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아침일까?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면서도 머리가 띵 하니 아파서 생각이 불가능했다. 눈을 살짝 떠보니 바깥에는 어둠이 실컷 깔려 있었다.
바닥에는 와인이 눌어붙은 유리잔이 놓여 있었고, 이 익숙하지 않은 바닥이 로즈블룸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묵묵했고,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가슴을 가린 뒤 몸을 일으켰다.
“실망이에요.”
“예?”
그가 크라바트를 단정히 매며 뒤돌았다.
“난 아침에 눈 떴을 때 옆 자리 비어있는거 보고 싶지 않았어요.”
“아침 준비하려고 했습니다만.”
“전 원래 아침 안 먹어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가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앉았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습니까, 내 여왕님.”
“글쎄요, 나 항상 침대에서 아침 먹는 거 해보고 싶었는데.”
“레이디가 원하시는 대로.”
그가 내 볼에 입을 쪽 맞추고 뒤돌아 나갔다. 나는 알몸으로 아침을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들고 있었다.
그때 그의 화장실에 단정하게 걸린 그의 목욕가운이 보였다. 한 치의 구김도 없이 곱게 걸려있는 것을 보면 딱 그의 것이었다.
나는 내 팔에 끼워 넣던 옷들을 다 바닥에 던져 놓고 가운을 입기로 결정했다. 조금 크긴 했지만 팔만 조금 걷어붙이면 움직이는데 무리가 가는 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체향이 났다.
나는 다시 침대에 뛰어들어 이불의 따뜻함과, 푹신거리는 베게에 안착했다. 시트가 조금 더럽긴 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비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어제 그와 하룻밤을 보냈지만, 그게 내가 그에게 반해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나에 대한 사랑과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지만, 나는 그저 그 순간 그가 내게 주는 그 기쁨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냥 물음표였다.
그는 이미 내게 충분히 반해 있었지만 말이었다.
그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거의 잘 정제된 완벽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거의 그와는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이었고.
벌써 아침부터 차이가 났다. 나는 늦잠을 좋아하고, 부지런한 제롬 화이트 씨는 벌써 아침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실리아.”
그때, 내 상념을 방해하기라도 하는 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고 트롤리를 밀고 있는 그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처음에는 못 믿었는데, 저 얼빠진 듯 한 환한 미소를 보면 그가 내게 반해있음은 정말로 명백했다.
맞다. 그 파티날 밤에 내가 말했던 가식 순도 100%라는 그 미소 말이다. (결국은 가식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판정되었지만)
마침 허기지던 참이었는데 좋은 냄새가 훅 끼치자 기분이 행복해졌다. 그는 내 침대에 작은 접이식 책상을 펼쳐놓고 온갖 접시들을 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시종인들을 시켜도 됐었는데요.”
그러자 그의 손이 멈추었다.
“가운을 입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벗고 있을 줄 알았다는 말이다.
“그럼 제롬 씨가 나가기 전에 제가 가운을 입고 있었으면요?”
“그래도 싫습니다.”
그가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저만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 이마에 제 것을 맞댄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문 쪽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어쩔 땐 완벽한 젠틀맨이다가도 이럴 땐 그냥 애 같다.
그때 그가 무언가 잊기라도 했는 듯 멈춘 뒤 뒤돌았다. 그리고 그 푸른 벽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 드셨을 때 쯤, 침대 옆 저 줄을 당기면 하녀들이 올 겁니다.”
“전하께서는 아침 드시러 가는 거예요?”
“예. 다 드시고 집에 가셔도 좋고, 하실 말씀 있으시면 집무실에 있겠습니다.”
“그래요. 카밀이 기다릴 테니까 난 이만 집에 갈게요.”
그 말과 함께 모락모락 김이 나는 토스트 조각을 푹 찍어 메이플 시럽 속으로 굴렸다. 뜨뜻미지근한 단맛이 입안에서 퍼지자 내 온 영혼이 이곳이 천국이라고 하는 듯 했다.
“예. 아, 그리고 레이디의 마차를 방금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것으로 타고 가시길.”
그리고 그 천국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딱,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네? 왜요?”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당신 마차 타고 집에 가면, 그게……. 그러니까.”
“왜 잤다고 말을 못하십니까.”
“아, 정말로! 그렇게 온 왕국에 자랑하고 다닐 일이라도 있어요?”
“예.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음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한동안 입을 벌리고 눈만 끔벅였다.
좋은 입욕제 향이 나는 욕조에서 흐느적거리며 한참을 누워 있다가 지금은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입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깨닫게 되는 건, 그는 내가 알기론 완벽이라는 명사를 인간으로 빚어놓은 듯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침식사, 그의 하녀들, 그의 방, 그의 각이 선 셔츠부터 모든 것이 다 재단되어 있고 그 말대로 깔끔하고 완벽했다. 심지어 그의 방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도 모두 다 제 자리에 단정히 꽂혀있었다.
책들은 제목만 봐도 지루하게 생겼는데, 두께도 엄청나게 두꺼웠다. 나같으면 일생에 한번 쯤 펼칠까말까한 책들이 저렇게 손때가 많이 묻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먼지도 없었다. 자주 보는 책들인 모양이었다.
