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악재 - 3.
점심시간이 지난 토요일 오후, 도훈과 세경은 함께 선본 회의에 참석했다.
“순심이는 어쩌고?”
웬일로 회의장소인 카페 앞에 나와 있던 영배가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뒤 물었다.
“그 녀석은 어째 반쯤은 진주네 집 강아지가 된 것 같아. 진주네 집 앞에 차를 세우니까 자기가 알아서 계단으로 쪼로록 올라가더라고. 뒤도 안 돌아보더라.”
“... 혹시 그냥 내려놓고만 온 거야?”
“준수가 집 앞에 나와서 보고 있었지.”
“하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시장 개 4년이면 더부살이 마스터가 되는 거냐?”
“그런가 봐. 그런데 왜 나와 있어?”
얼굴 앞에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허공에 가위질하는 영배.
“... 어쩌라고?”
“눈치 없기는. 담배 한 대만 달라고, 인마.”
도훈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영배의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 뭐냐, 이게?”
“보면 몰라? 사탕이잖아.”
“사탕인지 몰라서 물어보겠냐! 왜 담배 대신에 이게 나오냐고?”
“지금 피우면 회의 때 다른 사람한테 폐가 되잖아. 흡연자는 형이랑 나뿐인데, 회의 끝나고 피자고. 이거나 드셔. 참고로 무가당이라 당 보충은 안 돼.”
“......”
심드렁한 도훈의 말에 나라라도 잃은 것처럼 절망적인 눈빛이 된 영배.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 네가 오늘 내 첫 흡연에 대한 기대와 로망을 짓밟아서 그런다.”
“... 로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들어가.”
도훈이 영배의 등을 떠밀었고, 영배가 입맛을 다시면서도 선선히 밀려 카페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만담’을 웃으며 지켜보던 세경이 뒤따랐고, 셋은 곧 세미나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 세경 씨. 오랜만이네.”
“호호, 네. 잘 지내셨죠?”
세경은 먼저 와 있던 혜란, 차인호와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뵙는군요, 사모님!”
“... 그 사모님 소리는 빼주세요.”
정색하고 말하는 세경의 모습에 움찔한 차인호.
“아, 그, 그럴까요?”
“호호, 네. 반갑습니다, 민세경이에요.”
“차인호라고 합니다.”
다섯 사람은 인사를 나눈 뒤 커피를 마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진이 도착했다.
“그럼 얘기들 나누세요. 전 밖에서 책 읽고 있을 테니까요.”
“네.”
두진과도 인사를 나눈 세경이 세미나실 밖으로 나갔다.
현직 도청 공무원, 그것도 간부급 공무원인 그녀가 선본 회의에 참석하는 건 중립의무 위반이 될 수 있으니까.
“갑자기 선본 회의를 소집한 건 어제 도지사님 오신 것과 관계가 있습니까, 시장님?”
오늘의 회의는 예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도훈에 의해 갑자기 소집된 것이었다.
“네. 관계가 있어요. 제안받은 게 있거든요.”
“하하.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냥 술 생각나서 오신 게 아니었군요.”
두진이 웃으며 하는 말에 도훈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네. 눈 가리고 아웅이었던 거죠, 뭐.”
어제 강정문이 ‘술이 마시고 싶어서’ 도훈과 만나러 온다는 건 비서실 직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전에 없던 일도 아니었지만, 도훈은 물론이고 비서실 직원 그 누구도 강정문이 정말로 술 ‘만’ 마시러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제안을 받으신 건가요?”
차인호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박사과정 학생이라지만, 그는 이미 논문제출을 끝내고 심사가 진행 중인 상황.
팬카페나 선본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그런 이유도 있으나 정치인의 선거,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고 지지하는 정치인의 선거에 역할을 한다는 현실 정치의 생생한 경험을 본인이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차인호에게 외부에서 들어온 정치적 제안이라는 게 얼마나 흥미진진하겠는가?
도훈이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한마디로 말하자면 선거연대입니다.”
“... 선거연대요?”
“네. 보수진영 선거연대에 대응하는 민주-진보진영 선거연대라고 도지사님은 설명하시더군요. 도지사님의 아이디어는 아니랍니다. 당 대표실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 중의 하나로 제시했다고 합니다.”
“여러 아이디어 중의 하나요?”
“네. 그러니까 지금으로써는 꼭 추진한다거나 거기에 사활을 건다는 정도의 무게감은 없는 겁니다.”
“... 흐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두진은 담담했고 영배는 살짝 김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혜란은 감을 잘 잡지 못하는 듯했고 차인호는 진지하게 이 제안의 진의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듯한 모습.
