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77화 (외전2) (278/279)

외전 - 2.

눈이 소담스럽게 내린 어느 겨울날, 충남 모처의 한 단독주택.

딱 적당하다고 할만 큼의 온기와 은은한 향이 감도는 가운데 집의 거실에 세 사람이 모여앉아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나 요즘 이 잭살차에 푹 빠져 버렸어. 너무 좋더라고.”

“하하. 좋아하시니 다행이네요.”

“마실 때마다 줄어드는 차를 보면 아쉬워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니까?”

“어휴, 장모님도. 그러지 마시고 편하게 드세요. 또 구해 드리겠습니다.”

“이거 잭살차 중에서도 상품이라 귀한 거라며? 비쌀 텐데, 괜한 데 돈 쓰지 말게.”

“괜한 데라뇨? 다른 누구도 아닌 장모님이 드시는 건데요.”

웃으며 답하는 도훈과 그 옆에서 흐뭇한 표정을 지은 세경.

두 사람은 함께 세경의 친정을 찾았다.

곧 설 연휴이지만, 명절 때 본가에도 가기 힘든 도훈인지라 미리 인사도 드릴 겸 하루 묵어가기로 한 터.

“엄마. 아무리 좋은 차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좋을 수도 있다는 거 알죠?”

“당연하지. 그래서 하루에 딱 두 번만 마신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요새는 그 차 마실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해. 호호.”

“엄마도 참.”

도훈의 장모는 차를 무척 좋아했다.

커피는 향과 맛이 너무 강하다며 입에 일절 대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도훈은 장모에게 귀하거나 좋은 차를 구해 선물하곤 했는데, 오늘 마시고 있는 이 잭살차도 도훈이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린 것이었다.

“아, 참. 자네, 작년 말에 상 두 개나 받았다며?”

“아, 제가 받은 게 아니고 저희 시가 받은 겁니다, 장모님.”

“그게 그거 아닌가. 재작년에도 받고 작년에도 받은 거 맞지?”

“맞습니다. 분야는 다르지만요.”

“호호. 축하하네.”

“하하, 감사합니다.”

재작년 말 대흥시는 복지행정 분야 우수상을, 작년 말에는 민원행정 평가 우수상과 함께 자치행정평가 대상을 받았다.

복지행정, 민원행정 우수상은 보건복지부와 행정자치부에서 사업 평가와 함께 수여하는 것이었고, 자치행정평가 대상은 권위 있는 행정 관련 학술, 시민단체들이 연합해 심사 수여하는 것이었다.

복지, 민원 우수상은 상과 함께 각각 1천만 원 이상의 상금도 나왔다.

하지만, 도훈이 좀 더 의미 있게 생각한 상은 상장과 상패 하나가 전부인 자치행정평가 대상으로, 관(官)이 아닌 학계와 시민들이 대흥시의 시민참여 확대를 위한 노력을 인정해주었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첫 임기 때는 이런저런 행정 과정의 변화와 혁신, 효율화 등으로 정작 시민들은 체감해도 성과가 수치로 쌓이지 않았는데, 그 결과가 재선된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할 터였다.

“사돈어른은 건강하시지?”

“네. 아버님이야 워낙 건강 체질이시니까요. 눈이 오고 비가 와도 운동은 꼬박꼬박 하시기도 하고요.”

“에고. 나도 좀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하하.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잖습니까. 의사가 장모님께 과한 운동은 안 좋다고 했다면서요. 지금처럼 가볍게 산책 꾸준히 하시고, 좋아하는 차 드시고 책 보시면서 마음 안정 유지하는 것도 좋은 건강 유지법입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띵동.

“어라? 집에 올 사람 있어요, 엄마?”

세경이 몸을 일으켜 인터폰을 확인하러 가며 묻자, 장모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답했다.

“아, 내가 깜빡했네. 나이 드니까 건망증이 생겼나 봐.”

“누가 오기로 했습니까?”

도훈이 묻자 장모가 답했다.

“응. 정문이네 부부가 인사하러 올 수도 있다고 했었어. 거기도 설에 어디 가기 어려운 형편이잖아.”

“... 아, 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히 답했지만, 그건 도훈이 얼굴이 절로 구겨지는 걸 애써 참은 결과였다.

역시 도지사 재선에 성공한 강정문은 현역 충남도지사였고, 도훈과는 여전히 공사에 걸쳐 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근 그에게서 뭔가 꿍꿍이가 느껴져 경계하고 있는 참이었는데, 세경의 친정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도훈이었다.

잠시 뒤.

“저희 왔습니다, 이모님!”

“어서 와.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뭐 나한테까지 인사하러 와.”

“하하! 하나뿐인 이모님을 안 챙기면 누굴 챙깁니까? 집이 그리 멀지도 않은 걸요. 어? 이게 누구야?”

세경의 어머니와 인사한 강정문은 도훈을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지···.”

“이야, 김 서방!”

“......”

“여기서 다 보네? 반가워, 이 사람아.”

“......”

‘지사님’이라고 하려다 ‘김 서방’이라는 호칭에 말문이 막힌 도훈.

