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0화 (10/108)

<--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예, 사실입니다.”

그는 침착하게 답했다.

“제가 그녀의 기사가 되어 주기로 했습니다.”

“고, 공작께서 말입니까?”

앨런의 얼굴이 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는 급하게 머릿속 주판을 튕기는 듯 바바라와, 공작과,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큼큼 목을 골랐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는 애써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레이디들의 일인데 섣불리 끼어들어, 결투를 신청하기나 하고. 그, 그러니 사내들끼리 결투 없이, 평화적으로 이 일을 결단 짓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그저 레이디들의 일’이라고 했나요, 앨런 릭포드 경?”

날카로운 바바라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바바라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제 손에 낀 반지를 빼냈다.

“바, 바바라, 자기.”

“됐어요! 나를 위해서 목숨 하나 못 바쳐요? 진짜 재미없어.”

그녀는 앨런에게 반지를 던지고는 뒤돌아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녀의 팔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아그니스였다. 바바라가 힘없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아그니스가 예쁜 눈을 휘며 싱긋 웃어보였다.

“듣자 하니 제도에 재미있는 소문이 있던데.”

“당신 뭐야.”

“당신이 일부러 앨런한테 접근했다면서요. 세실리아 엿먹일려고. 그리고 온 율러에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그 잘난 로징턴의 가시의 애인을 뺏은 게 나라고.”

“그랬다는 증거가 어딨는데요? 웃겨, 정말.”

바바라가 아그니스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아그니스는 기사였다. 바바라가 그녀의 악력을 이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짜냐고 물어보니까, 내 사촌 세실리아를 제 티파티에 초대해 놓고 앨런을 불러? 제정신이야?”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바바라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그래. 내가 그랬다면 뭐! 제 멍청한 약혼남이 세실리아 차고 나한테 온 건 사실인데! 애초에 당신 뭐야? 당신이 뭔 상관인데 시비냐고!”

“나요?”

아그니스가 웃었다.

“이 신사분 구해주려는 사람.”

그녀의 시선이 앨런에게로 향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아그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도 정신 좀 차려요. 내가 아까 들었거든. 바바라가 발코니에서, 다른 레이디들에게 아까 세실리아 표정 봤냐면서. 참 볼만 하다고. 그렇게 얘기하면서, 당신 쓸모없어지면 곧 차버리겠다고 얘기한 것도 들었어요.”

“내...내 바바라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믿던가, 말던가. 전 이만.”

그리고 그녀는 무해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두 손을 올리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바바라는 분한 듯 바닥에 발을 쾅 구르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바, 바바라, 자기?”

앨런은 멍한 표정으로 바바라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이만 가요.”

내가 공작의 팔을 잡고 당겼다. 공작은 내 말대로 그만 순순히 따라왔다. 쓰라렸다. 바바라가 항상 나를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니까 마음이 아프다.

그때, 나는 주황색 드레스자락이 후문에서 팔랑거리는 걸 보았다. 저 뒷모습은 분명 바바라였다. 나는 공작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를 보았다.

“저, 잠시만 실례할게요.”

“레이디.”

“잠깐만요. 그거면 돼요.”

나는 재빨리 바바라를 쫓아 후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와 이야기해야 했다.

밤은 어두웠지만, 비탄에 빠진 레이디들이 향하는 곳이라면 뻔했다. 정원, 그리고 분수대 앞. 분수대에 앉아 물이 쏴 흘러나오는 걸 듣고 있자면 마음이 자연히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다면 인파가 한산해서 더더욱 좋다.

물론 내가 이걸 어떻게 아냐고 물으면, 그냥 나도 여러 번 겪어봐서 안다고 답해주고 싶다. 꼭 남자 때문에는 아니고, 근본 없는 자작가 레이디가 돈 없이 사교계 활동을 한다는 게 정신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라서. 나도 주로 애용하는 곳이다.

멀리서 분수대가 보이자, 나는 뛰는 걸 멈추고 느리게 그 곳으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풀물이 들어 드레스 자락이 온통 더러워진 바바라가 그 앞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뭘 봐. 동정이라도 하러 왔어?”

“아니.”

“그럼 뭐.”

“왜 그랬어?”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바바라는 나를 붉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꺼져.”

“바바라!”

“너랑 지금 한 곳에 있는 것 만으로 짜증나니까 꺼져 버리라고!”

