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8화 (18/108)

<-- 카드의 마술사 -->

“……원래 술을 많이 마셔?”

아, 짜증나. 누가 자꾸 말을 시켰다.

“야, 너 몇…….”

말이 잘 안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현주소는 어디였더라……. 어디였더라……. 흠, 기분이 좋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음, 그러니까 내가 지금 고개를 묻고 엎드려있는 이 책상은 차가웠고, (대리석인가?) 조금 시끄럽고 (집은 아닌가보네...) 그리고 옆에서 아까부터 감미로운 목소리가 짜증나게 말을 걸어댔다. 진짜 왜 그러실까...

나이도 나보다 적은데 반말 쓴 거면 화내야지. 그리고 나는 조금 웃었다.

“몇 살이냐고?”

그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26. 너는?”

젠장. 나보다 많네. 목소리는 어려 보였는데.

“나 스물.”

“그렇구나.”

그리고 나는 무거운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사람들 목소리로 주위는 온통 시끄러웠고, 머리는 멍하고 무거워서 나는 겨우내 눈을 떠 그를 보았다. 그러자 그의 손이 내게 와 머리를 정돈해주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나는,

“야, 너 잘생겼다.”

미친년. 속으로 생각한 거였는데 솔직하게 튀어나왔다. 이런게 취중진담인가?

“그런 소리 많이 들어.”

“그럴 것 같아.”

그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는 금색 벨트가 달린 까만 트릴비(모자의 일종)를 쓰고 있었고, 음 피부색은 어두웠는데 그 뭐냐, 딱 섹시하다고 느껴질 정도로만 어두웠다. 모자 아래, 그의 머리카락은 까맸고, 이 장소의 은은한 조명 속에서 빛나는 두 금빛 눈동자는 적당히 호기심에 절어 총명해 보였다.

그는 깔끔한 흰색 셔츠 위에 까만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조끼의 짙은 원단에 세로로 얇은 은색 선이 무늬처럼 자리해 그와 잘 어울렸다. 셔츠는 단정한 공작의 것과는 달리 앞섶이 풀어헤쳐져 있었고, 소매 부분은 거칠게 뒤로 뒤집혀 있었다.

아. 이제야 나는 내가 어디 있었는지 기억이 되돌아왔다.

왕궁이었다. 건국제가 열리는.

나는 청승맞게 실컷 운 뒤, 화장을 다시 해야 했고 그래서 조금 늦게 축제에 도착했었다. 원래 내가 입장하면 사람들은 관심도 안 주거나, 아니면 로징턴의 가시가 왔다며 다 들리게 숙덕이고는 했는데 오늘은 무언가가 좀 달랐다.

그래. 스포트라이트였다.

‘로즈 영애!’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예쁜 여자였다. 귀족 여자. 나는 실컷 울고 난 뒤로 잔뜩 우울해져서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귀찮게 나를 따라붙었다.

‘아니, 그러지 말고 말해주세요. 어떻게 제롬 화이트 경을 사로잡으신 거죠?’

그녀의 눈방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리고 그녀를 기점으로,

‘맞아요, 그리고 제롬 화이트 경과는 정말로 연인 사이이신건가요?’

‘그 드레스 너무 예뻐요! 못 보던 건데, 어느 의상점에 가면 되죠?’

‘립은 뭐 쓰세요? 어떤 안료를 배합하셨는지 말해주세요!’

‘그 예쁜 목걸이는, 설마. 제롬 경께서 선물해주신 건가요?’

내 또래 여자애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론, 나에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었지만 말이다. 카밀리아에겐 흔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오늘이 태어나고 처음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청하게.

‘제롬 화이트 경과 제가 사귀고 있다는 건 그냥 소문일 뿐이에요.’

그 끔벅이는 눈들을 당황스럽다는 듯 둘러보며.

‘그러니까, 실례할게요.’

그리고 뒤돌았었다. 그때 시선이 닿은 곳에서 내 가슴이 쩡 하고 울렸다. 2층에 있었던 제롬 화이트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아린 가슴을 속으로 삭히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궁 내 바로 향했다. 그래, 술이 필요했다. 빌어먹을 셀프 금주령 때문에 나는 아주 목이 말랐었지.

그리고 마셨다.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눈 떠보니까 저 잘생긴 남자가 말을 걸고 있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술이 확 깼다. 내가 그의 눈을 바라보자 그가 피식 미소지었다.

내 시선은 그의 까만 손에 끼워져 있는 다섯 개의 금반지로 향했다. 무식해보이는 졸부 금반지는 아니고, 모두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어있는 것이었다. 어떤 것은 두 마리의 사자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었고, 어떤 것은 까만 보석이 큼직하게 박힌 것이었고, 어떤 것은…….

더 말해야 뭐 할까, 어쨌든 내 집 수십 채는 살 수 있을만한 반지였다고 하자.

“갖고 싶어?”

그가 물었다. 나의 시선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아니.”

“왜? 진짜야. 진짜 금.”

그러더니 그가 제 반지 중 하나를 깨무는 척을 했다. 우와, 진짜 잘생겼어.

“그래. 고마워.”

