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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12화 (12/108)
  • <--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정신이 매우 혼미했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하다. 하지만 타오를 듯 눈부신 햇빛이 내 눈가를 태우고 있었고, 이 신선한 아침 공기 때문에 나는 미간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거운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마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헙 들이켰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곱게 잠들어 있었다.

    창틀을 넘어 그에게 떨어지는 빛조차 그의 얼굴을 축복하는 후광 같았다. 헐. 그리고 생각나 버린 것이었다. 오, 세상에, 신이시여.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내 몸을 스치던 목욕 스펀지를 든 그의 떨리는 손. 그리고 음, 어. 드문드문 보이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어젯밤 또 일을 치고야 만 것이었다!

    나는 수치로 두 손에 내 얼굴을 묻었다.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 영상처럼 재생되었다.

    ‘제발 좀 가만히 계십시오.’

    ‘그러기 싫다면요?’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오히려 좋다고 욕조에서 깔깔깔 웃어댔다. 그리고 보란 듯이 물 속에 잠긴 두 다리로 발장구를 치며 그에게 물을 튀겼다.

    흔들리는 수면 위로 뽀얀 두 다리가 오르내렸다. 그는 홀린 듯이 그 두 다리를 가만 보고 있었다. 내가 그런 그를 바라보니 시선을 돌린다. 얼굴은 조금 붉어진 채로.

    ‘참기 힘듭니다.’

    ‘참으세요. 제롬 경은 신사 아니었던가요? 응큼해라.’

    그땐 마냥 즐거웠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제국의 공작님께 목욕시중을 들게 할 날들이 내 생에 몇 일이 있을까 생각하며 그 순간을 즐기는 데 지극히 충실했다.

    ‘제발 좀 가만히 있으십시오. 집중하기 힘듭니다.’

    ‘그러면 더 가만히 있기 싫어지는거 알아요?’

    그가 참으려고 기를 쓰는 게 보였지만, 내가 그의 멀쩡한 셔츠에 목욕물을 뿌리며 충동질을 했었다. 일그러진 그의 금욕적인 얼굴이 얼마나 섹시해 보이던지. 세상에.

    내 손이 물살을 갈랐고, 젖은 셔츠를 입고 있는 그가 내게 너무나도 아름다워보였다. 마치 미의 여신을 홀린 미남이 살아 돌아왔다면 이 사람일까.

    나는 그대로 욕조에 기댄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볼을, 그리고 뒷볼을 쓰다듬었다.

    그때 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내게 키스를 해 왔다. 정말 책에서 나오는 것 같은 멋진 키스였다. 그가 내 두 팔을 잡고, 오직 제 욕망에 눈이 멀어 내게 입을 맞춰왔다.

    ‘참아 보라고 했잖아요!’

    ‘늦었습니다. 참게 해 주셨어야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제 셔츠 단추를 하나, 하나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그마저도 참을 수 없는지, 그저 제 옷을 힘껏 잡아당겼다.

    단추들이 바닥에 구르고, 젖은 셔츠가 바닥의 타일 아래 눌어붙었다.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그가 내 입술을 다시 한 번 훔쳤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일단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정말로. 이대로 몸정 붙인 뒤에, 마음정 붙이면 그대로 끝장나는 거였다.

    애초에 그의 집으로 향했으면 안 되는 거였다. 어제 그의 미소에, 친절에 마음이 약해져가지고 실수한 거였다.

    바바라의 말 대로라면 그는 언젠간 나를 떠날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에게 매달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찔하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나는 조용히, 바닥에 내 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파악해 내었다. 세상에, 그의 셔츠였다!

    세실리아 로즈, 이 미친년!

    그래. 어제 새벽에 기어이 그의 서랍을 뒤져, 각이 선 그의 셔츠 하나를 꺼냈다. 그 다음에는 섬유 향기가 좋다면서 옷을 들어서 킁킁대며 향기를 맡았다.

    ‘당신 셔츠는 항상 각이 서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렇습니까? 저는 단정한 게 좋습니다.’

    ‘저도 단정한 건 싫지 않아요. 당신이 단정하니까.’

    이런 말은 왜 했었지. 취중진담이었다. 망할.

    ‘그냥 한 군데라도 안 완벽한 구석이 있으면 안돼요? 짜증나. 셔츠까지 당신 닮아서 완벽하잖아요. 에잇!’

    셔츠가 항상 뻣뻣하게 각이 서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든다며 내 멋대로 멋진 셔츠를 입고선 마음껏 이불을 뒹굴었다. 그런 나를 그는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

    큰일났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이성을 놓아버린 내 잘못이었다. 금주령. 그래. 이 곳에서 무사히 나가면 더이상 술은 먹지 말자. 술은 위험했다.

