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착각은 금물 - 2.
강정문 도지사와 통화하고 이틀이 지난 3월 중순의 어느 금요일 늦은 저녁, 도훈은 오래간만에 김용진 의원과 중국관 뒷방에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바쁘지 않아요?”
“저보다 의원님이 바쁘시겠죠. 저는 대통령 선거운동 안 하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본인 선거 준비 안 합니까?”
“그건 조용히 하고 있고요.”
김용진이 내민 소주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며 답하는 도훈.
김용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호?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느껴지는 데요? 일보다 나랑 술 마시는 걸 우선시할 김 시장이 아닌데 말이죠?”
“뭐, 틀린 말씀은 아닌데요. 오늘 저녁에 방문하려던 시민 모임에 찾아가 인사하겠다는 분들이 많은가 보더라고요.”
“아하? 그러면 그렇죠.”
여느 때처럼 도훈은 오늘도 시민들의 모임에 찾아갈 계획이었다.
오늘 가려던 모임은 한 아파트의 주민자치회 분기회의 뒤풀이.
그런데 대선 투표가 다음 주 수요일이고 모임 규모가 꽤 커서 그런지 찾아가 인사하고 싶다는 각 선본 지부의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도훈이 진즉부터 뒤풀이에 참여하기로 약속해서 주최 측에서 그걸 핑계로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나?
도훈은 자치회 회장에게 직접 연락해 이번엔 자신이 빠질 테니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라고 요청했다.
자신은 처음 참석을 허락받은 뒤 분기회의 뒤풀이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계속 찾아갔었으니까.
건배한 도훈이 잔을 비우고 안주를 먹고 다시 자기 잔을 채우는 데, 김용진은 술잔을 비우지 않고 그런 도훈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김 시장, 혹시···.”
“... 혹시 뭡니까?”
“그러니까 혹시 우리 당에···.”
“... 또 물어보시는 겁니까? 저 마음 안 바뀌었습니다.”
“... 쩝.”
도훈은 김용진의 살짝 뻘쭘해 하는 표정과 말을 쉽게 잇지 못하는 모습만 보고도 그가 뭘 물으려는 건지 알아채고 답했다.
안준식에게 김용진이 자신의 민의당 입당을 무척 바란다는 얘기를, 최근 들어 더더욱 그러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게 도움이 되었다.
“의원님도 참 끈질기십니다. 도지사님은 최소한 그 부분은 포기하신 것 같던데.”
“하하. 처지가 다르잖아요. 그 양반은 단체장인 데다가 이제 최소한 김 시장과 가족으로도 인연이 닿았지만, 난 김 시장과 친한 지역구 국회의원일 뿐이잖습니까.”
“... 제가 친한 국회의원은 의원님뿐인데요?”
“에이, 거짓말 말아요. 진평당 임지희 의원님도 있잖아요.”
김용진이 임지희 의원 얘기를 꺼낸 건, 임지희가 도훈의 진평당 입당 여부와 상관없이 지원유세를 할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민의당 충남도당 위원장에게 말한 걸 염두에 둔 것.
이 얘기는 신길영에 의해 도훈의 귀에도 들어갔으나 도훈 본인은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진보정당의 상징, 진보정치인의 대명사와도 같은 사람이고 도훈도 존경하고 있기에.
말하자면, 임지희는 도훈에게 일상생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TV 속 연예인과 같은 느낌이랄까.
“글쎄요. 그분이 저를 좋게 생각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언감생심 친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하하. 그래요? 이거 김 시장과 유일하게 친한 국회의원이라니 내가 영광으로 생각해야겠습니다.”
“... 그냥 친한 국회의원 없다고 하렵니다.”
“하하, 알았어요. 알았어.”
김용진이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고 안주를 씹어 넘긴 뒤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용건이 뭡니까?”
“... 제가 최근에 강정문 지사님께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이상한 말이라뇨?”
“민의당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아주 다양한 사람이 있지만, 과거와 달리 큰 불협화음 없이 하나의 정당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최소한의 자정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나요?”
“......”
“옳고 옳지 않은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정당이니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는 그걸 유념해줬으면 좋겠다는 아주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었죠.”
“...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라는 건 또 무슨 뜻입니까?”
