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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16화 (16/108)

<-- 카드의 마술사 -->

나는 결국 신상 드레스를 30%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원래 사려던 드레스보다 조금 더 비싼 드레스를 운 좋게 구할 수 있었고, 햇볕도 환하게 내리쬐는 게 마치 나를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누구 좋으라고 열배보다 더 주고 그 드레스를 산담. 생각했다가, 나는 다시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렸다. 분노로 이를 갈고 있을 바바라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루이지애나 고모가 말하길, 케잌은 달고, 복수는 더 달다. 라고 하셨던가.

이때쯤 당신은, 어머. 세실리아, 그러면 네 드레스는?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차라리 새 드레스를 사기보다는 그 돈으로 마시고 싶었다. 삶에 쪼들리는 자작 영애에게는 한정된 자본으로 선택을 해야 했는데, 나는 드레스 대신 술을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교사가 기회비용 어쩌고 한 것 같았는데.)

어차피 옷은 작년 걸 입으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옷을 사입을 방식은 많았지만(예를 들자면 루이지애나 고모한테 부탁한다던가) 손 벌리는 건 싫었고, 술을 포기하는 건 더 싫었다.

경쾌한 걸음과 함께 주머니에 들린 금화가 짤랑짤랑 흔들렸다. 이미 마차는 돌려보냈고, 내게 남은 시간은 많았고, 수중엔 오늘 하루를 신나게 보낼 돈은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이 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쓰고 싶었다. 참 오랜만의 일이지만 말이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까, 나는 수중의 금화를 바라보다. 그리고 수많은 선택지에서 역시 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좋은 와인은 비쌌고, 공작과 파티의 귀한 공짜 술에 길들여져 있던 나에게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술은 성에 차지를 않았다. 어차피 이틀 뒤이면 건국제인데 나는 그때까지 내게 금주령을 내리기로 했다. 게다가 낮술은 별로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여러 가지 목욕 용품들과 피부에 좋다는 것들을 잔뜩 사들고 마차를 잡았다. 파티에 참가하려면 몸 관리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마스카라가 다 번진 친구, 다이애나였다.

나는 응접실에 들어가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흠칫, 멈춰섰고 그녀는 나를 보자 다시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여기에 바바라가 관여되어있으면, 맹세코 그녀를 아작 내겠다고 다짐했다.

“오, 세실리아.”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제발 바바라 마르커스가 너한테…….”

“바바라 마르커스에 대한 게 아니야!”

그리고 역시 아니었다. 바바라 마르커스가 건드리기에 다이애나 그린힐은 너무나도 강력한 상대였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바바라보다는 몇 천배 더 부자일 것이다. 상대가 안 되겠지.

“그럼?”

“블랙 잭.”

“뭐?”

“도박에서 돈을 다 잃었어.”

다이애나는 손수건으로 번진 화장을 훔쳐내고 있었다.

블랙 잭이라고 하면, 나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유명한 카드게임의 이름이라던가, 아니면 왕국에서 가장 큰 카지노의 이름이라던가.

블랙 잭은 왕국에서 카지노의 고유명사로 쓰일 정도로 규모가 크고 독보적이었으며, 그곳의 오너 잭 제커시스는 거의 왕국에서 왕보다 부유하다고 할 수 있었다.

‘모든 사업은 잭으로 통한다.’ 라는 말이 흔할 정도이면, 당신은 제커시스가 이 왕국에 끼치는 영향력이 큰 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웃나라 귀족들도 그의 블랙 잭을 애용할 정도로, 그의 카지노는 거의 이 세계를 강하게 휘어잡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곧 다이애나의 파산을 걱정하며 마음 한 구석으로 그녀를 동정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다이애나였다. 그녀의 이름이 어디에서 왔을지 이쯤이면 대략 짐작이 갈 텐데, 그녀의 가문은 엄청난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그리고 부로 유명했다.

그래서 다이애나가 울고 있는 이유는 대략 제 용돈을 날려먹어서(성 여러채 값쯤 된다) 매우 슬프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다이애나 아빠가 그녀에게 외출금지를 선언했다던가.

흔한 일이다.

“나 이번에 꼭 건국제 가고 싶었단 말이야.”

“세상에, 다이애나. 설마.”

“응. 아빠가 이번에 엄청 화나셔서 건국제에 못 가게 하실 거라고 하셨어.”

그리고 다이애나가 울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날아가 버린 성 몇 채보다는 그러니까, 건국제에 못 가는 게 지금 더 슬프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와는 다른 세계 이야기였다. 나는 드레스 한 벌 사는데도 손이 떨린다.

