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겨울밤의 고백-1화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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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어느 겨울.

한 발코니서부터 시작되었다.

000.

로징턴에는 가시가 있었다

Once upon a time…….

로징턴. 기온은 온후한 편이며, 봄에는 가장 아름다운 새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곳에 대해 칭찬을 한다면, 숲이 예쁘다. 쭉 펼쳐진 농지가 정겹다. 푸근한 비료 냄새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나쁘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율러의 수도 변두리에 있는 코딱지만한 작은 땅덩어리다. 존재감이 없다. 땅이기는 커녕 황무지가 대부분이다.

로징턴은 율러 깡촌 중에서도 깡촌. 사실 왕이 이곳을 아버지에게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은 로징턴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거다. 어느 돌 많은 이름 모를 땅덩어리.

내가 그 곳의 레이디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아니, 사실 4년 전만 했어도 내 이름 앞에 '레이디' 라는 수식어가 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 여기서 우리 아버지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나보다 역사책이 더 잘 상술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기사는 아니었고,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전장에 끌려갔던 용병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왕의 목숨을 구하고 죽음으로서 전쟁용사가 된 드라마틱한 인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말이 좋아 전쟁용사지, 원래는 고기방패였다. 릭슨 경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얼떨결에 왕 대신 죽었다고 한다. 유감이다.

어쨌던, 왕은 제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죽은 아버지에게 작은 땅덩어리와, 자작이라는 지위, 그리고 두 딸들이 일생동안 편안히 살 만한 작은 성을 하나 주었다.

그 두 딸 중 더 나이가 많은 쪽이 나, 세실리아 로즈이고, 더 나이가 적은 쪽이 카밀리아 로즈이다.

그리고 이 작은 땅덩어리의 이름은, 아버지의 성을 따 ‘로징턴’ 이라고 불리었다. 그렇다. 그 수도 변두리에 있는 쓸모 없는 땅덩어리.

“세실, 제발. 나랑 같이 가자, 언니는 헴셔 궁의 샹들리에가 얼마나 예쁜지 모를거야. 어찌나 모든 게 다 빛나고, 반짝거리고, 화려한지! 마치 깨어있는 동안에 꿈을 꾸는 것만 같았어!”

저 쪽은 내 동생 카밀리아 로즈이다. 카밀리아의 눈이 꿈을 머금고 반짝일 때, 어느 기사가 주워준 듯 한 손수건을 들고 방을 한 바퀴 빙 돌 때는 정말 세상이 저 아이를 축복하고 있구나를 뼈에 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저 곱슬곱슬한 금발과, 별을 머금은 듯한 벽안을 보라. 카밀은 정말 은하수를 빚어 만든 것만 같이 정말 타고난 미녀이다.

세상에, 내가 저 애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를 당신은 모를 것이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일찍이 집을 나갔고. 그랬을 때에 남은 것은 자매뿐이라. 내게 저 어리고 순수한 카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배이다. 그래서 지켜야 할 것이기도 하고.

“그래. 그래도 춤은 안 출거야.”

“언니, 어떻게 무도회에 가서 춤을 안 출 수가 있겠어? 무려 햄셔 궁의 무도회인데! 나는 언니가 춤을 추는 걸 보고 싶어. 정말 멋진 남자와 같이 말이야!”

모든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요즘 들어 파티장마다 나를, 아니 정확히는 우리를 따라다니는 말이다.

내 동생 카밀이 장미 쪽이라면, 내가 그 ‘가시’ 이다. 카밀에게 승냥이 떼처럼 달려드는 근본없는 남자들을 쳐내느라고, 내 별명은 로징턴의 가시가 되었다.

당신은 내가 그 별명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 유명한 명성 덕에 동생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모두 내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아, 물론 한명 빼고.

제롬 화이트 공작. 저 파티장 정 중앙에서-그는 사교계의 중심이라고 해도 충분하다-그를 닮은 잘난 와인을 들고, 가식으로 빚은 것만 같은 신사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망할 치다.