김용진이 묻자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답했다.
“제가 먼저 전화한 것도 아니고, 갑자기 강 지사님이 전화하신 거였거든요. 더군다나 민의당에 관한 얘기를 하던 중에 그 얘기가 나온 것도 아니었어요. 저랑 호칭 정리를 위한 가벼운 논쟁을 하다가 갑자기 말씀하신 내용이었습니다.”
“... 호칭 정리요?”
“아, 그런 게 있었습니다. 아무튼, 갑자기 생각도 않은 내용을 그렇게 불쑥 말씀하신 거였습니다. 제가 당연히 밑도 끝도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지 않겠습니까?”
“흐음. 지사님과 언제 통화했는데요?”
“수요일 저녁이요.”
“수요일이라···. 아, 그 일 때문인가?”
김용진이 뭔가 아는 듯한 눈치이자, 도훈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 눈빛의 변화를 알아챈 김용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음. 이거 김 시장한테 발설해도 되는 내용인지 모르겠네요.”
“... 당 내부의 문제인가요?”
“네. 그래서 극소수만 알고 있어요.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게 단속하고 있기도 하고요. 난 우연히 그 사람과 함께 논의하던 일이 있어서 알게 된 거고요.”
“사람의 문제로군요.”
“네.”
“... 흐음. 당에서 단속한다면 저는 모르는 게 좋겠네요.”
“하하. 뭘 또 그렇게 쉽게 포기합니까? 강 지사님이 일부러 김 시장에게 얘기한 걸 보니 김 시장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셨던 것 같은데.”
김용진이 웃으며 묻자 도훈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도 당에서 단속하고 있는 내용이니까요.”
“흐음.”
“고민하지 마세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요.”
“음. 가만히 있어봐요. 생각 좀 합시다.”
“... 네.”
김용진이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이리저리 갸웃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절대 비밀이라는 전제하에 얘기해주면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을 거죠?”
“... 모르죠, 그거야.”
“에이. 김 시장 입 무겁잖아요.”
“... 아내한테는 웬만하면 비밀이 없는데요.”
“그럼 아내한테도 절대 비밀이라고 단서를 달면요?”
“... 그냥 마음 편하게 안 듣고 말렵니다.”
김용진이 도훈을 얄밉다는 눈빛으로 잠시 째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김 시장,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분위기 좀 맞춰주면 안 됩니까? 나 이래 봬도 어디 가서 웬만하면 푸대접 안 당하는 국회의원인데요. 그것도 재선.”
“... 저는 의원님 뵈오면서 단 한 순간도 그걸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지금도 물론이고요.”
“... 정말 이럴 때는 정떨어진다니까요.”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도훈의 모습에 피식 웃고 만 김용진.
“의원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니 저도 장단 맞춰드리겠습니다. 비밀엄수하겠습니다.”
“약속입니까?”
“네. 약속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내 편히 말하죠.”
장난기 가득하던 김용진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어느 당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당도 대선 승리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알죠?”
“네.”
“김 시장도 아시다시피 대규모 전국 지원유세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어떤 선거 때보다 더 규모가 커요.”
“... 그렇군요.”
“수요일에 당 대표실에서 우리 당 중진 의원 한 사람에게 지원유세단에서 빠지라는 얘기를 했죠. 국민적인 지명도가 상당한 인물인데도, 전국 어디를 가나 유권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끌 만한 인물인데도 그랬습니다.”
“......”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회의원으로써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유였습니다.”
“......”
“그 사람이 오정민 의원이에요. 김 시장과도 인연이 있는.”
예상 못 한 이름이 등장했기에 도훈의 눈이 자기도 모르게 커졌다.
“... 정말입니까?”
“네.”
“......”
“부당한 영향력 행사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나도 몰라요. 공식적으로 당 대표실에서 그걸 이유로 든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진짜 원인은 그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 흐음.”
도훈이 신음을 흘렸고, 김용진은 더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그게 다가 아닐 겁니다.”
“... 다가 아니라뇨?”
“... 이건 그냥 내 추측인데···.”
“......”
“... 아마 곧 오정민 의원에게 법적 책임이 물어질 가능성이 커요.”
“......”