“나 이번에 꼭 그분을 만나고 싶었단 말이야……. 아버지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다이애나의 ‘그분’ 이라고 하면 누군지는 불 보듯 뻔하다. 잭 제커시스. 블랙잭의 오너이자, 블랙잭의 전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사실 다이애나가 도박을 시작한 것은, 어느 파티에서 그, 잭 제커시스와 우연히 마주친 뒤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블랙잭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한번 잭팟을 따낸 뒤로 그 맛을 알아 더 자주 드나들게 된 것이었다.

잭 제커시스는 아무 파티에나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가는 파티는 주로 국가 규모이거나 성대한 것이며 그의 목적을 이룰 만한 배경이 되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조건에 맞는, 오래간만의 파티는 바로 건국제였던 것이다.

그와 말을 붙여볼수나 있는 가장 큰 기회였던 건국제를, 그러니까 다이애나는. 눈 앞에서 놓친 것이었다. 그녀가 왜 저렇게 울고 있는지 이제 이해가 될 것이었다.

“저런.”

“아버지는 한 다는 건 하는 분이라 내가 아무리 부탁드려도 뜻을 바꾸시지 않을 거야.”

“그래서 플랜 B 같은 건 없어?”

그녀가 그때 제 작은 손가방에서 곱게 적은 편지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 사람을 보게 되면 이 편지를 꼭 전해줘.”

다이애나가 예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최대한 노력할게.”

나는 답했다. 이런 것쯤이라면 공작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친구의 순정을 위하여라는 고운 사명 아래서.(이 말을 하고 속으로 조금 웃었다)

세상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시계처럼 돌아간다. 그리고 그 톱니바퀴에는 잭 제커시스나, 제롬 화이트같은 큰 톱니바퀴가 있고, 나나 내 동생같은 작은 톱니바퀴도 있다.

하는 일은 달라도, 왕국에 끼치는 영향력은 달라도 우리는 그래도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이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자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

그걸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알았다. 그가 이 세상에 드리우는 그림자가 얼마나 크던, 그 그림자 앞에 있는 사람은 나와 같이 숨 쉬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잭 제커시스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일을 맡게 된 것 같아서 나는 편지를 서랍장에 소중히 넣었다. 나는 지금쯤 신의 사자라도 된 듯 한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잭 제커시스를 어떻게 만나야 할지가 미지수였다. 그리고 이를 공작에게 부탁했을 때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먼저 그려보았다.

거절당할 게 뻔했다. 그런 거물급 인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이유가 단지 친구의 러브레터를 전하기 위해서라니. 역시 실례되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잭 제커시스와 우연히 마주칠 기회를 찾기로 결정했다.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다이애나도 나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디. 레이디 카밀리아께서 부르십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녀장을 따라갔다. 드레스를 입은 카밀리아를 어서 보고 싶었다.

저녁이 오고, 밤이 하늘의 광활함에 장막처럼 드리우면, 나는 사색에 잠긴다. 사실 오늘 내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던 편지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로즈에게.’

그의 편지였다. 오늘 아침에 받아 서랍 속에 넣어놓고 펼쳐보지 않았던.

잠이 오지 않자, 나는 무거운 눈을 떠 서랍 두 번째 칸에 넣어놓았던 편지를 꺼냈다. 편지는 밀랍으로 완벽하게 봉해져 있었고, 나는 그것을 여러 차례 만지작거리다 고민 끝에 펼쳐보았다. 무슨 말이 쓰여 있을 줄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보고 싶습니다. 제발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 저를…….’

그에게 나를 잊어 달라고 했던 편지를 보낸 뒤 온 편지였다. 어쩌면 나는 건국제 날에 전해야 할 것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듯 했다.

첫째, 나는 그에게 완벽하게 이별을 고할 것이었다.

그의 간절한 편지와 묻어나는 절절한 마음에 날카로웠던 마음이 약해졌지만, 여기서 뒤돌아본다면 아예 시작하는 것만 못할 것이었다. 너무 행복하느라고 더 일찍이 그를 끊어내지 못했다. 그게 미안해서라도 나는 더 독해질 필요를 느꼈다.

둘째, 나는 내 격에 맞는 남자를 찾아 그와 친분을 쌓을 것이다.

보통 결혼은 첫째가 먼저 한 뒤, 둘째가 하는 것이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니 이번 건국제에서는 내 가문에 어울리는 적당한 남자를 찾아다녀야 했다.

빨리 결혼을 해서 내 땅에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그 뒤 천천히 카밀의 혼처를 찾아주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이번 일에 실패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셋째, 다이애나의 편지를 성공적으로 전할 것이었다. 역시 마음 속에 든 것이 많으니 눈이 감기질 않았다. 항상 책임감이라는 것은 이렇다.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 든 무거운 짐.

어머니가 집을 나가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평생을 이 책임감 속에 살았다. 아마 내가 결혼을 하게 되고, 카밀리아가 흰 웨딩드레스 속에서 이 집을 떠나게 되는 날이면 조금 다를까?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였다. 내일을 위해 잠을 자 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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