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 1.
선거일까지 딱 59일이 남은 날 아침.
시청을 향하는 도훈의 차 안에서 두진이 입을 열었다.
“... 민의당의 외부인 공천은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뭐, 민의당이 시장 후보 내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난 왠지 불안했었거든. 뭐가 됐든, 세상일은 장담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두진의 말에 영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하긴, 엊그젠가요? 김용진 의원이 낮에 대흥시 지역위원회에 들렀는데, 장민호 의원이 쫓아가 왜 시장 후보 안 내냐고 항의했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래? 진짜로?”
“저도 전해 들은 것일 뿐이라서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 양반은 여전히 눈치가 없군.”
“눈치가 없는 게 아니고 김 시장이 재선 안 되는 게 자기에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자기 재선되려고 신경 쓰랴, 김 시장 재선 안 되게 신경 쓰랴···. 참 바쁘게 살아요.”
“허허허.”
운전하는 도훈은 두진과 영배의 대화를 그냥 듣고만 있었다.
장민호가 김용진을 만나서 후보를 왜 안 내냐는 얘기를 한 건 사실이었다.
다만, 항의가 아니라 의견전달 혹은 주눅 든 의견 표명에 가까웠다는 게 좀 달랐다.
장민호와 직접 대화한 김용진에게 들은 이야기였으니 이쪽이 더 정확할 터.
- 장 의원, 좀 불안정해 보이더군요. 좌충우돌이랄까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무리도 아니죠. 그 선거구의 우리 당 예비후보들에게 밀린다는 걸 본인도 모르지 않을 테니까 말이죠.
대흥시는 두 선거구에서 세 명씩 시의원을 뽑고 비례로 다시 한 명의 시의원을 뽑는다.
그래서 민의당, 대자당과 같은 큰 정당은 한 선거구에 세 명의 후보를 추천하는데, 여당인 민의당 후보라면 1-가, 1-나, 1-다 의 순서가 된다.
그리고 민의당의 경우, 공천 여부와 ‘가-나-다’ 기호가 민의당 권리 당원이 참여하는 후보 경선을 통해 결정된다.
즉, 경선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은 세 명이 순서대로 ‘가-나-다’의 기호를 부여받고 선거에 공천되는 것이다.
대부분 유권자는 정당을 고르고 그 정당의 추천순서대로 투표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어느 당이든 ‘가’ 후보의 당선율이 ‘나’, ‘다’ 후보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난 선거 때는 운계면-금선면 선거구에서 셋 다 민의당이 당선됐지?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글쎄요. 아마 어려울 걸요? 요즘 민심은 차치하고서라도 서태기 의원이 똥물을 거하게 뿌린 선거구 아닙니까.”
“지금 그 선거구 민의당 예비후보가 둘이지? 그 두 사람과 심남진, 장민호 의원이 경쟁하는 거지?”
“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선거 때는 장민호의 선거구에서 서태기, 심남진, 장민호 셋이 당선되기는 했지만, 이번은 그때와 분명 다르다.
‘가’ 후보가 안정권이라 치면, ‘나’ 후보의 당선이 불가능하지도 않겠으나 쉽지도 않을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장민호는 ‘가’를 얻기는커녕 ‘다’도 낙관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칫하면 공천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
장민호가 재선에 눈이 멀어 시정을 외면한다는 비판을 피하고자 시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았지만, 의원 일보다 은밀한 선거운동에 열을 올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른 의원들은 어떻다던가?”
“심남진 의장님은 좀 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후반기 의장으로 의회를 문제없이 관리했다는 평이 대부분이랍니다. 물론, 그 전에도 튀지는 않아도 순탄한 의정활동은 인정을 받았던 분이고요. 유서면-남가동 선거구도 비슷합니다. 안준식 의원이야 워낙 평이 좋다는 건 실장님도 잘 아실 테고, 진평당 신길영 의원도 거의 엇비슷하죠. 차혜진 의원은 공천부터 쉽지 않다는 얘기가 많다는데, 대자당 소속으로는 유일한 현역이니 또 모르죠.”
“뭐, 공천 못 받아도 할 말은 없겠지. 자신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모르지 않을 테니까.”
“네.”
그렇게 의원들이 재선을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비례대표인 송지은 의원의 경우가 좀 의외였다.
원래는 유서면-남가동 선거구에 공천을 받아 출마할 계획으로 열심히 활동했었는데, 불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아주 최근에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데, 내용을 밝히지 않은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들었다.
민의당 지역위원회 내부에서는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는데, 우연히 식당 앞에서 마주치고 직접 그 소식을 도훈에게 전할 때 그녀는 이미 마음의 정리를 끝낸 듯 아주 담담한 모습이었다.
위이이잉.
저 멀리 시청 청사가 보이는 위치에서 신호에 걸려 기다리고 있는데, 도훈의 개인용 핸드폰이 울렸다.
도훈은 발신자를 확인하고 스피커폰 모드로 전화를 받았다.
“네, 도지사님.”
- 굿모닝 입니다. 출근했어요?
