.”
“난 고기를 경배해.”
“난 고기 없이는 살 수 없어.”
카밀에게 외박하겠다고 했다. 물론 카밀에게 내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는 않았다.
블루 다이아몬드에 있다고 해서 카밀에게 너무 기대를 갖게 해주고 싶지 않았고, 안 그래도 복잡할 속 정리할 시간은 주고 싶었다. 혼자서. 가끔 많은 일들은 혼자서 견디고, 정리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카밀에게 그럴 시간을 주고 싶었다.
“이야, 너네 쉐프 정말 요리 잘한다.”
율리아는 박수까지 쳐가며 그녀가 한 입 먹은 스테이크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집 보물이야. 테오는 가업으로 요리사를 해오고 있어.”
“가업으로?”
율리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율리아는 제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그녀가 보이는 눈망울은 사냥을 앞둔 고양이의 풀어진 동공 그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검도 잘 써.”
“허어.”
“요리 일이 잘 안되니까 검투사로도 일했다더라고.”
나는 진심으로, 율리아가 침을 꼴깍이는 이유가 스테이크 때문인지, 아니면 피식자를 사냥하는 포식자의 준비운동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 너네집 자주 올게.”
“그러던지.”
다이애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두어번 깜박거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있지. 세실리아.”
“응?”
나는 고기를 우물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너랑, 잭 제커시스님이랑은 무슨 사이야?”
사레가 들었다. 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