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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밤의 고백-3화 (3/108)

<--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

이때, 말하자면 당분간 공작을 만난 일은 정말 없었다.

당신은 나를 비웃어도 좋다. 그리고 사람을 잘못 본 나를 비웃어도 좋다. 사람을 잘못 보았다 함은 물론 비겁하게 나를 두고 튄 그 약혼남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을 줬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쁜 새끼. 아주 뼛속까지 속물인 모양이었다.

그 파티 이후로 7일이 지났다. 하지만 공작의 청혼이 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멀쩡한 약혼남에게나 뻥 차인 여자가 되었다.

사람이 먹고, 자고, 싸고, 그 사이에 재밌는 게 책과 연애밖에 없다면 여자의 평판을 결정하는 것은 슬프겠지만, 대부분 남자였다. 그러니 약혼남한테 뻥하고 시원하게 차인 내 처지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원래도 내 평판은 바닥이지만, 이제 지하로 떨어졌다. 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다. 술고래 아버지가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오지를 않나, 평생 얼굴이나 볼까 말까 한 공작에게 고백을 받지를 않나. 플러스로 거기다 인생 첫 약혼에다 파혼을 더블로 하니 아주 살맛이 났다.

게다가 내 인생에 바바라 마르커스년(상스러운 언어이지만 바바라는 충분히 그런 말을 들어 마땅하다)을 어떤 신이 뿌려놨는지 원망하다 온 오후를 보냈으니 내 처지도 말 다했다.

“그럼 이제 재미있는 얘기를 해보자구요.”

이곳은 그 ‘역사적인’ 무도회 날에서 7일이 지난 날이었다. 그리고 바바라 마르커스가 티 파티를 연 날이기도 했다.

내 약혼남을 보란 듯이 주워간 년의 티파티에 무슨 볼일이 있겠냐마는, 언젠가 훌륭한 성인들이 ‘네 친구를 가까이 두고, 네 적은 더 가까이 두라’라고 말한 것을 보면 내가 이곳에 없을 이유 또한 없었다.

바바라 마르커스는 백 스물 세 번째로 제 약혼반지를 자랑하고 있었다(그동안 세고 있었다). 은근히 사람 속 긁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래도 뭐, 생각하자면 앨런 릭포드는 잘생긴데다가 똑똑하고, 과묵하지만 정복욕이 도지는 종류의 남자였다. 바바라 마르커스가 세시간동안 고오오급진 티파티를 열어서 왜 입을 닥치지 않는지 알 법도 했다.

“아, 물론 세실리아 로즈 영애는 할 말이 별로 없겠지만요.”

저 망할 계집애.

나도 바바라 마르커스를 만나기 전에 저런 기집애들은 실존하지 않는 유니콘 같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내 말을 믿어 보라. 저런 기집애가 네 일상에 떨어지면 그 순간이 지옥이다.

“저는 정말 유감이에요, 세실리아 양.”

바바라 마르커스가 버터 바른 토스트가 앞면으로 떨어졌다는 사람같이 애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다 세실리아 영애를 위로해줘요. 세실리아 영애의 침울한 표정을 보면 이 티파티의 호스트인 제가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으니깐요.”

“세실리아 영애의 소식을 듣게 되어서 참 유감이었어요.”

“정말 훌륭한 약혼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 전 약혼남, 앨런 릭포드가 거기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본 채로 잠시 굳어있었다(이건 내 상상이 아니라 진짜였다).

그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나머지 영애들에게 고개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는 나를 한번도, 단 한 번도 바라보지 않고 그 갈색 눈동자에 바바라 마르커스를 담았다.

“티파티 중인 줄 몰랐습니다. 제 무례에 용서를.”

“어머, 제가 보고 싶어서 오셨나요?”

바바라는 그대로 눈썹을 조금 내리깔며 부끄럽다는 듯 제 닭털같은 부채를 퍼덕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그의 앞에 가서 섰는데, 그 순간이 영겁이나 되는 듯 길었다.

“단추 풀어졌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의 풀어진 앞섶 단추를 천천히 체우고 까르륵 미소지었다. 그녀는 그 뒤로 모두가 보란 듯이 세상 다정하게 그의 뺨을 쓸더니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앨런 릭포드는 당황한 듯 기침을 연거푸 해댔다. 그를 보니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 바바라 마르커스라면 딱 봐도 딱이었다. 잘도 ‘지금은 안돼요.’ 같은 작업멘트를 그에게 해댔을 것이다. 게다가 앨런이 집돌이인 것을 감안했을 때, 사실 이 어마어마한 극은 모두 바바라가 꾸민 것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앨런은 누가 부르기 전에는 자의로 집을 나서는 사람이 아니고, 전 약혼녀 엿먹이는 취미는 없었으니 이는 확실했다.

앨런 릭포드에게 바바라 마르커스는 얼마나 큰 행운이었을까. 바바라 마르커스의 문란함과 앨런 릭포드의 그 순수함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의 끌림과도 같았을 것이다.

여자 모르는 릭포드에게 그야말로 바바라는 천국이었을 테고, 우리는 모두 한번 불타오르는 인간관계는 지구의 어떤 강한 힘을 동원해도 멈출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빨리 식는다는 것 또한. 알겠지만.

“저런.”

나는 일어섰다.

“저도 일어서야겠네요.”

그 둘의 시선이, 그리고 그 장소에 있는 시선이란 시선은 모두 내게 쏠렸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둘을 지나쳤다. 그리고 바바라에게 싱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바바라 양, 이 약혼이 깨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바바라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영애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미소지었다. 시계태엽처럼 정교한 이 사교의 세계를 돌리는 윤활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가십.

