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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15화 (1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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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의 마술사

The Master of cards

친구들과 술파티를 한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그러니까 그 말은. 건국제 날까지 대략 4일이 남았다는 말이었다.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산타클로스도 생일이 있고, 우리 신님도 생일이 있고, 나도 생일이 있고. 그러니 우리나라에 생일이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당신도 물론, 알겠지만 건국제는 나라의 생일을 축하하는 국가 행사이다.)

이때 쯤 되면, 거의 모든 의상실의 최신 유행은 곡물이 탈곡기에 갈리듯 탈탈 털리고, 헤어샵, 살롱, 말을 무엇 할까.

당신도 알겠지만, 연애 외에도 아름다운 샹들리에 빛 속에서 군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은 정말 즐겁다. 그리고 거울의 자신과 눈을 마주쳤을 때,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은근히 뽐내는 일은 이 삶의 진미였다.

당신도 이걸 한번 쯤 해 봐야 한다. 그리고 한껏 꾸민 뒤 그런 빛나는 제 모습을 보아줄 멋진 백마탄 왕자님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20대의 재미는 다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니!”

나는 카밀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카밀은 자작가 레이디가 된 뒤로도, 여전히 그대로 카밀이었고 그랬기에 제가 자주 다니던 성당에 들러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

카밀은 동네에서 글을 알던 몇 안 되는 레이디들 중 하나였기에, 카밀이 오면 성당에는 성녀가 내린 듯 이야기에 고파있었던 아이들이 환호하고 기뻐했다.

카밀은 항상 반짝이는 눈빛과 함께, 윤기나는 금발을 한쪽으로 넘겨 둔 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몇몇의 아이들은 그래서 그녀 특유의, 그 빛에 가끔 이야기보다는 카밀을 더 반기곤 했다. 카밀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뛰어난 요리실력을 발휘해 아이들에게 빵과 쿠키를 해 먹였다. 내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은 일들이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카밀 같은 사랑스러운 아이한테는 엘런 릭포드같은 현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평생 그녀가 살고 있는 동화속에서 행복한 공주님이 되면, 싶었다. 카밀이 낡은 동화책을 든 손으로 내게 폭 안겼다. 카밀의 카모마일 향기가 훅 끼쳤다.

카밀이 그 동화책을 서랍 위에 올려놓고 내 옆에 와 앉았다. 나는 마침 카밀이 건국제에서 입을 드레스가 담긴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고, 디자이너가 페이지마다 고정해놓은 천의 감촉을 느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카밀.”

“응?”

“이건 어때?”

그녀의 금발과 푸른 눈과 잘 어울리는 드레스였다.

가슴이 너무 파이지 않은 머메이드 드레스. 드레스 위 새벽녘을 담아놓은 듯 새파란 원단 위에는 미세한 다이아몬드가 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드레스 가슴부부터 허리까지 빼곡하게 별처럼 수놓아져있었고, 그 아래에는 푸른 치맛단이 위치했다. 그 치맛단 위에는 또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예쁘게 흩뿌려져 있었고,

아, 나는 순간 샹들리에 빛 아래 그녀가 춤을 추며 뒤돌 때 그 다이아몬드들이 얼마나 그녀와 잘 어울리며 반짝일지 그만 생각에 잠겨버렸다.

“언니, 이건…….”

카밀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모아 제 입가에 두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

그리고 그녀가 내 목에 제 팔을 둘렀다.

“네 열 여덟 번째 생일 선물이야. 당겨서 미리 줄게.”

“그럼, 이 드레스에는 어떤 보석이 어울릴까?”

그러면서 카밀리아는 웃었다.

“언니, 빨리, 내 방에 와봐. 빨리 보석들 고르는 것좀 골라줘.”

카밀이 내 팔을 이끌고 제 방으로 향했다. 오 신이시여,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저 사랑스러운 카밀을 위해 뭔들 못한담.

밤이 온 뒤에는 항상 걱정이 많아진다.