“저 앞에 시청이 보입니다.”
- 아, 그럼 운전 중이겠네요?
“네. 지금 스피커폰 모드로 통화 중입니다.”
- 그럼 송 실장님이랑 조 비서관도 듣고 있겠군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도지사님.”
“안녕하십니까.”
조수석의 영배와 뒷좌석의 두진이 인사했고, 도훈이 말을 이었다.
“이른 시간인데 어떤 일로 전화하셨을까요?”
- 하여간 뻣뻣하다니까.
“... 크흠.”
- 뭐, 일이 있어서 전화한 게 맞으니까 이쯤 하죠. 전에 내가 말해줬던 제안 있잖아요.
“선거연대 말씀하시는 겁니까?”
- 네. 그거 공식적으로 추진될 것 같습니다. 내일모레 안으로 연대 대상인 당의 원내 대표들이 만나 첫 논의를 하고 기자회견도 할 거라고 들었어요.
“... 그렇군요.”
- 그러니까, 김 시장도 미리 마음의 결정을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 혹시 결정했습니까?
“... 제가 결정한다고 그대로 되는 거 아닙니다. 저희 선본에서도 논의를 해 봐야죠.”
- 그렇긴 해도, 김 시장 개인의 판단도 중요하질 않습니까. 결정했어요, 안 했어요?
“뭐, 제 나름의 결정은 했죠.”
- 어? 진짭니까?
“네.”
- 그럼 어떤 쪽으로요? 가부 중 어느 쪽인 건데요?
강정문의 무척 궁금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도훈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어, 지사님. 죄송합니다만, 마침 신호 바뀌어서 저 운전해야겠습니다.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끊겠습니다.”
- 이봐요, 김 시···.
뚝.
다급한 강정문의 말에도 통화종료 버튼을 눌러버린 도훈.
하지만, 여전히 신호등의 색깔은 빨간색이라 도훈의 차는 미동도 없었다.
그런 도훈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영배가 입을 열었다.
“... 너 아무리 도지사님과 친하고 인척 관계까지 됐다지만,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냐?”
“막 나가기는. 이 양반은 고분고분 응하면 언제 목에 줄을 채우려 들지 모르는 양반이라고.”
“나쁜 뜻에서 그러시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해도 안 그래도 사적으로 이리저리 얽혔는데 공적으로도 그러기는 싫거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돼.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밀당’이 필수지.”
“... 허.”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하는 영배와 말없이 웃는 두진.
영배가 말을 이었다.
“... 그래서 네 나름의 결론은 뭔데?”
“사무실 가서 얘기합시다.”
부우웅.
때마침 녹색불이 들어왔고 도훈이 액셀을 밟았다.
시청 청사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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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퇴근시각이 조금 지난 시각, 운계면의 한 카페 세미나실.
내부에는 혜란, 두진, 영배가 자리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그래? 그럼 오늘 우리 선본 입장도 결정해야겠네?”
“네, 선배님.”
“김 시장 의견은 어떤 거래?”
“그 얄미운 시장 놈이 아침에 출근하는 차 안에서는 시청 가서 얘기하자고 하더니, 막상 시청에 도착하니까 이 자리에서 얘기하자고 극구 답을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아직 몰라요.”
영배가 투덜거리자 혜란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너는 어때?”
“저는 일단 찬성이에요. 조건을 몇 개 걸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시장 놈의 몸값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아닙니까.”
“... 흐음. 실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찬성입니다. 이건 나쁘거나 고약한 일에 앞장을 서는 게 아니니까요. 민주-진보진영 쪽에서 볼 때는 명분이 있고 필요하면서도 쉽지만은 않은 일에 나서 중책을 맡는 것 아니겠습니까? 장기적으로 김 시장에게 도움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오오! 무척 과학적인 분석이에요!”
두진의 말에 혜란이 감탄하자, 두진이 쑥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사실 저 혼자 생각한 게 아니고 인호 군, 조 비서관과 이야기하며 정리한 겁니다. 아마 인호 군 생각이 5할 이상일 걸요.”
“그래도 대단하세요!”
“과찬이십니다.”
“어휴, 실장님. 말씀 편히 하시라니까요.”
“하하. 차차 그러지요.”
셋이 그러고 있는데 도훈과 차인호가 들어왔다.
도훈은 세경에게 전화하고 들어왔고, 오늘 학교에 나갔었던 차인호는 대전에서 오느라 시간이 걸렸다.
“자,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도훈의 사회로 선본 회의가 시작됐다.
점검해야 할 일, 준비해야 할 일들을 차분히 확인하는 식으로 이어진 회의는 효율적으로 진행되어 원래의 안건을 다 논의하는 데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안건인데요. 민의당에서 선거연대를 내일모레 안에 공식화할 예정이랍니다. 함께 연대할 당 원내 대표들끼리 만나고 기자회견까지 할 거라는 걸 보니 이미 이야기가 상당 부분 진척이 된 모양이에요.”
“드디어 그렇게 되는군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죠. 보수 야당 쪽은 착착 절차를 밟아가고 있던데요.”
