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8화 (8/108)

<--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카밀리아와 함께 층계를 걸어 올라간 나로서는, 잘 익은 수플레처럼 희망으로 부풀어올랐던 가슴을 다시 절망으로 꾹꾹 눌러 담아야 했다.

“자, 언니. 뭐해, 어서 골라봐!”

“음……. 어. 그래. 카밀리아. 예쁘다.”

나는 카밀리아와 함께 같이 옷장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문제가 있었다면, 카밀리아의 옷들은 전혀 나와는 어울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카밀리아는 뭐랄까, 말하자면 소설 속에서 주인공처럼 묘사될 것만 같은 미녀였다.

‘그녀는 화려한 금발에 벽안을 갖고 있었으며 수수한 인상에 청순한 미소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같은 인사.

그리고 나는 그녀와는 정반대로, ‘이목구비가 화려하고 향수 향기가 진해서 분명 아름다웠지만 남자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같은 인사였다.

그러니까 아름답고 수수한 카밀리아와 어울리는 옷들이, 내게 좋은 선택이 될 리가 없었다. 분명 두고두고 비웃음을 당할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역시 내 옷들을 입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쉬며 걸어나왔다. 새 드레스를 살 돈은 없었다. 아마도 저번에 입었던 노란색 드레스가 좋지 않을까, 가만 생각에 잠겼다.

“아그니스 언니가 도울 수도 있을 거야.”

문턱에 얼굴만 쏙 내밀고 있던 카밀리아가 말했다.

“아냐, 괜찮아. 카밀.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해결할게.”

나는 방에 들어와서 제작년에 입었던 노란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하녀들이 와서 대충 옷을 입는 것을 도와줬다. 나는 거울 앞에 비친 내 모습을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확인해보았다.

2년 전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르며 고민도 많아져서 가만 딱 다물린 입과 얼굴에는 가만 수심이 깊었다. 게다가 내 인생의 현주소에서 공작을 빼고 생각해봤을 때,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은근히 날 깔보고 조롱하던 바바라 마르커스, 날 떠나고 굳이 바바라에게 간 앨런, 망한 평판, 그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이 다 몹쓸 공작의 고백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 일에 대해서 진심이 아닐 수도 있었다. 신사들끼리 내기를 해서 나한테 고백을 해 보자고 장난을 쳤을 수도 있고, 그리고 어쩌다보니 돌이킬 수 없어서 나를 사랑하는 척하며 나와 하룻밤을 기꺼이 보낸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의 표정과 행동을 보았을 때, 그가 나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을지 몰랐지만. 사랑은 가변한다. 특히 잃을 것이 없는 공작의 위치에서라면 더욱 그럴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아직은 필요했다.

“레이디, 편지가 왔습니다.”

나는 뒤를 돌아 하녀장 페넬로페를 보았다. 페넬로페는 손에 편지를 들고 있었다.

“이리로 줘 보렴.”

나는 편지를 건네받자마자 이것이 앨런에게서부터 온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편지의 소나무 인장이 그의 가문을 상징했다.

나는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가 나에게 결국 결투를 신청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용병을 고용할 수 없는 내 재정상황과, 내게 검을 들어줄 남자형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결투를 신청한 그의 이기심에 나는 순수히 감탄했다.

‘만일 제 요청에 거부하신다면, 스스로 검을 드셔야 하실 겁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투가 끝날 때 까지 공작을 어떻게 해서라든 잡아두어야 했다. 그 이후의 일은 나도 모르겠지만.

항상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여태껏 그렇게 해왔듯이. 내게 중요한 건 그리고 지금이었다. 앨런의 칼에 찔려 죽기 전에, 그리고 자존심 다 버리고 바바라에게 빌기 전에, 나는 이 무도회에서 어떻게 해서라든지 앨런이 결투를 포기하게 만들어야 했다.

“페넬로페, 깃펜과 종이를 준비해 줘.”

무도회를 위해 치장을 하기 전에, 나는 열심히 펜을 놀려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공작은 필히 이 무도회에 참석해야 했다. 제국의 검이 나 대신 칼을 든다고 하면, 앨런은 분명 제 칼을 내려놓을 것이다.

앨런은 공작을 감히 상처 입힐 수도, 죽일 수도, 다치게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앨런은 필사적으로 싸울 수 없는 싸움에서 목숨을 걸 만한 영웅은 아니었다. 그는 소시민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 공작이 이 무도회에 나타나도록 하늘에 빌어야 했다.

제발. 나는 글자를 꾹꾹 눌러쓰며 생각했다.

공작이 내게 했던 말들이 모두 거짓이 아니길. 그가 내 마음을 한낱 내기 따위에 이용한 게 아니길.