도훈과 두진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정당도 아닌 시장님 개인, 아니 우리 선본을 선거연대의 한 주체로 인정한다는 겁니까?”
“네. 다만, 전국적인 인정은 아니고 충남지역에 국한된 겁니다. 현재 여권 쪽 선거연대는 중앙당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나중에 무게 중심을 지역별 연대활동에 둘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 흐음.”
“와, 이거···.”
차인호가 감탄했다는 표정이 됐다.
‘시’가 아니라 ‘도’다.
대흥시 내부의 선거에서 연대한다는 말은 선본에서도 가볍게 한 적이 있었지만, 이건 급이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충남지역으로 한정시켜도 도지사에 지역구 현역 국회의원 다수, 기초단체장도 다수에 광역‧기초의원까지 계산하면 선출된 공직자를 굉장히 많이 보유한 여당이다.
여당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몇몇 선출직 공직자를 보유한 엄연한 당 조직을 갖춘 민주-진보 성향의 다른 정당도 있다.
여당이 다른 정당뿐 아니라 도훈을 연대의 한 주체로 인정하겠다는 건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질 않은가.
“... 이거 대단한 거 맞죠?”
“물론입니다, 회장님!”
혜란이 묻자 살짝 흥분된 표정으로 답한 차인호.
“그게 다가 아닙니다.”
“... 네? 뭐가 또 있습니까?”
“네.”
차인호가 더 흥분할 이야기가 도훈의 입에서 이어졌다.
“도 단위로 나뉜 지역 선거연대는 대표를 뽑습니다.”
“... 아마 그렇겠죠. 그런데 그게 왜···.”
“설마?”
“혹시?”
차인호는 감을 잡지 못했지만, 소소하게나마 현실 정치 경험자라고 두진과 영배가 곧바로 반응했다.
“... 네. 제게 충남지역 공동대표를 맡아달라고 하더라고요.”
“... 헐.”
“... 역시.”
두진과 영배는 살짝 놀란 표정이고 혜란과 차인호는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도훈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또 이어졌다.
“... 그리고 충남 공동대표 자격으로 전국회의에도 참여해 달라고 했습니다.”
“......”
“아무래도 전국의 참신한 인물들을 앞세워 지금의 난국을 돌파할 계획인가 봅니다.”
“......”
모두가 말문을 잃고 입을 벌린 가운데, 도훈이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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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경 씨, 회의 끝났어요. 가요, 우리.”
“네.”
회의는 금방 끝났다.
실행 여부도 결정되지 않은 제안을 길게 논의할 필요가 없어서, 제안이 실제로 들어온다면 그 가부에 대한 답을 각자 고민해보기로 한 뒤 도훈은 회의 종료를 선언했던 것.
물론, 사안이 중요해도 너무 중요하니 제안받은 사실 자체부터 함구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회의에 참석한 모두는 각자의 배우자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어떻게 됐어요?”
“그냥 상황을 공유하고 끝냈어요.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일 뿐인데 길게 논의할 필요가 없잖아요.”
“네.”
카페를 나온 두 사람은 차에 올라 진주네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생각보다 날씨가 좋았고 사무실에 나갈 계획이 없어서 순심이를 데리고 공원에 산책가기로 했다.
누가 본다면, 선거 두 달 남은 사람치고는 어울리지 않게 여유가 넘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댈 수도 있겠지만, 지금 도훈은 시장선거 후보가 아니라 현직 시장이었다.
예비후보들은 열심히 얼굴을 알리고 다니느라 바쁠 테지만, 도훈은 아직 선거운동에 나설 수 없는 상태였다.
“... 어제 제안, 도훈 씨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글쎄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어제 이야기를 함께 들은 이후 처음으로 그 일을 다시 언급한 세경.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요.”
“네. 그러려고요. 그나저나 세경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에이, 그런 걸 왜 물어요? 그냥 도훈 씨가 알아서 결정하면 되지.”
“어허. 여보세요. 이거 댁의 남편 일이라고요.”
“호호호.”
도훈의 장난기 어린 타박에 세경이 소리 내어 웃고는 답했다.
“흠. 만일 이게 제 문제라면 전 제 소신을 따를 것 같아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네. 그게 공익이니까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건 세경의 소신이기에 앞서 세경 아버지, 그러니까 작고한 도훈 장인의 소신이기도 했다.
세경이 그런 소신을 물려받게 된 것도, 그 소신을 품고 행정고시를 준비해 합격해 공무원이 된 것도, 모두 그 소신을 먼저 품고 공직에 있던 아버지를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도훈의 차는 곧 진주의 집에 들렀다가 반려동물 공원을 향했다.
“자, 순심아. 언니랑 놀자.”
왈! 왈왈!
