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악재 - 1.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대다수가 예상한 것처럼 여당인 민의당 후보의 완승.
선거결과는 대다수의 예상대로였지만, 투표율은 ‘낮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97년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 처음으로 80%를 넘었다.
선거결과를 두고 많은 사람의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투표일 저녁 비서실 TV로 출구조사 결과를 보던 도훈은 대선의 결과를 두고 영배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중간에 주춤한 적도 있고 실수한 적도 있지만, 이번 정부가 개혁이나 정책 추진에 꾸준했던 게 인정받은 거겠지.”
“그랬지. 대북문제 성과를 거둔 것도 그런 측면이니까.”
“맞아, 형. 그리고 국회가 영향을 많이 끼쳤을 거야.”
“그래. 지난 총선 전후로 많이 달라졌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사람들이 모를 수가 없었지.”
“지난 국회는 보수 야당의 정부 발목잡기에 너무 휘둘렸어. 하지만 총선 뒤에 여권이 과반이 되니까 입법으로 충실히 정부를 뒷받침했잖아. 보수 야당과 언론이 독재 어쩌고 하며 프레임을 씌우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국민은 오래간만에 일 좀 하는 국회라고 호평하고 있지. 일 열심히 하고 성과를 내는 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어.”
“그러니까.”
임기를 두 달여 남긴 현 정부가 매사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다.
실수도 잘못도 있었고, 분명한 역부족과 실패도 겪었다.
하지만, 민심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세워진 정책에 일부 수정은 있었어도 포기는 없었다.
국민의 말과 비판에 귀 기울이며 경청하고 토론하고 사과하고 설득도 했지만, 의도나 목적을 가진 비난이나 공격에는 때로는 패배하면서도 끝까지 잘 견디며 꾸준히 나아가고자 했다.
아쉽고 미진한 부분이 많지만, 더 나아갈 수 있는 튼튼한 발판을 만들었다고 할까?
이번 대선은 바로 그걸 확인하는 선거였다고 도훈은 평가했다.
아무튼, 그렇게 대한민국을 휩쓸던 큰 이벤트 하나가 끝났고 다른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1주일 뒤인 3월의 세 번째 수요일.
업무를 마치고 퇴근한 도훈은 집이 아닌 운계면 한 카페의 세미나실에 앉아 있었다.
예정되어 있던 선본 회의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참가 인원은 지난번처럼 도훈과 영배, 두진에 혜란, 차인호까지 다섯 명.
시장선거를 준비하는 선거운동본부의 회의치고는 매우 단출한 모임이었다.
하지만, 회의 참석인원이 단출하다고 회의 내용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 팬카페 회원 중에 선거 때 운동원으로 자원봉사하시겠다고 지원하신 게 지금까지 집계된 것만 50분이 넘습니다.”
“그렇게나 많아요?”
차인호의 말에 살짝 놀라는 도훈.
“하하. 그분들이 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하시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들 각자의 생업이 있으니까요.”
“그거야 알죠. 그걸 고려해도 제 예상보다는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분들 중에 기회를 못 얻을 분도 계실 것 같은데요.”
“계획대로라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이 정도로 놀라시면 안 되는데요. 아마 실제로 나서는 분들은 더 많을 것 같거든요.”
“정말로요?”
“네. 그때 가서 상황을 봐야겠지만, 기회가 닿으면 반나절이든 하루든 꼭 하겠다는 분들도 꽤 됩니다.”
“... 하하.”
“아무튼, 사전에 필수 주의사항 교양 같은 것도 해야 하고 스케줄도 조정해야 하니까 할 일이 많습니다.”
차인호에 이어 영배도 말을 이었다.
“회원 모두가 선거 때 유의해야 할 사항 같은 것들은 미리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해도 공직선거법에 위배 되는 행동을 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선거라는 게 워낙 민감하다 보니 아무리 사소한 위반이라도 선처받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이런 얘기가 있던데···.”
“뭔데요?”
“선거운동원은 보수가 지급되잖습니까? 그런데 회원들이 보수 때문에 선거운동원 하는 거 아니니까 그거 모아서 어디 좋은 일에 쓰이게 기부하자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 벌써 그런 얘기가 나와요?”
“네.”
“와, 우리 팬카페 회원들 대단하네.”
차인호가 웃으며 말했고 영배가 감탄하는데 두진이 끼어들었다.
“그건 회원들끼리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하시고 우리는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회원들은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일 텐데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
혜란이 두진에게 되물었다.
“오해라뇨?”