“뭐, 꼭 잘 되어가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TK 지역 현장은 꽤 소란스럽다면서요?”
“저도 뉴스에서 봤습니다.”
다들 한마디씩 한 것처럼, 보수 야당의 선거연대 논의는 중앙당 차원에서는 속도를 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보수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큰 지역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TK 지역으로 심각한 곳은 일부 예비후보가 ‘개인’ 자격으로 반대한다며 삭발을 감행한 곳도 있었다.
물론, 전국적으로는 연대의 필요성이 큰 곳이 훨씬 많아서 잡음은 일부에 불과했다.
“아무튼, 선거연대가 현실이 됐으니 그 제안에 대한 답을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도훈이 말을 이었다.
“각자 생각 많이 하셨을 테니 일단 가부부터 결정하죠. 선거연대에 찬성하시는 분, 손들어 주세요.”
척.
“... 와, 만장일치네.”
영배가 좀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처럼, 전원이 손을 들었으니까.
“시장님도 찬성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 그냥 기권하실 거로 생각했습니다.”
두진의 말에 도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그럴까 했는데···. 민주-진보진영이 선거연대를 통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후보를 당선시키는 게 공익에 조금이라도 더 부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네.”
“물론, 선거연대 논의과정에 단서조항 같은 건 달아야겠죠.”
민의당 혹은 진평당 또는 유사한 성향의 다른 야당 소속이나 진보적인 성향의 무소속이라고 해서 모든 후보가 사심 없이 공익 실현에 최선을 다할 거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당연히 최소한의 검증이 필요할 테고, 그걸 선거연대논의 과정에서 관철하는 것도 중요할 터였다.
“그럼 이제 회의할 거 다 끝난 겁니까?”
영배의 말에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끝나기는요. 우리 선본 대표를 뽑아야죠.”
“선본 대표라뇨? 시장님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왜 선거사무소도 못 열고 이렇게 카페에서 회의하는지 잊었어요?”
“아, 참.”
시장직을 유지 중인 도훈은 선거운동에 일절 관여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 저기, 시장님이 좀 일찍 사퇴하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저 그럴 생각 추호도 없는데요.”
“... 아, 예.”
담담하지만 단호한 도훈의 말에 차인호가 멋쩍게 웃었고 두진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사퇴하시기 전까지는, 충남지역 선거연대 논의에 대리인을 보내실 생각이신 겁니까?”
“네.”
“... 그걸 다른 당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긴요. 수용해 줘야죠. 아무리 선거가 중요하다지만, 당장의 시정보다 더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유권자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있고 말입니다.”
“네.”
도훈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두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실장님.”
“... 네?”
“잘 부탁드린다고요.”
“... 뭐, 뭘요? 설마 선본 대표 말입니까?”
“네.”
“... 아니, 그걸 왜 제가···?”
황당하다는 표정이 된 두진에게 도훈이 설명했다.
“저, 실장님, 조 비서관은 사퇴하기 전에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회장님께 이 역할을 맡···.”
“죽어도 사양이에요!”
도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색하고 말하는 혜란.
혜란에 이어 도훈의 시선이 간 것은 당연히 차인호였다.
차인호는 도훈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 저는 두 번 죽어도 못 합니다.”
“... 이렇다네요. 아, 오해는 마세요. 회장님이나 인호 씨가 부족할 거라는 게 아닙니다. 저는 충분히 가능할 거로 생각합니다만, 연대 파트너들의 시선이나 체면도 생각해줘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외부인이 보기에 혜란은 팬카페 회장이라는 것 말고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작가일 뿐이었고, 차인호는 곧 박사가 될 가능성이 큰 ‘학생’에 불과했다.
선본에서의 일이라면 전혀 그 능력을 의심치 않는 도훈이라지만, 선거연대는 여러 가지를 신경 써야 하는 자리가 될 터.
분명, ‘일반적인’ 시선이나 격식 같은 것도 고려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도훈 본인이 아니라면, 최연장자이자 공직 유경험자에 도훈의 비서실장인 두진이 가장 적합하다고 할밖에.
“... 저는 찬성입니다.”
“저도요!”
“찬성합니다!”
영배, 혜란, 차인호가 말했다.
도훈은 이미 자기 의사를 밝혔으니 두진 본인을 제외하면 모두가 그를 대표로 뽑은 것이었다.
황당하고 얼떨떨한 표정의 두진을 향해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예정보다 좀 일찍 사퇴하시게 되겠지만, 역할이 막중하십니다, 실장님.”
“......”
“잘 부탁드려요.”
“......”
말문을 잃은 두진에게 담담히 말한 도훈이 영배를 바라봤다.
두진을 보며 웃고 있던 영배가 흠칫 놀랐다.
“... 왜, 왜요?”
“조 비서관.”
“... 네.”
“재임 기간이 무척 짧을 것 같지만, 송 실장님 사퇴하시면 조 비서관이 비서실장입니다.”
“... 비, 비서실장이요?”
“네.”
깜빡, 깜빡.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영배에게 도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승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