그런 도훈을 향해 ‘때는 이때다’라는 듯한 표정을 한 강정문이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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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단독주택 앞마당의 바비큐 그릴 앞.

“역시 이모님 댁은 이게 좋다니까. 우리 집은 마당이 없어서 이게 안 되는데 말이야.”

“......”

치이익!

“으음. 역시 고기는 한우야. 안 그런가, 김 서방?”

“... 글쎄요.”

고기를 뒤집으며 심드렁한 태도로 답하는 도훈.

강정문은 그런 도훈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투를 바꿔 말을 이었다.

“나한테 김 서방 소리 듣기가 그렇게 싫어요?”

“... 싫다기보다는 적응이 안 되네요.”

“하하. 적응이 안 되기는요. 결혼하고 2년이 넘었는데요. 그동안 내가 여러 번 시도했었잖아요. 성공한 건 오늘 겨우 한 번이긴 하지만. 되게 싫은 모양이에요. 그렇게까지 인상 팍 쓰고 있는 걸 보면.”

“인상 안 쓰고 있습니다.”

“에이, 아닌데요.”

“... 제대로 인상 한번 써볼까요?”

“하하, 됐어요. 김 서방이라고 안 할 테니까 인상 쓰지 마요.”

너털거리며 웃는 강정문을 바라보며 도훈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 안에서 실컷 불러놓고는···.’

도훈이 시장에 재선된 지 벌써 2년 가까이 지났다.

그간 강정문이 사석에서 ‘김 서방’이라는 호칭을 쓰려고 시도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도훈이 호응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무산됐다.

오늘처럼 강정문의 부인과 세경의 어머니까지 함께 있는 ‘빼도 박도 못할’ 자리는 처음이어서, 조금 전까지 도훈은 말끝마다 ‘김 서방’을 반복하는 강정문에게 그저 ‘예’, ‘예’ 하고 답해야 했었다.

“요즘 대흥시는 어때요?”

“어떻긴요. 다른 곳이나 똑같죠.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진즉부터 들썩거리는 건 전국이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죠.”

올해는 2024년.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4월에 예정되어 있었다.

중앙정부와 대다수 지방정부를 여당인 민의당과 민주, 진보진영이 주도하는 가운데 치러지는 총선.

지난 몇 년간 선거에서 단 한 번도 ‘승리’를 경험하지 못한 보수 정치권은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보수의 승리 가능성을 낮게 점치는 상황이기도 했다.

“시장 임기도 벌써 반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 다른 계획 안 세웠어요?”

“네. 안 세웠습니다.”

“에이, 김 시장은 안 세웠어도 내부적으로 말은 나왔을 것 같은데요.”

“......”

물끄러미 강정문을 바라보는 도훈.

강정문이 도훈의 ‘다음’ 계획에 관해 묻기 시작한 게 반년이 넘었다.

8개월 전, 첫 질문은 질문보다는 ‘권유’에 가까웠다.

- 김 시장, 시장 다음에 어떤 일을 할지 계획 같은 것 구상 안 합니까? 혹시 국회의원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지역구 국회의원인 김용진 의원이 지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전국적으로도 인지도를 쌓으며 잘 활동하고 있는데 이게 뭔 엉뚱한 소린가 싶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없다’고 간단히 답했더니 강정문은 두어 번 더 국회의원을 언급하며 ‘진지하게’ 고민해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작년 9월, 김용진 의원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기용되었다.

다음 총선을 1년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의 장관 기용은 곧 총선 불출마를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장관 기용은 지역 정치권에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김용진의 불출마가 여야를 불문하고 국회의원을 꿈꾸고 있던 이들의 가슴에 불을 확 질렀다고나 할까.

‘... 안 의원도 그중 한사람이고 말이지.’

안준식이 당내 경선 출마를 저울질하며 열심히 뛰고 있는 걸 잘 아는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강정문이 재촉했다.

“아, 내부적으로 논의가 있었어요, 없었어요?”

“... 논의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이 있긴 했지만요.”

“누구요, 조 비서실장이요?”

“네.”

“그래서 김 시장은 뭐라고 했는데요?”

“... 할 일이 적어서 잡생각이 드는가 본데 일거리 좀 더 만들어 줄까요 하고 답했죠.”

“... 진짜요?”

“네.”

“... 하하.”

김용진이 장관이 된 직후, 영배가 국회의원 도전은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고, 도훈은 조금 전 강정문에게 답한 그대로 말해 영배를 침묵시켰다.

그 뒤로도 팬카페나 후원회에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기도 한 모양인데, 영배와의 얘기가 알려진 뒤 최소한 도훈에게 공개적으로 제안하거나 권유한 사람은 없었다.

“국회의원 얘기는 그만하시죠. 생각도 없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늦었습니다.”

“누가 총선 얘기한대요? 김 시장이 미래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뿐입니다.”

“전부터 자꾸 미래, 미래 하시는데, 시장 한 번 더 해도 되는데요, 저.”

심드렁한 도훈의 태도에 강정문이 그 무슨 생각 없는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기엔 많이 아깝잖아요.”

“... 뭐가 아깝다는 말씀입니까?”