“예를 들면 후보 이미지 좋게 하자고 별의별 수를 다 쓴다는 말 같은 거 말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선거라는 게 회장님 생각보다 훨씬 더 유치하고 적나라한 겁니다. 선거 때는 어떻게든 상대방 흠집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켜니까 말입니다. 아까 조 비서관이 얘기했지만, 선관위 공무원들이 사소하다고 봐주지 않는 게 어떤 후보 쪽에 문제가 생기면 상대측에서 어떻게든 흠집을 잡으려고 물고 뜯으니 선관위 직원들도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러는 거거든요.”
“아, 네. 실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해야겠네요”
가장 연장자인 두진은 그만큼 선거를 여러 번 경험했다.
공무원이라 선거운동을 한 적은 없고 선관위 직원이었던 적도 없지만, 스스로 중립의무를 지키기 위해 관련 법규를 잘 알고 있고 온갖 선거법 위반 사례를 꿰고 있었다.
당연히, 그 분야에 관한 얘기라면 두진의 말에 자연스럽게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건 시장님께 말씀 안 드릴 수가 없어서 얘기를 꺼내는 건데요.”
거침없는 성격인 혜란이 조금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뭔데 그러십니까, 회장님?”
“회원들이 민의당과의 선거연대를 굉장히 궁금해해요. 과연 그쪽에서 제안이 오면 응하실지 어떨지요.”
“아, 예.”
회원들이 선거연대에 관한 관심을 기울이는 건 선거를 앞둔 정치적 상황이 그 가능성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보수 야당은 후보 단일화를 했음에도 대선에서 완패했다.
때문에, 대선으로부터 불과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치러지는 지방선거까지 질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한 가운데, 더욱 공고한 선거연대와 단일화 및 그 이상의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현장에서부터 들끓고 있었다.
보수 쪽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보니 민주, 진보 쪽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겼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라는 경계의 목소리가 높았고 대선과는 또 다른 총력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 방편의 하나로, 지방선거 선거연대 관한 요구가 현장에서부터 점점 커지는 상황이었다.
“회원들 의견은 어떻습니까?”
“회원들 사이에서는 해야 한다, 안 해도 된다는 주장이 거의 팽팽해요. 정작 시장님은 아무런 말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죠.”
“하하.”
도훈의 정치적 성향은 뚜렷한 진보이다 보니, 본인은 의견을 밝힌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대흥시 자체적으로라도 선거연대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다.
이는 도훈 본인의 당선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의견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의당이나 진평당 등 진보진영 시의원이 한 명이라도 더 당선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의견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진평당 대흥시 지역위원회가 아주 적극적이어서 신길영 의원이 두어 번 운을 띄운 적이 있었다.
도훈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당과 연대하는 게 그리 마음에 안 내킵니다. 지역위원회 차원이라고 하지만, 중앙의 지침이 결정되어야 가능한 일인 데다가 저 한 사람이 뭐라고 그런 공식 기구와 논의를 하는 게 좀 부담입니다.”
“그래요?”
“네. 해야 한다면 차라리 후보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은 해요. 물론, 이것도 생각일 뿐입니다.”
도훈이 말을 마치자, 영배가 빙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지지하기 싫은 사람까지 뭉텅이로 지지하게 되는 게 싫어서 그러신 거 아니고요?”
“... 솔직히 전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그런데 그것도 있지만, 제가 다른 당의 선전거리가 되는 게 싫은 측면이 더 큽니다.”
“선전거리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영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선에 도전하는 시점에서도 도훈은 아직 30대로 무척 젊은 데다가, 재임 중 부정 시비에 휘말린 적이 없을뿐더러 시정에서도 큰 오류를 범한 적이 없었다.
그 반대로 ‘시민참여 확대’, ‘복지정책 확대’라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시정에 임하며 평균 이상은 해냈다는 평가를 시민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대흥시 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뒤에, 민의당 지역위원회에서 ‘단독 출마’ 주장이 쑥 들어간 것이 그 유력한 증거라 할 수 있을 터.
“... 전국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 충남지역에서는 시장님과의 연대가 중요한 홍보 포인트가 분명히 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전국적으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죠.”
차인호의 말에 도훈이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너무 앞서나가지 말고 지켜보죠. 아직 공식적인 제안 같은 것도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회의가 이어졌고 차분한 토론이 이어졌다.
선본 구성원은 소수였지만, 선거 준비와 관련한 것도 조촐한 것은 아니었다.