그녀는 그 뒤로 다시 두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제발 꺼져.”

나는 그대로 서 있다가, 뒤돌았다. 그 때, 그녀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열여섯 데뷔탕트에.”

내가 다시 뒤돌아 바바라를 보았다. 바바라는 차가운 달빛 아래, 물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깨진 달빛이 반사되어 분수의 수면 위에 울렁였다.

“나는 정말 신났어. 데뷔탕트니까. 수많은 귀족부인께서, 내게 선물을 주셨고 할머니께서는 당신께서 제일 아끼는 브로치를 선물해줬어. 내가 주인공이 될 무대였지. 알아?”

“…….”

“모든 게 다 멋지고 대단했어. 사람들은 내 드레스를 칭찬하고, 윌리엄 영식도 나를,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어. 어떤 낡아빠진 드레스를 입은 이름 모를 자작가 영애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게 나였다. 나는 그대로 굳어 바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나. 네 드레스, 유행 지난 거였는데. 드레스는 어느 낡아빠진 드레스를 눈에 보이게 대충 수선한 게 티가 났고, 장신구는 녹을 닦아냈지만 역시 낡아 빠진 거였지. 진창에서 구르다 온 예법이라고는 모르던 기집애였는데. 다들 멍청하게 너랑 춤 한번 춰 보려고 난리였지.”

그녀는 분노에 차 손을 떨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내 데뷔탕트를 망쳤어, 세실리아 로즈. 네 아버지가 그렇게 어이없게 죽지만 않았어도, 넌 애초에 그 자리에 있을 자격도 없었어! 넌 아직도 내 눈에는 가진 것 없는 비천한 껍데기 자작가 영애야. 그리고 넌 영원히 그럴거고.”

“그래.”

나는 덤덤하게 답했다.

“이유라도 아니까 조금 속 시원하네. 고의가 아니였어. 미안.”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그녀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네가 감히 그런 말 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굴렀다.

“세실리아 로즈, 네가 지금 아무리 그렇게 우쭐해도. 그 남자, 공작. 널 언젠가 버릴거야. 버릴 거라고. 그때 누가 웃는지 봐. 그 사람 지금 네 옆에 있는 것도 지금 뿐이야. 다들 가문에 맞는 제 짝 찾아서 결혼하기 마련이니까! 넌 버려질 거라고! 비참하게!”

그녀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알아.”

“안다고?”

“그래.”

나는 뒤돌았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좋은 밤 되렴, 바바라.”

그리고 걸어나왔다.

문득 보이는 밤하늘의 새하얀 달이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땐, 밤길을 걸을 때 마냥 따라오는 달이 내 친구 같았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그 사람을 진짜로 좋아했었다면, 방금 조금 많이 비참했겠다. 그치?”

나는 달을 향해 읊조리듯 말했다. 그리고 가까워지는 후문의 환한 빛무리로, 빨리 걸음을 옮겼다. 제롬 공작은 항상 그렇듯, 파티의 정중앙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

마냥 남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람 속에 파묻힌 그의 모습이 퍽 이질적이다. 그러며 생각하길,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말아야지.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눈이 마주치니 생긋 미소짓는다. 나는 애써 그의 미소를 돌려주려 노력한다. 그의 미소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을 눈먼 채로 쫓는 마음은 마치 부나방 같을 것이다. 언젠가는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제 자신을 빛으로 내던지는 부나방.

그러니, 나는 현명하게 지금을 즐길 것이다. 즐기고, 그가 애인이 생겼다면 그때 행복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그를 떠나보내 주자. 그러자. 나는 애써 다짐하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잠깐, 멈춰서고는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정확히 열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게 동화 속 이야기였다면,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릴 시간이었다.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오늘 밤 앨런 릭포드에 대한 일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니 내가 더이상 공작의 옆에 서 있을 이유도 없었다. 빨리, 이 관계가 더 깊어지거나 진지해지기 전에 그를 정리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을 때, 마지막에 울게 될 사람이 누구일지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가 사람들을 지나쳐 내게 천천히 걸어온다.

우리의 걸음은 멈추고, 서로를 마주본다. 그가 미소짓는다. 환하게. 나는 마음속으로는 웃지 못하며, 작게 입꼬리를 말아 그의 미소를 돌려준다.

자정을 알리는 종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오가는 시선 속에서, 말을 먼저 꺼낸 것은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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