밤이 깊을수록, 파티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나는 발로 바닥을 톡톡톡 건드리며 정문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빠른 사내의 걸음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는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났다.

“화이트 공작가에서 왔습니다.”

시종인은 내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레이디 세실리아 로즈 귀하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게 나예요.”

나는 침착하게 걸어가 편지를 받았다. 표정은 짐짓 태연했지만 손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시종인은 문을 닫고 떠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편지를 뜯어 확인했다.

“뭐래, 뭐라고 쓰여 있어?”

카밀리아가 옆에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글자들을 대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격식있는 필체로 적혀있는 그 글들은, 분명 그가 무도회에 참가할 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만,

“늦는다고?”

일정이 있어서 그가 조금 늦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어쨌던 상관없다. 그가 무도회에 나타나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안도했다. 카밀리아는 제 일이라도 되는 듯 기쁜지 함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안겼다.

“언니, 내 보석들 빌려 줄까? 내 자수정 귀걸이랑, 오팔 목걸이도 언니를 위해서라면 빌려줄 수 있어!”

“아냐, 카밀. 난 이 목걸이로 족해.”

나는 내 두 겹 진주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이었다.

“난 이만 가볼게. 집 잘 보고 있어. 그럼 올 때 마카롱 사올게.”

“응! 언니 잘 다녀와.”

나는 카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무도회에 참가하려면, 지금쯤 마차를 타는 것이 좋았다.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카밀리아에게 작별을 고하고, 문 밖으로 나섰다.

“어?”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마당을 차지하고 선 것은 내 낡은 마차가 아닌, 공작가의 화려하고 견고한 흰색 마차였다.

아까 편지를 전한 시종인, 그러니까 마부가 마부석에서 내려와 내게 걸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아까 그 사람, 간 게 아니었어?”

“레이디, 샘슨 부인의 성으로 모셔 드리라는 공작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어……. 네. 그래요.”

나는 얼떨결에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공작의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움직인다는 걸 느낄 때까지 나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정신을 놓고 멍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이러니까 그 사람, 진짜 진심인 것 같잖아…….’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부디, 공작이 파티에 빨리 모습을 드러내주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마차로 오래 달리지 않아 샘슨 부인의 성이 가까워졌다.

어느새 하늘에는 밤이 내려 창밖은 온통 어두웠고, 나는 반짝이는 별들과 그 아래 잠긴 화려한 그녀의 성을 바라보며 가만 생각에 잠겼다.

샘슨 부인은 수도에 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하고, 많은 귀부인들의 조언자라고 불릴 만큼 권세도 밀리지 않았지만 나를 선의로 그녀의 파티에 초대할 만큼의 호의가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위대한 가십쟁이였다. 그렇다. 그녀가 갑작스레 파티를 연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그녀의 지붕 아래서 인간 버전의 투견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악명높은 로징턴의 가시가, 그녀가 후원하는 바바라 마르커스에게 쥐어 터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초대장은 지옥으로의 초대장이라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뜻대로 바바라에게 굽힐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검을 들어줄 남자가 없어서 앨런과 칼싸움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와, 빛무리가 점점 가까워짐과 동시에 마차가 멈췄다. 올곧은 걸음소리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화이트 가문의 시종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제게 부디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영광입니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그 뒤에 내게 정중하게 목례한 뒤, 마차를 몰고 멀어졌다. 나는 그래서 샘슨 부인의 성 앞에, 완벽하게 홀로 서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와 함께 정문으로 다가갔다. 계단을 홀로 오르자 시선들이 쏟아졌다. 비웃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익숙하다.

거대한 봉을 든 시종인이 출입문 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실리아 로즈.”

“동행인은 없으십니까.”

“응, 없어.”

그러자 주위에서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시선을 흐려 주위를 한번 대충 쏘아봐 주고는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이었는지 날씨가 꽤 쌀쌀해, 나는 숄을 꼭 여몄다.

그가 봉을 쿵쿵 내리치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레이디 세실리아 로즈, 입장하십니다."

화려한 빛무리가 어둠을 잠식하고 내 앞에 펼쳐졌다. 귀한 샹들리에, 난간, 금빛 그리고 짝을 지어 춤추는 사람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단정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의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세실리아 로즈.”

주황 드레스를 빼입은 바바라와, 그녀의 시녀들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기세등등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요즘 대세가 ‘고전’ 인줄은 몰랐네. 벌써 2년 전 유행이 돌고 도나봐?”

그녀는 우습다는 듯 시선을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아님 네 기막힌 애인은 네 드레스 하나 감당할 만 한 돈이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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