전략, 정책 등과 관련한 논의는 그 어떤 시장 후보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
다만, 비용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정해진 ‘간소하게’라는 방침을 따르고 있어 다른 후보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긴 했다.
“... 대충 오늘 논의할 건 다 한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훈이 회의 종료를 선언했고 다들 서류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오래 안 걸렸네요.”
“그럼, 이제 식사하실까요? 저는 배가 꽤 고픈데요.”
“그러죠. 세미나실 오래 쓴 값도 치를 겸 여기서 먹는 건 어떨까요? 여기 식사도 되는데요.”
“그러시죠.”
카페 사장이 팬카페 회원이었고 오래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미리 받았지만, 도훈은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일행이 홀로 나와 주문까지 마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
도훈과 마주 앉은 영배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왜?”
“저것 좀 봐라.”
도훈의 등 뒤, 벽에 걸린 TV에서 저녁 뉴스가 시작됐다.
그런데 첫 뉴스를 말하는 앵커 밑에 자막으로 ‘공직자비리수사처 민의당 현역 중진의원 직권 남용 혐의로 소환 예정’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사장님, 잠깐 TV 소리 좀 키워도 돼요?”
“물론이죠.”
영배가 말하자 카운터의 사장이 직접 리모컨을 조작해 소리를 키웠다.
- ... 익명의 관계자에 따르면 내사는 수개월 전에 시작됐으며 직권 남용 혐의에 대한 증거와 증언이 상당 부분 확보되었다고 합니다. 관계자는 이 현역의원이 서울의 재선 이상의 중진 의원이라고 밝혔고, 수사에 상당한 진척이 있는 만큼 조만간 소환되어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뉴스에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누구를 언급하는 것인지 감이 온 도훈.
‘... 올 게 온 건가?’
담담한 표정으로 TV를 바라보던 도훈이 고개를 원위치시켰고, 영배와 눈이 마주쳤다.
영배가 고개를 숙이더니 낮게 속삭였다.
“... 설마 저거···.”
“쉬잇.”
도훈과 영배가 그러고 있는데, TV에 시선을 고정한 차인호가 입을 열었다.
“이거 어떤 종류의 사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당 중진 의원이 맞는다면 여권에 큰 악재인데요.”
“그러게. 지방선거가 코앞인데···.”
“허허. 직권 남용 증거와 증언까지 확보했다는 걸 보면 단순한 의혹은 아닌 것 같은데, 사건은 사건이겠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시기도 참 미묘하네.”
“... 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뉴스에 정신이 팔려 도훈과 영배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 눈치.
도훈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가 뗐고, 영배가 알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영배를 주의시키고 다시 TV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도훈이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다.
‘... 가만있자. 나는 김 의원에게 들은 얘기가 있지만, 영배 형은 어떻게 짐작한 거지? 그 얘기는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설마, 그때 그 문건만으로 짐작한 건가? 연결고리가 아무것도 없는데?’
도훈의 시선이 다시 영배를 향했다.
다시 도훈과 시선이 마주친 영배가 말없이 ‘왜?’ 하는 눈빛을 보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도훈이 그런 영배를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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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저녁 직권 남용 혐의를 보도한 건 지상파 방송국인 ITS 하나였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부터 공중파와 종편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방송은 물론, 신문에서도 같은 뉴스를 다루기 시작했다.
‘재선 이상의 여당 서울 현역의원’이 도대체 누구냐는 궁금증이 커지며 온갖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고, 모든 야당이 문제의 비리 의원이 누구인지 자백하라며 여당을 성토했다.
그냥 의원이라고 해도 큰 문제이지만, 국회의원 경력이 좀 되는 중진급 의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날 선 비판도 뒤따랐다.
거기에 시점도 문제가 되었다.
여당 의원의 직권 남용은 표심에 즉각 영향을 줄 수 있는 사건.
야당을 중심으로 공수처가 이 사건이 대선에 영향을 끼치는 걸 막기 위해 ‘뭉개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날 선 비난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비난에 민심도 일부 호응했다.
이는 ITS 온라인 게시판에 그대로 드러났다.
너희는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을 테니 공개하라는 글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
그렇게 비리를 저지른 여당 의원을 향한 의문이 커지는 가운데, 금요일 낮 공직자비리수사처 청사에 들어서는 한 사람의 얼굴이 수많은 매체를 통해 알려졌다.
“... 역시···.”
인터넷 뉴스 창을 띄운 도훈이 딱딱하게 굳어진 오정민의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여권에 절대 작지 않은 악재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