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만일 앨런 릭포드가 내게 결투장을 보낼 거였더라면 그와 내 기사의 싸움은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작이 내 편을 들 것이었다면, 사람들이 공작과 나 사이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야말로 만인에게 그가 내 뒤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점뿐인 거래였지만, 그에게는 만일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거짓말이었다면 오히려 손해일 것이다.
로징턴의 가시와 사귄다는 게 사교계에서는 썩 좋은 명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랄까.
거절하거나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낼 줄 알았는데 그는 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제 기사들을 소개시켜 주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기사는 ‘악몽’ 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윽. 방금 그 기사가 진짜로 다른 기사의 목을 베어버렸다. 피가 바닥에 철철 흐르는데, 당신은 이걸 보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웃으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오히려 점잖은 얼굴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쨌던 섬뜩한 인간이었다. 방금 사람 하나 죽었는데, 역시 힘과 권력의 세계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까만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에게 철그덕거리며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로드 웨스트체셔를 뵙습니다.”
“아, 샘 필립스. 일어나게.”
아까부터 수많고 많은 기사들을 공작 덕에 구경했는데, 이 남자가 그 중 제일 쎈 것 같았다. 키는 보통 남자치고는 컸지만 특출 날 정도는 아니었고, 몸은 깡마르다기보다는 다부졌다.
“여긴 레이디 로징턴.”
“레이디.”
나는 고갯짓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여기까지가 제가 보여드릴 기사들입니다, 레이디.”
“그렇군요.”
“필요한 사람으로 빌려가셔도 좋습니다.”
나는 그 다음에 상념에 잠겼다.
수많은 기사들을 보아왔는데 그들은 전쟁병기였다. 그야말로 앨런의 머리를 그냥 칼 한 합도 못돼서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앨런을 죽이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바바라 마르커스의 얼굴이 생각났다.
“전하, 저는 이 분으로 하고 싶습니다.”
나는 악몽을 가르키며 생글생글 웃었다.
뭐 그래도 앨런한테는 나름 최선을 다해 잘 살려고 노력해보라고 격려할 생각이었다.
일단 문제 하나는 해결이 되었다. 한 시름 놓을 때의 기분 좋음이란. 나는 그래서 그가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보다 내가 더 많이 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보다는 눈앞의 고기였다. 그가 주로 말을 거는 쪽이었고, 나는 대답하는 쪽이었다. 한동안 대화가 지속되더니 잠시 이야기가 끊겼다. 뭐라도 말 해봐, 내 마음 속의 작은 세실리아가 말했다.
“웨스트 체셔에서 보는 노을이 정말 아름답다고 했어요.”
“그렇습니까?”
그는 고기를 천천히 썰고 있었다. 제 소매가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귀족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가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뒤 나를 보았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급히 와인을 마시고 말했다.
“레니 아저씨가 말했어요. 온 세상을 다 돌아봤는데, 웨스트체셔를 지나가면서 보았던 그 노을이 최고였다고. 물론 저는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게 인상이 깊어서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어요.”
“레니 아저씨라는 분은 대단한 모험가셨나 보군요.”
“그랬죠. 항상 겨울에는 그래도 로징턴에 돌아오셨어요. 어린 카밀리아와 제게 줄 선물을 가득 들고요. 그리고서는 밤늦게까지 화로 앞에서 모험담을 들려주셨어요. 정말 대단한 사람이셨죠.”
“그럼 이번 겨울이 기다려지시겠습니다. 시간은 빠르니 말입니다.”
“아뇨, 레니 아저씨는 아버지처럼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셨어요. 모험가임과 동시에 용병이었거든요. 그래도 가끔씩 겨울이 오면 그립곤 해요.”
“듣게 되어 유감입니다.”
“그렇죠.”
나는 와인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대었다. 와인이 눈앞에서 타원 모양으로 넘실거리더니 모양을 점점 좁혀나가기 시작했다. 식탁에 잔을 내려놓았을 때, 내 잔은 비어 있었다. 나는 내 가까이에 있는 와인을 집어들어 잔을 다 체웠다.