    나는 조심, 조심 걸음을 옮겼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때, 으음. 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아픕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그때 그가 내 손을 훅 잡아 나를 침대에 미끄러트렸다. 내가 놀라서 눈만 끔벅이자 그가 싱긋 미소 지으며 나를 꼭 껴안았다. 따뜻한 그의 체온이 내게로 그대로 전해져왔다.

    “글쎄, 이러면 좀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아! 장난치지 마세요! 깜짝 놀랐잖아요!”

    “너무 좋습니다.”

    그가 내 볼에 입술을 맞췄다. 이 남자, 진짜 왜 이래.

    “이러지 마세요!”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그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애써 밀어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팔짱을 꼭 꼈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로 그대로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았다.

    “난 갈 거예요. 음, 어젯밤은 실수였어요! 실수!”

    이미 한번 저질러놓고 이렇게 말하자니 참 바보 천치 같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바바라의 말처럼 나는 그를 놓아줘야 했다. 그리고 어젯밤 일은, 진짜로 실수였다.

    무, 물론 내가 꼬시긴 했지만. 내가 나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다스릴 그의 몫의 영지가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만 다른 길을 가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그러고서는 바닥에 놓인 내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기 시작했다.

    “도와 드려도 되겠습니까?”

    “도움 안 되거든요! 제발 조용히 하고 계세요!”

    나는 옷을 정말 허술하게 꿰어 입고는 문가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고리를 잡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가 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로 내 어깨에 제 목을 묻고 있었다.

    “아, 전하. 감사하지만 이만 안녕히…….”

    내가 천천히 말해도 그는 그대로 나를 꼭 안고 있었다.

    “나가실, 겁니까?”

    “네에?”

    “실수라고 말하셨습니까?”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손이 문고리를 잡고 있는 내 손 위를 덮었다.

    “저 말고 다른 새끼한테도, 실수. 그렇게 말하실 겁니까?”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책임지십시오.”

    “누가 누구를요?”

    “애초에 먼저 유혹한 쪽은 당신이었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 사람 진짜 미친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책임지라니요? 그 말이 애초에 왜 당신 입에서 나오는 건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큰 짐승을 어르듯 그를 바라보았다.

    “음, 우리 아침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해 봐요.”

    그리고 위아래로 그를 훑었다.

    “제발 옷부터 입으세요.”

    그의 집 안에 있는 식당이었다. 그는 연신 좋은 일이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꿀 바른 토스트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나는 토스트를 포크로 연신 찌르며 그와, 토스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망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술을 마시고 잔뜩 신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죄인처럼 침만 꼴까닥 삼키고 눈치를 살폈다. 이건,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포크가 맛있네요. 하하하.”

    “레이디, 방금 포크가 맛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나요? 하하, 내 정신 봐.”

    대략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이 사람한테 반할 뻔 했다. 그러면 안 된다. 애초에 그에게 사랑한다고 구질구질 매달리는 건 내 사전에 없어야 하는 일이다.

    “일찍 돌아가실 겁니까?”

    “그럼요. 음, 당신 일도 있고. 그러니까 제가 일찍 집에 가면 얼마나 좋아요!”

    목소리가 조금 들 떠 있었다. 그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눈썹 한 쪽을 들어올렸다.

    “와!”

    나는 박수를 짝 소리나게 쳤다.

    “정말 좋은 아침이네요!”

    “괜찮으십니까?”

    아뇨. 당연히 안 괜찮죠. 나는 겉으로 웃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토스트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의 현관이 가까워졌다. 그때, 마부가 마차를 준비해 오겠다고 일어섰다. 그는 사용인들이 모두 보는 눈앞에서 나를 그대로 꼭 껴안았다.

    “또 오십시오.”

    “그…래요.”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가 내 이마에 제 입술을 살짝 눌렀다.

    “레이디, 공작 전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제롬이 마부를 흘겨본 뒤, 다시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또 오십시오. 부디.”

    “그, 그럴게요.”

    나는 손을 흔들어 주고는 뒤돌았다. 조금 걸음을 옮긴 뒤, 다시 뒤를 돌아보니 그가 나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문을 쾅 닫고는 문 뒤에 몸을 기대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아아, 망할.”

    아무래도 제대로 코가 꿰인 것 같았다. 큰일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해는 벌써 중천, 그리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시리듯이 부신 햇빛이 나붓이 공작의 마당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마차에 주저 없이 올라탔다.

    내가 내 저택, 로즈블룸에 도착한 것은 오후였다. 집에 돌아오니, 로즈블룸에 이미 당도해 있던 불청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앨런 릭포드. 나와 바바라의 전 약혼남이었다. 나는 천천히 응접실로 올라갔다. 익숙한 인영이 가까워진다.

    “레이디 로즈.”

    앨런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애써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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