“뭐긴 뭡니까? 김 시장이 아깝다는 거지.”

“......”

“성과도 견실하게 내고 있고, 국민적 인지도도 많이 올라갔는데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할 생각을 해야죠.”

이런저런 행정 모범 사례, 혹은 시정의 성과 등으로 상도 받았지만, 도훈의 국민적 인지도가 확 올라가게 된 주요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작년 여름, ITS 시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출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가, 도연이가 찾아와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는 바람에 끝내 승낙했다.

아무리 도연이라도 부탁만 했다면 끝까지 거절했을 텐데, 그 프로그램 조연출이 자기랑 호감을 갖고 친분을 쌓아가는 사람이란 얘기에 도훈의 눈이 확 뒤집혔었다.

‘어떤 놈인지 가까이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2주를 찰떡같이 붙어 촬영하면서 지켜본 결과, 도훈은 ‘그만하면 괜찮다’는 결론을, 영배와 다른 비서실 직원들은 ‘괜찮은 게 아니라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놈이랑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설마 아직도 ‘썸’만 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시장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특별할 것 하나도 없는 기획 하에 촬영이 시작됐는데 하필 장마와 태풍이 연달아 몰아치는 때와 맞물렸다.

연속된 비상상황 속에서 피해를 줄이거나 인명 구호를 위해 뛰는 시청 공무원, 소방관, 경찰관의 모습과 그들을 사무실과 현장에서 통솔하고 지원하는 도훈이 두 번에 걸쳐 실감 나게 방송됐다.

본방도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후 온라인에 공개된 영상도 조회수가 대단히 많아, 방송 이후 한참이나 도훈의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었다.

“... 왜 그렇게 봐요?”

도훈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강정문이 물었다.

“얼마 전부터 자꾸 저를 충동질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어감 나쁘게 충동질이 뭡니까? 그냥 충고라고 해요.”

“어감이야 어쨌든, 충고보다는 충동질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만···.”

“... 하하.”

도훈의 차분하고도 서늘한 눈빛에 강정문이 찔끔했다.

저런 눈빛을 한 도훈은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에게도 만만찮은 상대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으니까.

“뭘 노리시는 겁니까?”

“노리긴 뭘 노려요? 그냥 김 시장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한 소리예요.”

“... 지사님 걱정이 아니더라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더 잘하라는 거죠. 더 잘되라는 거고.”

“흐음.”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도훈의 모습에 강정문이 긴장하던 순간.

“김 서방, 김 서방!”

“예, 장모님!”

도훈의 장모가 문을 열고 불러 도훈이 얼른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강정문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경이가 매스껍고 어지럽다고 하는데, 혹시 아침에 뭐 잘못 먹은 것 아닌가?”

“그래요? 아침 때문은 아닐 겁니다, 장모님. 속이 불편하다고 해서 죽 조금 먹은 것밖에 없거든요.”

“죽?”

“네. 어제저녁에 대흥 집에 왔을 때도 컨디션이 안 좋다고 맑은 콩나물국에 밥 조금 말아 먹은 게 전부였습니다. 내내 잠을 자며 쉬었는데요.”

“그래? 흐음. 이거 혹시?”

“... 혹시라뇨?”

밝은 표정이 된 장모에 반해 도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모습인데, 갑자기 등 뒤에서 강정문이 얼굴을 쑥 내밀었다.

“쯧쯧. 김 서방, 자네도 이런 쪽으로는 영 바보로구먼.”

“... 예?”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도훈을 외면한 채 강정문은 도훈의 장모에게 말했다.

“그런 게 있다네. 이모님 이거 축하드려야겠네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세경이랑 얘기해볼 테니까 얼른 고기 구워서 갖고 들어와.”

“네.”

강정문이 뒤돌아 그릴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도훈은 장모에게 물었다.

“... 축하라니, 저게 무슨 소립니까?”

“호호. 임신한 게 아니냐는 얘기지.”

“... 이, 임신요?”

“그래. 임신. 입덧이 올 때 저렇거든.”

“......”

뜻밖의 얘기에 일순 멍해진 도훈.

그는 속으로 ‘임신’을 두어 번 되뇐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 어, 어? 와, 와!”

“쉿! 아직 확실한 거 아니니까 자넨 모른 척 잠자코 있게.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도훈을 다독인 장모가 문을 닫고 들어간 뒤에도 도훈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이, 임신이라니. 하하, 하하하.”

작게 소리 내어 웃는 도훈은 좋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

치이이익!

그릴에 새 고기를 올리며 그런 도훈을 흘끔 한 강정문이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 휴우, 이거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뭐,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 천천히 다시 작업해야겠군. 그나저나 저 친구를 어떻게 도지사 선거에 내보내지? 품성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다음 도지사로 저 친구만 한 사람이 없는데···.’

전혀 다른 생각 중인 두 사람의 시선이 일순 교차했고, 둘은 진의는 완전히 다르나 거죽은 비슷한 미소를 교환했다.

‘... 내가 아빠가···.’

‘... 너를 기필코···.’

그렇게 어느 훈훈한 겨울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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