속으로는 당신같은 사람은 저같은 사람에게 눈 떼는게 좋을거예요, 아니면 우리 이제부터라도 다른 길을 걷기로 해요. 라고 말하고 싶어도 나는 지금 그가 필요했다. 그가 내게 무엇이 되어주던, 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방패가 필요했고.
어쩌면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는지 모른다.
카밀리아를 키워오며, 그리고 로징턴의 레이디가 되며, 앨런 릭포드와 약혼을 하고, 로징턴의 가시가 되어 카밀리아를 지키며 시간을 보내왔다. 그야말로 숨 쉴 틈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그 일상에 저 사람이 끼어들었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대화를 한 번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용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전하.”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약간은 일말의 기대를 하며, 그의 눈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제가 왜, 좋으신 거예요?”
그리고 와인을 마셨다. 그래, 왜일까? 거짓 이유든 진심이든. 나는 그게 궁금했다.
“궁금하십니까?”
“네.”
“짧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카밀리아가 항상 그랬어요, 우리가 가진 건 시간뿐이라고. 전하께서는 그렇지 않나요?”
“레이디를 위한 시간은 많습니다.”
“그럼 들어보자구요.”
그가 식사를 마치는 걸 확인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을이 보고 싶어요. 보여주세요.”
배가 불렀다. 배가 불렀고, 해는 지고 있었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기분이 좋았다. 와인을 생각보다 많이 마셨는지, 머릿속에서 천사가 리라를 켜고 노래라도 부르는 듯 했다. 나는 발코니의 난간을 잡고 내 머릿결을 헤집는 바람을 만끽했다.
참으로 그림같은 장면이었다. 내 발 아래에는 우거진 소나무들이 펼쳐져 있었고,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그 곳에는 소나무가 아닌 곳은 온통 하늘이었다.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다. 마치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듯, 느릿느릿 지고 있었다.
까만 새들이 떼를 지어 하늘을 날고있었다. 나는 찬란한 햇빛이 나를 덮는 것을 만끽하며 머리카락이 뒤로 살랑이는 것을 느꼈다.
“오늘 즐거운 시간 되셨습니까.”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가 나의 옆에 와서 섰다.
“네. 태어나서 본 군인은 낡은 갑옷을 입고 있는 용병뿐이었는데, 정말 다양한 분들도 만나 뵈었네요. 처음이었어요. 이렇게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낸게. 그래서 특별했구요.”
진심이었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이 시간의 틈이 어색해 눈을 둘 곳을 찾다 그의 흠잡을 데 없는 크라바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시금 바바라 마르커스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앨런 릭포드도.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난간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힘없이 차분히 말했다.
“저는 제 진심을 최선을 다해 말해왔어요, 전하께서는 아시겠지만.”
“알고 있습니다.”
“이제 공작님께서 말하실 차례에요.”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저 놀라지 말자.
“제가 왜 좋으세요?”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를 보면 머리가 헝클어질 것 같아서, 나는 지평선이 펼쳐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물흐물한 빛덩어리가 지평선을 너머 스멀스멀 지고 있었다. 그것이 피를 흘리듯 하늘은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나는 그 빛에 조금 눈을 찌푸렸다.
“제 주위에 있던 사내들이 말하더군요. 그리고 당신 동생과 당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요?”
“한명이 로징턴의 그 유명한 장미, 한명은 조금 다른 쪽으로 명성을 날리는 로징턴의 가시. 저는 그 날 밤에 로징턴의 장미에게 반했습니다.”
“제 동생이요?”
“아뇨. 당신이었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이 누가 누군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당신이 그 로징턴의 장미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말도 안돼요.”
“당신은 그 날 벨벳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붉은 드레스라면…….”
좋지 않은 기억이다.
“당신은 어떤 남자하고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오직 카밀리아 로즈와 함께 있던 사내를 노려보기만 했지요.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와인을 있는 힘껏 마시고…….”