그가 나를 보며 답했다. 저 사람 독심술도 할 수 있나?

그러자 그가 웃었다. 역시 그는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있잖아, 당신 마법사세요?”

“아니.”

“좀 신비해보여서 물어봤어요.”

“그래서 반지 가질래?”

“아뇨.”

“왜, 이 제국에서는 최상품일 텐데.”

“그럴 거면 저 왜 줘요?”

“음, 또 사면 되니까?”

뭐래, 다이애나 넘버 투 같은 놈이. 그가 옆에서 와인을 홀짝였다. 그의 섹시한 목울대가, 아니. 섹시한 와인이. 와인이?

어쨌던 나는 와인이 마시고 싶어서 내 옆의 잔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가 눈동자만 굴려 내 손목을 저지했다.

“너 이미 취했어.”

“더 취하면 안돼요?”

“안 돼.”

“왜?”

“네 몸 간수는 스스로 해야지. 게다가 나는 네가 엎어지는 것보다 떠드는 쪽이 더 좋아.”

진짜 뭐, 어디 카지노 대빵같이 생긴 사람이 저렇게 제롬 화이트처럼 엄숙한 말을 하다니. 나는 그게 그냥 웃겨서 실컷 웃어댔다. 그리고 갑자기 제롬 화이트 생각이 나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내 팔에 머리를 묻고 울어댔다. 얼핏 들은 내 목소리가 나쁜 놈……. 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쁜 년은 난데. 그는 한동안 당황했는지 그대로 있다가, 서투르게 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내가 화장이 다 번졌을 것만 같은 얼굴을 들어.

“있잖아요, 당신. 위로하는 거 한 번도 못해봤지.”

“응.”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나는 또다시 웃었다. 진짜 위로 못해, 이러면서 웃으니까 그가 잔을 기울이다,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진짜, 뭘까 저 ‘하여튼 특이해’ 라고 써진 저 눈빛.

“나 화장 번졌어요?”

“조금?”

아 망했다. 조금이 아닐 것 같은데…….

“그래도 예뻐.”

“말도 안 돼.”

“너 진짜 예뻐.”

그는 정말 태연자약한 미소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구석에서 무언가를 찾아 내 머리에 그대로 씌워주었다. 나는 그의 손힘에 모자 속에 시야가 폭 가려져버렸다. 그래서 버둥거리며 모자를 위로 당겨 시야를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가려진 시야가 확 트이며 바의 롱테이블에 기대어있는 그가 보였다.

“딱 맞네.”

내 참, 뜬금없이 어이가 없어서.

“이게 뭐예요?”

“네 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가, 손을 뻗어서 모자를 벗어 보니 감촉이 익숙했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모자를 여러 번 앞뒤로 뒤집어보았다.

“이 모자!”

내가 카밀리아의 드레스를 사러 의상점으로 향하던 날, 너무 빨리 말을 타고 달리느라 길거리에서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래, 네 거야. 기억나?”

“고마워요!”

꽤나 비싼 모자였다. 그가 어떻게 주웠던, 어쨌던 나는 모자를 되찾게 되어서 너무나도 기뻤다. 다시 기분이 업되자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그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장난치듯, 조금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나의 신데렐라. 당신이 길거리에 떨어트린 이 모자가 당신의 머리에 딱 맞구려.”

웃음이 까르륵 터져나왔다. 와, 나 이렇게 웃어본 적이 얼마만이지?

“농담이고.”

그가 말했다. 그는 역시 사람을 위로하는데 다분한 소질을 갖추었던 모양이었다. 십분 전 내 생각 취소. 그러다 나는 모자에서,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진짜 누구야?”

“나?”

그리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로 내가 상대방한테 그 사람이 누군지 묻는 쪽인데, 어색하네.”

“그거 혹시 자의식 과잉이라고…….”

“잭 제커시스. 사람들이 블랙잭이라고도 부르는,”

그러면서 그는 모자를 벗어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카드의 마술사.”

내가 읊조리듯 말했다. 그는 미소로 응수했다.

“그쪽은 알아. 스스로를 근본 없는 자작가 영애라고 부르면서, 있는 건 없으면서 겁도 없이 억울한 거 가지고는 바락바락 대드는, 아……. 세실리아 로즈?”

“네, 그게 전데요.”

그리고 나는 눈치없게,

“알콜중독 빼먹으셨어요.”

귀족 백과사전에 알콜중독 항목 빼먹지 말라고 해야지, 내가 중얼거리자 그가 웃었다.

그리고 책상 위의 제 손에 휙 하고 어디서 나온 지 모르겠는 원아이드 잭 카드를 엄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다. 그 다음 나한테 그 카드를 내밀며,

“그래, 너.”

“네.”

“그러니까, 오늘 밤에 내 신데렐라 아가씨가 되어 주겠어?”

그가 잔망스러운 윙크를 날리며 말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민망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아뇨.”

하며 구석에 놓아둔(다행히 아무도 훔쳐가지 않았다) 내 작은 핸드백을 뒤적였다.

“왜?”

“편지왔으니까.”

하고 그의 손바닥에 다이애나의 편지를 챱. 하고 내려놓았다.

미션 클리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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