공원에 도착해 몇몇 시민들과 인사한 도훈이 구석진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기자, 세경이 그런 도훈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순심이를 데리고 멀어졌다.
뭘 생각하고 고민하는지 그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홀로 남은 도훈은 어제저녁 강정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사실, 난 오래전에 당 대표님께 오정민 의원 눈여겨봐야 한다는 말밖에 전한 게 없어요. 나머지는 다 공수처에서 알아서 한 겁니다.
- 믿기 힘든 말이라는 거 지사님도 이해하시죠?
- 네. 노회한 정치인이 자기가 대표인 당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겠죠. 하지만, 대표님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답니다.
- 그게 뭡니까?
- 여당 대표보다 더 힘센 분이 여당 대표에게 그 일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게 단속하셨다네요.
- ... 설마?
- 네. 대통령님이요.
이어진 강정문의 설명은 이랬다.
강정문의 언질을 받고 오정민과 그의 측근들을 살피던 당 대표실에서는 오정민이 정부 부처 곳곳의 간부들을 통해 이런저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정민의 가문이 준재벌이니 돈을 탐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 행정력을 동원하는 충분히 그릇되고도 남은 행동이었다.
당 대표는 고심 끝에 지난 총선 후 은퇴한 전 당 대표를 찾아가 상담했고, 전 당 대표를 통해 이 일은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을 통해 당 대표에게 대통령의 뜻이 전해졌다.
- 그 사안은 이제 공수처의 일이 되었으니, 당 대표는 관여하지 마라. 향후 청와대도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이후, 당 대표는 오정민의 일에 손을 놨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제보가 공수처에 전해졌다.
제보를 받은 공수처는 내사 끝에 오정민이 오래전부터 정부 부처나 재계 등을 움직여 자신의 지역구 현안 처리나 입법활동, 정책 발의 및 실행 등에 조력을 받은 것을 확인했다.
정치인 오정민 개인의 업적 쌓기를 위한 그런 성격의 일들이었다.
그 대가로 공무원에게는 승진 추천이나 요직으로의 전보, 기업에는 사업 이권을 배려해 주는 등의 행동을 한 오정민.
공수처가 오정민에 대해 내사한 것도, 공개수사 시점을 대선 이후로 잡은 것도 누군가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수처의 자체적인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계획은 ITS의 보도로 어그러졌지만.
- 그 말씀도 믿기 힘듭니다.
- ... 나도 ITS에서 첫 보도가 나온 뒤 당 대표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난 믿어요.
- ... 뭘 근거로 말입니까?
- 내가 깊은 친분이 있거나 하지는 않지만, 꽤 오랫동안 지켜봤던 지금 대통령님의 인격을 근거로요.
- ......
도훈이 뭐라 대꾸를 못 하는데 강정문이 말을 이었다.
- 김 시장.
- 네.
- 나도 후진적인 현실 한국 정치에서 제 역할을 못 하는 우리 당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습니다.
- ... 네.
강정문은 민의당 내에서 범 개혁파에 속한다.
파격적인 강성 개혁보다는, 느리지만 꾸준한 변화를 추구하는 그런 인물.
그가 도훈이 친분을 맺은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하나인 건, 그런 꾸준한 변화의 길에서 잠깐 멈추거나 뒤로 밀려난 적은 있어도 그 길 ‘자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길 위에 있기도 하고.
- 우리 당 문제 많죠. 과감하지 못하다거나 더 철저하지 못하다거나, 좀 더 국민에 근거한 시각과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거나··· 일부 타협적인 이들도 있고 말이죠.
- ......
- 하지만, 최소한 한 가지 이유로 난 그 당의 당원인 게 자랑스러워요.
- ... 그게 뭡니까? 대선에 연승한 당이라는 거요?
- 아뇨. 퇴임을 앞둔 지금의 대통령님을 대통령으로 만든 정당이라는 거요.
- ......
- 그리고 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알게 모르게 노력한 이가 많은 정당이라는 거요.
- ......
- 물론, 그분을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한 최종적인 선택을 한 건 우리 국민이긴 하지만요. 그래서 우리 국민도 자랑스러워요. 하하하.
새 정권 출발이 두 달도 안 남은 상태에서 임기 말 ‘지는 해’인 현 대통령 이야기를 하는 강정문.
그 얘기를 하는 강정문에게서는 조금도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정문은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당 대표의 제안에 관해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수락하라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등의 얘기도 전혀 없었다.
온전히, 도훈 혼자서 고민하고 결정할 문제라는 듯.
위이잉.
도훈이 옆에 내려놓은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 ‘속보’. 공수처, 조만간 오정민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예정.
뉴스 알람이 뜬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생각에 빠진 도훈.
그의 머리 위로 3월 말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