대단한 인간이긴 하다. 공작의 차남으로 태어나서, 학자가 되겠다고 제도를 부랴부랴 떠난 장남을 밀어내고 웨스트 체셔의 새 주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웨스트 체셔의 실권자, 정확히 말하자면 ‘전’ 실권자 레이디 화이트도 그에게는 강경하게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방금 난간에서 그를 쳐다보던 중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웩.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잔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어보인다. 아, 재수 없어. 방금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당신은 상상할 수가 없겠지.

소매가 긴 드레스를 입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소름이 오소소 돋은 내 팔을 가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못생겼냐고? 아니다. 그는 못생김의 정 반대에 있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제도에서 왕자를 포함해서 가장 잘생긴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제롬 화이트를 고를 것이다.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듯 말이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는 카밀이 그런 것처럼 정석적인 미인에 가까운 인사이다. 햇빛이 내린 것 같은 트루 블론드에, 사파이어를 박아놓은 것만 같은 벽안, 완벽한 코, 미소까지 정말 드라마틱하다.

어쨌던 내 취향은 아니다. 나는 저렇게 날티 나는 남자는 수레마차 가득히 가져다 준대도 사양이다. 내 취향은 저기 구석에 앨런 경처럼 학자 스타일의 남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중요한 건. 저 망할 치-공작 각하-가 내 동생을 노리고 있다는 거였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저런 남자들이 여자에게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손을 뻗는다면 목적은 단 하나 아니겠는가.

나는 카밀이 우는 걸 보기보다 차라리 죽겠다. 내가 로징턴의 왕가시가 된다고 해도, 어쨌던 저 치한테 내 카밀이 놀아나는걸 두 눈 뜨고 볼 수는 없었다.

“세실리아 로즈.”

다이애나가 내 옆으로 와 팔짱을 꼈다. 친해진 지 세 달밖에 안됐지만, 나와 다이애나는 소울메이트처럼 죽이 착착 맞았다.

“저 거들먹거리는 미소 좀 봐.”

제롬 화이트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100% 퓨어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는 것부터 마시는 것, 숨 쉬는 것이 다 싫었다.

그는 파티에 온 뒤로 아무와도 춤추지 않았고, 오직 제 사업가 동료나 권세가들과 말을 나누는 게 전부였지만 그래도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내 상념에 다이애나가 끼어들었다.

“오늘도 카밀리아 때문에 바쁘구나.”

“그렇지. 항상.”

그러다 나는 또 제롬 화이트와 눈이 마주쳐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야, 진짜 잘생기긴 했……. 이 아니라. 나는 눈을 굴려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 내 눈치 보는 것 좀 봐봐.”

“음.”

“그리고 친한 척 하는 것도 같잖아.”

“어떻게 친한척하는데?”

“몰라.”

그가 친한 척이라도 하려는 듯, 미소와 함께 내게 말을 걸으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도 화제는 카밀, 내 동생에 대한 것이었을 거다. 뻔하지, 뭐.

나는 갑자기 또 기분이 더러워져서 잔에 들어 있는 와인을 모두 다 마셔버렸다. 상당히 도수가 쎈 와인이었는지 머리가 핑 돌고, 목구멍에서는 불이 날 듯 화끈했다. 갑자기 기분이 확 좋아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 발코니 좀.”

“쪽쪽거리는 커플들 조심해.”

“고마워.”

나는 고개를 돌려 가장 가까운 발코니를 찾았다. 창 밖 하늘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푸른 실크 비단이었고, 별들은 비단 위 다이아라도 되는 듯 콕콕 박혀있었다.

예쁘다. 나는 하늘을 향해 손을 쭉 뻗어보였다. 내 하얗고 마른 손이 하늘을 움켜쥘 듯 허공에서 하늘거렸다. 팔찌가 짤랑거리는 기분이 좋아 나는 손을 더 빠르게 흔들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듯한.

“로즈 양.”

“로드 릭포드.”

그였다. 앨런 릭포드, 내가 아까 취향이라고 얘기했던 학자 스타일의 남작 영식이었다. 그는 제롬 화이트 공작이 무엇이던 간에 그와는 정 반대인 사람이었다. 가난한 남작 가문의 삼남이었고, 검소하고, 신중했으며, 현재 내가 약혼한 사람이었다.