“어, 감사합니다.”
옷시중 드는 것을 마친 하녀들이 고개를 숙인 뒤, 침대로 시트를 갈러 갔다. 하녀들도 다 그의 완벽에 대한 취향이 반영되어있는 모양이었는지, 모두 조용하고 엄숙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보는 그들에게 내 목욕시중과 옷시중을 편히 맡길 수 있었다. 그 사무적인 눈빛과 정중한 어투에는 나에 대한 존중이 있었고, 그들은 어떤 것도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그의 책장으로 걸어갔다. 굳이 서재와 집무실이 있는데도 따로 방에 책장을 마련해 놓은 걸로 보았을 때, 그는 꽤나 학식이 깊은 것만 같았다.
나는 수많은 책 중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꺼내 보았다. 이해하지 못할 언어들(아마도 외국어나 고대어인 듯 했다)이 콩알만 한 글씨로 빼곡히 적혀있었고, 그의 지적인 글씨로 보이는 것들이 책 군데군데 자리했다.
날림으로 적혀져있는 그의 푸른 글씨들이 나를 조금, 설레게 했다.
“아가씨. 준비되셨다면 저희들을 따라오십시오. 마차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책을 덮어 대충 꽂아놓고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침인지라, 그의 궁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분주했고 오랜만에 맡아보는 산뜻한 아침 공기는 좋았다.
그야말로 사람이 완벽하게 안도하고 시간 속으로 녹아들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의 가문색은 은백색에 가까운 그 색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 때문인지 그가 준비한 마차도 거의 그 빛으로 덮여있었다.
말들도 모두 흰 빛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준마였고, 마부도 정갈한 제복을 차려입고 있었으며 그 뒤에 있는 마차는 동화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이 아름다웠다.
햇살이 선명하게 내리쬐며 마차를 반짝이게 했다. 그리고 섬세하게 박혀있는 보석들이 제 빛깔을 뽐냈다. 그의 가문의 인장이 그 격식을 상징하는 듯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어있었다.
마차의 의자도 솜이 다 빠져나가버린 내 마차와는 달랐고, 가죽으로 뒤덮인 의자에는 얼룩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바닥의 카펫에도 그의 가문의 인장이 한땀 한땀 수놓아져 있었으며, 벽을 문질렀을 때 그 부드러운 감촉이 좋아 나는 계속 마차 벽을 쓰다듬어보았다.
왜 기지배들이 다 공작가, 공작가 하는지 알겠네. 나는 가만 생각하며 마차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에 그가 한 말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가 내게 입을 맞췄을 때 조금 서투르다고 생각했는데, 내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그는 내가 처음이었다. 나는 그가 처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는 그것에 대해 질투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지는 않는 듯 했다. 그렇다고 치기엔 그의 질투가 너무 집요했지만.
자꾸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누구였냐고 물어재끼며 잠을 못 자게 하는 탓에 새벽에 고생을 좀 해야 됐다. 이래서 동정인 남자는 싫다. 자꾸 제 첫경험에 의미를 두고 집착해오니까 말이다. 낮에 신사라고 밤에도 그럴꺼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고모 루이지애나의 말이 기억났다. 딱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공작이라서 뭐 문란하지는 않아도 여자 한 둘은 만나봤을 줄 알았는데, 그는 그의 완벽한 신념과 특유의 순수함으로 여태껏 여자를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냥 딱, 그게 제롬 화이트 그 인간다웠다. 가문 이름도 딱 그의 결벽을 닮은 것 같지 않은가.
그 나이에 사회생활 잘하면서도 순수한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남자를 찾기 힘든데 제롬 화이트는 그냥 완벽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신께서도 그의 얼굴을 조각할 때 그렇게 정성을 들였으니 왜 다른 방면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았겠냐마는.
어쨌든 그는 너무 완벽했다. 나는 늦오후의 공기에 취해 눈을 천천히 감았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는, 솔직히 우쭐했다. 인간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율러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제국의 검이 나를 위해 싸워준다고 한다.
그의 동기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쨌던 그 점만으로도 모든 번뇌가 다 해결된 듯 기뻤다. 나는 자랑스럽게 로즈블룸, 내 집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단정한 하녀장 페넬로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2층 계단을 급하게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것은 페넬로페가 아니라, 동생 카밀리아였다. 그녀가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언니.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언니가 왜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오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언니, 말 좀 해봐!”
아주 정신이 혼미했다.
“카밀리아!”
“응?”
“말하자면 긴데.”
“빨리 말해봐!”
“공작께서 날 위해 검을 드시겠데.”
“세상에!”
카밀리아가 나를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그거 너무 잘됐다, 언니!”
“그러게.”
“나도 언니한테 전해줄 거 있어. 이거 봐봐.”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제야 카밀리아의 손에 들린 편지를 볼 수 있었다.
“샘슨 남작 부인의 무도회야!”
“아니, 그게 뭐 별 거라고…….”
“바바라 마르커스랑, 앨런 릭포드도 거기 있을 거래!”
나는 멍한 얼굴로 카밀리아를 떼어놓았다.
바바라와, 앨런도 그 무도회에 있을 예정이란다. 놓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