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내가 그의 방으로 처음 걸어 들어갔을 때, 본 것은 그의 뒤에서 쏟아질 듯 내리는 햇빛과 비싸보이는 책상 뒤에 앉아있는 그였다. 그는 깃펜으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고,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고개를 들어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이 계속되었다.
“제가 알기로는, 저희…….”
그가 시선을 옮겨 나를 보았다. 그리고서는 다시 책상 위의 문서에 집중하며 펜을 놀렸다.
“그러니까 전하와 제가, 구면이죠?”
“그렇습니다만.”
대답은 짧았다.
“전하께서 파티에서 제게 하신 말…….”
“생각해보셨습니까?”
그가 시선을 옮겨 나를 보았다. 그는 태연한데 나는 사자굴에 들어온 양처럼 떨고 있었다.
“하긴 했죠…….”
그의 시선이 완전히 서류를 떠나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내 치맛단이나, 책상의 목재 무늬를 힐끔힐끔 보며 어색함을 피하려고 하고 있었다.
상상속에서는 수만번 그의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당당하게 담판을 지었는데, 왜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나를 항상 슬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감정이 사랑은 아니었다는 게 너무나도 명백하군요.”
그는 다시 서류를 보았다.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저는 그 날 처음으로 전하와 이야기했었죠.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어요. 그리고 그때부터의 감정이 사랑은 아니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네요.”
그가 작게 웃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류의 작은 웃음이라던가.
“그럼 여기 왜 있습니까, 미스 로즈.”
“그럼 제롬 경께서는 한 번도 절 보러 오지 않으셨나요?”
마음 속에 원망이 일었다. 저 사람은 뻔뻔하게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놓고 지난 일주일동안 기별이 없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분노가 일었다.
“역시 그런거였나요? 내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신사께서 불쌍한 숙녀를 두고 내기라도 벌이신 거였나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제 약혼이 그렇게 끝났어요!”
말이 끝났을 때, 나는 책상을 짚은 채로 서서 씩씩거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에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는 그 태연함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요.”
“좋군요. 그럼 앉으세요.”
누군가가, 제 감정을 너무 쉽게 드러내버리면 연애는 너무 재미없는 것이라고들 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카드게임같기 때문에 패가 빨리 뒤집히면 흥미도 그렇게 빨리 식기 마련이지, 라고 고모 루이지애나가 말했다.
그런데 고모, 저 사람을 봐요. 저렇게 제 마음을 털어놓고도 저렇게 승부사처럼 태연하고 자약합니다. 그러니 제가 저 사람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죠.
“약혼이 깨졌다고 말하셨습니까?”
“그래요.”
“잘 됐군요.”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을 거다. 그의 집무실은 그의 깃털펜 움직이는 소리만으로 조용했고, 괘종시계 침 돌아가는 소리가 컸다.
“레이디께서 그날 밤에 제게 한 말들을 기억하십니까?”
“아뇨.”
“저는 기억합니다. 다시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
“그래서 레이디가 원하시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담판을 지으러 온 사람은 난데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치맛단만 만지작거렸다. 스무살 성인이 된 지가 꽤 오래됐는데도 그의 앞에 서면 여덟 살짜리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레이디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제게 원하시는 게 있어서겠죠.”
그때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그와 같은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의 그 찡 하는 감정을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온 세상의 푸른 하늘을 담을 것만 같은 눈이 나만을 담고 있고, 입술은 얼마나 탐스러워 보이는지, 그 멋진 턱이나 향이나, 분위기나 공기나.
따스한 공기 속에 있는 먼지들이 햇살처럼 느긋하게 떨어졌다.
아, 이런 게 미인계구나. 나는 속히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담판을 지으러 왔지 그의 외모에 헤실거리러 온 게 아니다.
“네. 그렇습니다, 전하.”
“말해 봐요.”
“실례되는 부탁이지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를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순간 영원할 것 같던 그의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그 갭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다시금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평소의 미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 것은 분노를 숨기기 위한 단정한 미소였다는 것이고,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어떻게 한 사람의 감정으로 이렇게 넓은 공간의 분위기가 팬케이크 뒤집듯 변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저것이 그의 재능 중 하나겠지, 라고 생각하다가 침묵이 길었음을 깨달았다.
“공작님은 제 깨진 약혼에 책임이 있어요.”
완벽하다. 카밀이 말하라는 대로 정확히 말했다. 나는 내 스스로에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어차피 저랑 약혼하라는 명을 받고 좋아라 할 남자는 없으니까, 잠시동안 제 애인처럼 연기해줄 사람이면 돼요. 그리고 정말, 정말 민폐는 안 끼치리라고 약속해요. 저를 보고 불쾌해하지 않을 사람이면 외모는 따지지 않을게요, 부유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허울뿐인 애인이 필요한 이유는?”