나는 천천히 서류를 뒤적이고, 드레스를 살 돈이 충분한 지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번 세어보았다. 디자이너는 내게 드레스를 준비하겠다고 했고, 그리고 거래를 하는 그 날이 내일이었다.

꼭 내 드레스를 사러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벌써부터 두근거리고 설레서 잠이 안 왔다.

그리고 나는 멀리 화장대 위에 쌓아놓은 편지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로드 웨스트체셔, 제롬 화이트.

처음에는 편지였다.

그 무도회날 밤을 보낸 뒤 그 다음날에 온 편지였다.

건국제에서 당신이 내 파트너가 되어 주었으면 한다는 정중한 어투의 편지. 나는 물론, 거절했다. 애초에 건국제에서 파트너와 함께 다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카밀리아를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녀를 보호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공작의 애인으로 실컷 명성을 날린 뒤. 차기 레이디 화이트에게 눈총이나 받으며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바바라가 맞았다. 나는 이만 그를 끊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정말로 그에게 반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건 싫었다.

게다가 나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 날 밤을 마지막으로 그를 깔끔히 끊어 내겠다고. 그러니 나는 지금부터라도 확실히 내 의사를 밝히는 게 맞았다.

그래. 만약 내 인생이 책이었으면 나는 절륜한 남주의 기억나지도 않을 전 애인중 하나일 것이다. 첫경험을 알려준 그의 흐릿한 첫사랑쯤 되겠지.

그가 지금은 여자를 모르고 그래서 사랑이니 뭐니 매달리는 거지만, 결국 그 또한 그의 격에 맞는 그런 레이디를 만나 책 속의 트루 러브를 하게 될 것이었다.

물론 그게 나와는 해당이 없는 것이지만.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씩은, 제롬 화이트 당신이 공작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 한다. 그저 어느 변방의 기사였으면. 그럼 내가 마음껏 당신에게 설렐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나를 사랑하지만,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게 이 순간에서 가장 슬픈 부분이었지만 말이다.

그가 내게 청혼하더라도, 언젠가는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가 더 좋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게 나를 사랑해줬던 사람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인 것 같았다.

편지. 그 다음에는 그가 드레스와 구두라도 선물하고 싶다며, 내게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아마도 부티끄에 같이 가자는 말이었나본데 나는 또 거절했다. 바쁘다고 했다.

이쯤이면 그만 할 법도 한데, 그 다음에는 시간이 될 때 마음대로 쓰라며 백지수표가 왔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돌려보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자존심상한다던가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애초에 자존심, 카밀과 홀로 살아오며 이미 갈려 닳아 없어진지 오래였다.

그저, 그가 주는 평온에, 부에, 행복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관계도 언젠간, 끝나게 될 것이니 말이었다.

나 같은 그래, 바바라가 말하는 근본 없는 자작가 영애는 영원을 믿을 수 없었다. 영원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도 여유가 되어야지 하는 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램프 속 양초는 활활 타고 있었고, 어둠은 밤을 태우고 있었고, 나는 그냥 침대에서 뜬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카밀이 두고 간 동화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서랍 위에서 집어들어 표지를 가만 쓸어보았다.

‘멍청한 곰 이야기’

나는 피식 웃었다. 이미 표지가 닳아 떨어져 어떤 꼬맹이가 다시 그려넣은 모양이었다. 원래 제목이 멍청한 곰 이야기인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웃었다. 삐툴빼툴하게 꿀벌 왁스로 그려놓은 글씨를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옛날옛날에, 제가 가진 털 신발을 팔고 싶었던 교활한 여우가 있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호소해봐도 털 신발이 팔리지 않자, 여우는 곰에게 먼저 공짜로 털 신발을 한 컬레 주었습니다. 곰이 신어보았던 털 신발은 정말로 폭신하고 편안했습니다.’

내 손이 움찔 떨렸다. 나는 책장을 넘겼다.