나는 하늘에다 손을 휘저었던 기억을 상기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어보였다. 내 옆으로 와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훌륭한 광경이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별들도 너무 예쁘고...”

그 다음에는 그냥 대화였다. 날씨가 어떻고, 하루는 어땠고, 건강은 어떻고. 평범한 약혼남과 약혼녀가 할 법한 대화였다. 나는 그를 조금 짝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는 내내 사무적이었다. 그리고 가끔 웃었다. 나는 속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는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상속받을 성과 땅이 필요해 약혼했고. 나는 야망없는 소시민적인 남편을 원했으니까 약혼했다.

왜 굳이 소시민이냐 물으면, 남편이 쓸데없이 열정적이어서 가산을 탕진하거나, 군대를 데리고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무도회장에 있는 남자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물론 나에게 말이다. 술 안해, 시가 안 펴, 여자에 관심 없고, 지성을 동경하며, 그러면서도 검소하고 소박한.

“와인을 가져오겠습니다.”

대화가 끊기자 그가 발코니를 떠났다. 나는 아까부터 쭉 마셔댔기에 몽롱해서, 더 발코니에 있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카밀도 곧 결혼해야 할 텐데 어쩌지…….

나는 앨런이 두 번째로 가져다 준 와인을 발코니 밑으로 흘려보냈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카밀, 재수없는 제롬 화이트, 빙글거리는 천장.

그때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앨런.”

고개를 돌리자 발코니에는 앨런 대신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내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제롬 화이트. 새 공작 되시는 분이자, 현재 내 동생을 노리는 가장 유력한 후보 넘버 원이었다. 그는 제 신사모를 벗어 제 가슴에 가져다 대고 내게 인사했다.

그때 바람이 불고 그의 앞머리가 부드럽게 휘날렸다. 세상에. 그의 외모는 맹세코 신의 가호를 받은 것만 같다.

“레이디 로즈.”

“로드 화이트.”

나는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제롬 화이트는 내게 내 동생 카밀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었고, 나는 반격할 힘이 지금은 없었기 때문이다.

술에 흐믈흐믈해진 로징턴의 가시라니. 나는 그 상태로 피식 웃었다. 술기운이었는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나를 가만 바라보고 있던 제롬 화이트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젠장.

“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하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는 계속하라는 듯 나를 가만 바라보았다. 내가 바보 천치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여튼 죄송합니다.”

치맛단을 잡고 건성으로 예의를 차린 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발코니를 거의 다 지나가려 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혼하셨다 들었습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내게 꽂혔다. 그때 기분이 팍 상하기 시작했다. 둘째인 카밀이 결혼하려면 첫째인 내가 먼저 결혼을 해야 했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 약혼 여부를 묻는 저 치의 머릿속에는 카밀을 손에 넣을 생각만으로 가득할 것이었다.

갑자기 머리로 열이 확 올라왔다. 내 동생은 내가 지킨다.

“그렇습니다만, 전하께서 궁금해 하실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 이래야 로징턴의 가시답지. 속에서는 근본모를 자신감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보자 그의 벽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나는 차분한 걸음과 꼿꼿한 허리로 그에게 천천히 걸어가며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하와 저는 구면이지요? 자주 뵌 적이 있었고, 그리고 전하께서도 제 주위에 계신 적이 많았으니까요. 아마도 저와 이야기할 일이 있어서였겠죠. 말을 꺼내시지 않으셔서 언제 이 얘기를 하실지 줄곧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웃긴 뭘 웃어. 나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교계에서 사람들이 제 등 뒤에다 대고 하는 말들은 다 알고 계시시라 믿습니다. 로징턴의 가시라고들 하죠. 그리고 전하께서 제 동생을 좋아하신다고 해도…….”

“예?”

“카밀리아 로즈는 전하와 교제하지 못할겁니다. 제가 그렇게 할 거고요.”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나와 그의 거리가 가깝다는 걸 느꼈다. 그는 한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더니 다시 그 특유의 선샤인-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웃었다.

하여튼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내가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쯤 그가 내 팔을 가볍게 쥐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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