아, 제발.
“정원에서 그 사내에게, 카밀리아가 싫다잖아 이 머저리야! 하면서 그의 무릎을 당신 구두코로 차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가끔씩 그런 일을 할 때는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용기를 내려면 술이 필요하죠.”
그리고 나는 피식 웃었다. 아서 윌리엄스의 조인트를 날린 것은 내가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혼자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있는 쪽을 보더니, 혹시 경도 카밀리아 때문에 온 거라면 나중에 얘기하죠, 라고 하시더군요.”
여기부터는 기억이 없는데.
“그리고, 카밀리아 때문에 오셨나요? 하고 재차 물으시더군요.”
“그리고 전하께서는 아니라고 하셨고요.”
“그랬죠. 그러니까 레이디께서는 구두를 벗어던지더니 그럼 와서 술이나 따르라더군요. 시가를 피우시며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에 대해 말들을 늘어놓으셨죠.”
“그걸 설마 다 들으신건가요? 믿을 수가 없어.”
“그다음에는 호수로 뛰어들어 첨벙거리며 천진난만하게 웃으셨습니다. 그때 보았던 당신의 붉은 입술이 어떻게 휘어지던가, 하늘거리던 그 갈색 머리카락과, 목에서 춤추던 하얀 진주 목걸이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죠. 하늘에서는 달이 빛나고 있었고, 밤은 어두웠습니다만 당신은 그 붉은 드레스를 입고 호수에 반사된 빛무리 위에서 춤을 추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장이 번지지 않았을까 진지하게 걱정했다.
“그 뒤로 고민했습니다. 친구들은 어리석은 선택이라고들 했고, 가신들도 이 선택을 존중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본 것은 하루만의 일이었지만 마치 정교한 그림이라도 그려낸 듯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꽤나 디테일하네. 아니, 정말 진심이려…나?
“그리고 당신이 약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파티에서 당신이 그 붉은 드레스를 입고 발코니에 혼자 서 계신 모습을 보고 저는 이성을 잃고 당신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제게 마음을 고백하신거구요?”
“그렇습니다.”
“오. 정말 생각보다 많이 긴 이야기네요.”
그가 낮게 웃었다.
“당신은 오늘 제 기사 중 한 명을 골랐지만, 저는 제가 가진 최고를 내놓겠습니다.”
“악몽…보다 더 뛰어난 기사인가요?”
“그렇습니다.”
“그게 누구인데요?”
“저입니다.”
그는 뽐내는 사람치고는 담백했고, 그의 목소리는 간단명료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그렇군요.”
“대신 그 답례로 무언갈 받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나는 속으로 제발 그게 카밀리아와는 관련이 없기만을 바랬다.
“당신이 제게 마음을 열어 줄 거라는 걸 제게 확신시켜주십시오.”
“노력할게요.”
말 한 마디에 웨스트체셔의 가장 실력 있는 기사라면, 꽤나 좋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또 이겼습니다.”
“말도 안돼!”
그리고 내가 까르르 웃었다.
“퀸을 너무 빨리 움직이셨습니다.”
“이건 반칙이에요. 저는 오늘 겨우 체스를 배웠다고요.”
“그럼 레이디가 좋아하는 게임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로드 웨스트체셔께서 못하는 게임이라면 다 좋아요.”
“그럼 하나라도 댈 수가 없겠군요.”
“저만 마시는 건 재미없어요. 자, 마셔요.”
내가 그의 잔에 술을 쪼르르 따랐다. 그리고는 그에게 걸어가 그의 옆에 앉았다.
“이 세상에서 좋은 와인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머저리에요.”
“조금 안 마셨다고, 당신이 무릎을 날려버린 그 사람과 같은 취급이라니. 저는 억울하군요.”
그 말과 함께 그가 와인을 들이켰다. 그리고 나는 그와 키스했고, 화로에 불은 타닥타닥 타고 있었고, 뭐 그리고 나는 기분이 내키는 내로 그의 셔츠 단추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