“그, 그러니까 좀 곤란한 일이 생겨서. 그 바바라 마르커스년이 제 약혼남을 뺏고 티파티에서 거들먹거리지만 않았어도…….”
그러다가 흥미롭게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마주쳐 화들짝 놀랐다. 나는 고개를 푹 숙여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있는 힘껏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죄송해요. 그러니까 공작님은 궁금하지 않으실텐데.”
“아닙니다. 방금, 정말 세실리아다웠습니다.”
“저…다운게 뭔데요?”
“글쎄요.”
그는 미소지었다.
“아마도 레이디가 모르시는 당신을 제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했지만, 어쨌던 내가 지금 필요한 건 완벽한 애인이였다. 나는 그의 말에 공감하는 듯 답례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수많은 책들이 빼곡이 꽂힌 그의 책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시선으로만 그를 쫒다가 결국 걸음을 옮겨 그를 뒤쫒았다.
“그거 네임북인가요?”
네임북은 귀족들의 명부를 말했다. 그가 내게 드디어 애인 후보들을 제시할 생각인가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신남이 올라왔다. 다만 그가 내게 말한 것은 내가 기대한 것과 사뭇 달랐다.
“제가 레이디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제게 남자를 소개시켜달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사교계에서 뽐낼 당신의 트로피 애인정도 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 그 고백은 당연히 거짓말이잖아요.”
“당신에게 명백한 거짓말로 받아들여질 만큼 제 말들이 그렇게 가벼웠습니까?”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그 말과 동시에 그가 책이 탁 소리가 나게끔 덮었다.
“그게 아니면 무엇입니까? 저를 비웃고 싶습니까?”
“아녜요!”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내뱉어서 숨을 골라야 했다. 화를 내러 온 사람은 난데, 가까이서 보니 그의 완벽한 미소에 금이 가 있었다.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저는 제 이름을 거의 불려본 적이 없어요. 최근 몇 년 동안. 전부. 다들 저를 카밀리아의 언니라고 부르던가, 아니면 로징턴의 가시, 첫째 딸이라고들 하죠. 그리고 정말 당연한 거기도 해요. 누가 사교계에서 이름도 모르는 영토에 이름도 모르는 아가씨에게 관심이나 주고 싶겠냐마는. 저는 카밀처럼 예쁘지도 않고, 잘 웃지도 않고.....”
“레이디 로즈.”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러다 또 눈물이 굴러떨어지는 느낌이 볼에서 나서 짜증과 부끄러움이 섞인 채로 고개를 휙 돌렸다.
어떻게 만나자마자 울어재끼는지. 나도 내가 싫었다.
“좋아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소개시켜줄 수 없습니다.”
“.......”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트로피 애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깔아뭉개는 악세사리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
그는 옳았고, 나는 틀렸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가장 추악하고, 틀린 말만 하는 마녀가 된 것만 같았다. 그때 그가 내 턱을 제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카밀이 항상 그랬듯, 내 눈물을 찬찬히 닦아 주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앞으로 천천히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냥 고개만 멍하니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게 그 시발점이 되어주겠지요.”
그게 내 첫 키스였다. 나는 그를, 그의 감정을 따라가는 게 어려웠지만 그는 나를 오랫동안 꼭 끌어당긴 채로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꽤 잘생긴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서 내 의지에 의해 그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았고, 그는 그것을 꽤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
나는 그날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사실 할 게 그것밖에 없었다. 바깥엔 비가 왔고, 나는 애인이 없었고, 공작에게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이상한 방식으로 거절이나 당하고 왔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한숨이 다 나왔다. 카밀이 몇 시간 째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력이 없었다.
공작의 고백에 대해서 묻는다면, 영원한 건 없다고 답하고 싶다. 지금 내가 좋다 어쨌다 말하는 공작도 결국 제 짝 찾아 결혼할 것이었다. 그런 그의 고백에 내가 굳이 마음을 쓸 필요는 없었다.
남자들이란. 같은 인간 개체라는 속성을 공유하다가도 정말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레이디 로즈.”
“카밀한테 지금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고 전해.”
“카밀리아 아가씨가 아닙니다. 손님이 왔습니다.”
“누군데?”
“앨런 릭포드 경입니다.”
그때 침대 옆 서랍위에 올려놓은 그와의 약혼반지가 보였다. 쓰린 가슴을 애써 추스르고 일어났다.
“곧 가겠다고 전해.”
그가 할 말이 무엇이든 나는 들어야 했다. 망신주러 왔다던가, 레이디 마르커스에게 사과하라던가, 그런 말들은 이미 다 들어줄 수 있었다. 이미 충분히 심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