흔치 않게, 놀란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도훈.
그런 도훈을 바라보는 김용진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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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과의 저녁 겸 술자리는 한 시간 정도로 끝났다.
그와 헤어져 집으로 걷던 도훈은 세경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곧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근처 공원으로 향했고, 벤치에 앉아 잠시 고민하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야, 김 시장이 내게 전화를 먼저 걸다니. 이거 오래간만 아닙니까? 하하하.
“... 통화 괜찮으십니까, 지사님.”
- 응? 왜 목소리가 심각해요? 무슨 일 있습니까?
“무슨 일까지는 아니고요.”
- 뭡니까? 뭔데 그래요?
강정문이 묻자 도훈은 최대한 담담하게 답했다.
“제가 조금 전까지 김용진 의원과 같이 있었습니다. 김 의원에게 좀 놀라운 이야기를 들어서요.”
- ... 음.
강정문이 침묵했고 도훈도 한동안 침묵했다.
길게 이어지던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도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 ... 그래요.
“오정민 의원과 관련된 일에 지사님이 관련 있으십니까?”
- ......
“... 지사님?”
- ... 만약 관련이 있다면요?
긍정하지 않고 가정하는 강정문.
도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질문했다.
“... 지사님이 관련 있게 되신 이유에 혹시 제가 포함됩니까?”
도훈은 심각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강정문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 하하, 김 시장.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 착각이요?”
- 네. 착각이요.
“......”
- 민의당은 크기를 떠나서 국정에 관해 국민에게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여당입니다. 그런 정당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김 시장이 관련 있다고 3선 의원의 행보에 제동을 걸까요?
“... 아니겠죠.”
-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래 봬도 충청남도 도지사예요. 도민에게 무한책임을 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김 시장이 대흥시 시민에게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요.
“......”
도훈이 뭐라 말을 못 있는데, 강정문의 목소리가 좀 차가워졌다.
- 아무리 김 시장과 내가 인척 관계라고는 해도 나도 판단의 준칙이란 게 있어요. 김 시장이 인척이든 아니든 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 네.”
- ... 내가 오 의원의 행보에 제동을 걸게 했다면, 그건 철저히 나만의 판단 준칙에 따른 겁니다. 나 개인과 당의 이해, 득실을 떠나서 말이에요. 아무리 대선 직전이고 같은 당 소속 중진 의원이라지만, 용납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요.
“......”
- 나 그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김 시장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내 넉살을 받아준다고 믿고 있었는데요.
“... 죄송합니다.”
도훈이 진심으로 사과하자 강정문의 냉랭한 목소리가 급변했다.
- 뭘 또 그리 다큐로 받아요? 하하. 난 내가 그랬다고는 안 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에 합당한 나만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지. 가정이란 말이에요, 가정.
장난기 섞인 쾌활한 목소리로 말하는 강정문.
“... 가정은 부정과 다르잖습니까?”
- 그리고 긍정과도 다르죠.
“......”
말을 끊은 도훈이 어떻게 대화를 이어갈까 생각하는 데 강정문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 집입니까?
“아직 밖입니다.”
- 저런, 오늘 세경이 거기 갔을 텐데 아직도 밖이에요? 새 신부를 혼자 놔두면 어떻게 합니까? 안 그래도 주말부부로 지내는 걸 안타까워하시는 우리 이모님이 들으시면 무척 서운해하실 대목인데요?
“......”
도훈이 쓰게 웃었다.
아무리 자신이 제법 논리정연하고 말을 잘한다지만, 강정문의 능수능란함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들어갑니다.”
- 그래요. 어렵겠지만, 주말에는 가능한 와이프한테 충실하세요. 그게 다 나중에 돌아옵니다. 결혼생활 오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충고하는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 들어가요. 조만간 대흥시에 갈 일이 있으니까 그때 밥이나 같이 먹읍시다.
“... 알겠습니다.”
뚝.
“... 뭔가 있군.”
강정문이 모종의 역할을 했으리라 확신하며 걸음을 옮기는 도훈.
그와 거의 같은 시각, 도청이 자리한 홍성의 어느 집 서재에서 강정문도 중얼거리고 있었다.
“... 아무튼, 눈치는 귀신같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