“제가 애인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보아하니 당신 아랫도리에 어제 오늘 마음 다를 남자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사람 같네요.”

“세실리아 로즈 양, 지금 당신…….”

“네.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 다 알고 있죠. 제가 그 유명한 약혼 깨진 로징턴의 가시이고.”

바바라의 몸이 곧 폭발할 활화산처럼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원하는 게 있으면 그 잘난 몸부터 먼저 굴리는 바바라 마르커스라는걸.”

*

아.

X됐다.

나는 최대한 있는 힘껏 배게를 주먹으로 때렸다. 망할, 망할 세실리아 로즈! 어쩌자고! 나는 베개에 여러 번 머리를 처박고 실성한 듯 침대를 때렸다. 그리고 그것마저 질리자 이불을 뻥뻥 차기 시작했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이건 뒷수습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 말대로 진짜, X됐다.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실 것이었다.

“아……. 나 이제 어떡해. 망할, 망할!”

그리고 망할이 맞았다. 도대체 무슨 감정에서였을까?

남자에 대한 마음은 약혼이 깨진 날 밤 꺼진지가 오래였다. 그리고 바바라 마르커스가 매일 내 가문이나 근본 가지고 빈정거리는 건 일상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그냥 참지 못했단 말인가. 매일 상상으로만 바바라를 이겨왔지만 실제로 한 방 날린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갑자기 어딘가 살았거나 죽었을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니면 나는 성인이라기에는 덕이 부족했을 지도 몰랐다. 아니면 참을성이 보통보다 못한다던가.

하여튼 이미 깨진 인간관계가지고 동정하듯 조롱하는 게 제일 나쁘다. 내가 비참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 보듯 사람들이 동정하는 게 더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돌려줬을 뿐이다. 바바라 마르커스에게. 그런데 그러면서도 일말의 미안한 감정은 있어서 마음에 멍이 든 것 같이 아팠다. 내가 그 불쌍한 여자한테 그렇게 말해도 됐나.

에휴. 내가 누굴 걱정한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내 꼴을 보자면,

파혼당했고.

로징턴의 가시라는 명성 때문에 남자들은 나를 싫어하고.

애인도 없으면서.

바바라 마르커스에게 애인이 있다고 잘도 허풍을 쳤겠다.

이쯤 생각이 미치자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우러나왔다. 젠장할.

오늘 바바라 마르커스에게 한 말로도 사교계에서 자살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이제 플러스로 애인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이건 그냥 망신이 아니라 트리플 망신이었다.

집안의 망신이었고, 근본은 없지만 그래도 존재하는 가문의 망신이었다. 그리고 그런 집안의 여자와 결혼할 남자는 없었다. 사교계는 명성으로 살고 명성으로 죽었다.

나야 뭐 고양이들에게 파묻혀서 캣 레이디로 죽어도 상관없지만 문제는 카밀이었다. 카밀까지 캣 레이디로 죽게 할 수도 없었고, 뭐라도 해보겠다가 결국엔 내 무덤 판 격이 되었다.

방법이 있어야 했다. 방법이…….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가까스로 추스른 뒤 목청을 골랐다.

“들어와.”

카밀이었다. 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을 머금은 카밀의 금발이라던가, 어둠 속에서도 총명하게 반짝이는 저 벽안이라던가. 나는 카밀을 보자마자, 그리고 내가 카밀의 혼사를 막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언니…….”

“……카밀.”

“왜 울어?”

카밀이 걸음을 옮겨서 침대에 사뿐히 앉았다. 카밀이 나보다 백배는 더 레이디일 것이다.

“언니가 큰, 정말 크나큰 실수를 했어.”

카밀은 언제나 그랬듯, 호기심어린 그리고 총명한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내 눈물을 닦아주며 그 반짝이는 벽안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게 뭔데?”

“좀 길어.”

“괜찮아. 우리가 가진 게 시간뿐이니까.”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

난 항상 마차로 이동하는 게 싫었다. 낡은 마차가 삐거덕거리는 걸 듣고 있자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생이 끝나는 건 아닌가 생과 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보아하건데, 마차에서 요절하는 것도 내 나쁜 최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카밀을 생각해냈다. 오, 카밀. 나는 카밀을 위해서라도, 오늘 이 일을 꼭 해야 했다.

나는 턱 밑에 늘어진 모자 리본을 다시 꼭 매고, 긴장으로 땀이 찬 손을 치맛단에 닦았다. 카밀의 목소리가 불처럼 생생했다.

‘그럼 언니 약혼이 깨진 게, 언니 기억이 정확하다면. 로드 화이트가 발코니에서 언니한테 갑작스럽게 고백을 한 것 때문이었네.’

‘그렇지.’

‘그럼 걱정할 것도 없네.’

‘왜?’

‘공작께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니까.’

그때 마차가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 멀미가 나려는 걸 애써 참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마차가 멈춘다는 것은 정말로 내게 좋은 소식이었다.

커튼을 손으로 조금 밀어내자 금빛의 태양이 틈 사이로 넘어 들어왔다. 나는 조금이 지나서야 겨우 눈을 찌푸리며 바깥을 내다볼 수 있었다.

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 광활한 성과, 하늘과, 그리고 그 광경들을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그를 만나기도 전에 웨스트 체셔의 성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그때 문이 열렸다. 나는 조용히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중후한 멋의 노신사였다. 입은 하얀 옷을 보니 분명 웨스트 체셔의 집사장 쯤 되는 사람이겠고.

그가 내게 정중하게 손을 뻗었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흰 면장갑 낀 손에 내 것을 올려놓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로징턴의 레이디를 뵙습니다. 저는 집사장 랄프 파커입니다.”

내가 고개를 숙여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공작 전하께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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