‘그 털 신발에 익숙해진 곰은 털 신발 없이는 바깥을 걸어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곰은 여우에게 털 신발을 계속해서 높은 돈을 주고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곰에게 남은 것은 털 신발 없이는 걸을 수 없는 무른 두 발 뿐이었고, 그리고 텅 빈 곡식창고였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곰을 여우는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곰은 혼자가 되었습니다.’

책에 마른 눈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처음에는 한방울, 한방울이 쉬우니 두방울, 그리고 세 방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한없이 쏟았던 눈물들이. 말라붙었던 그 표독스러운 로징턴의 가시, 그 내 눈물들이 쏟아졌다. 나는 눈물을 닦아내고 책을 덮어 다시 책장에 두었다.

나는 그 곰에게서 나를 보았다. 여우가 곰에게 건네는 신발은 마치 공작의 애정과 같았다. 처음에는 공짜였지만, 점점 그것을 부담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많아진다. 그리고 곰이 여우의 털신에 길들여지듯 내가 그의 애정에 길들여지면, 나는 결국 그것이 없을 때 결코 홀로 설 수 없을 것이다. 신발 없이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곰처럼 말이다.

램프는 거의 다 꺼져가는 초와 촛불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가 보낸 편지봉투와 편지들을 깔끔히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미련없이 그것들을 하나씩 램프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꺼져가는 불빛이 점점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편지를 태우고 불을 완전히 껐을 때, 은은한 달빛이 흐릿하게 뻗어내리는 어둠 속. 거울 앞에 있는 내 얼굴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눈물자국은 말라붙어 있었고, 나는 그대로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그 뒤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날밤은 꿈을 꾸지 않았다.

“안 돼, 늦었다!”

그리고 나는 늦었다.

인생.

나는 그래서 노오오블 레이디의 체통도 잊고, 내 애마 필리아스를 타고 온 시내를 달려 펨벌리 의상샵에 도착했다. 그래서인지 도착해있었을 때, 내 모자는 어디 날라가고 없었고, 드레스는 온통 엉망이었다. 나는 어질어질한 상태에서 애써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며,

“안녕하세요.”

하고 코넬리아 펨벌리에게 한껏 상큼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생각보다 정말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저…레이디.”

제발, 미안한 표정 짓지 마. 제발. 미안한 표정을 지을 사람은 난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설마.”

“면목 없습니다. 바바라 아가씨가 드레스 가격의 열배를 부르셔서…….”

“그래서, 바바라에게 파셨나요? 드레스를?”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바바라는 나를 정말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내 우상인 루이지애나 고모께서, 항상 내게 말씀하셨다.

얘야. 어떤 사람이 네게 빗치처럼 군다면, 너는 그 동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역시 황금률과 같은 루이지애나 고모의 말씀들은 이 상황에 잘 들어맞았고, 나는 내 치맛단을 정갈히 정리한 뒤 상황파악에 들어갔다.

바바라 마르커스가 그 어마어마한 드레스 값의 10배를 부른 이유는 꽤나 단순했다. 그 여자도 그 돈이 뻔히 제 살림에서 나갈 걸 알면서도 그저 나를 엿먹이기 위해 패악을 부리는 거였다. (그녀의 4500 골드에 조의를 표하자)

그리고 그녀 스스로의 행동을 지지하는 굳건한 믿음은 내가, 공작의 돈을 빌리든 뭣을 해서라도 그녀가 부른 열배 이상을 부를 거라는 그녀의 생각서부터 나왔다.

하지만, 언젠가 루이지애나 고모가 말했듯이. 항해를 하는 선원은 언제나 역풍을 조심해야 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었다. 나는 눈을 빛내며 코넬리아 펨벌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럼 원점으로 돌아가죠.”

“네?”

“다른 드레스 보여주세요.”

“아…….”

디자이너 펨벌리는 당황한 듯 그녀의 카탈로그들을 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덕분에, 그 드레스 열배 값 받으셨으니 결제할 때 DC 되겠죠?”

“네?”

“할인이요.”

그러고서는 나는 우아하게 그녀가 준비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쯤 생각하건데, 나는 근본없는 자작가 레이디가 되는 것에 꽤나 큰 재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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