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착각은 금물 - 1.
같은 날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집에 돌아온 도훈은 여느 때처럼 세경과 통화하고 있었다.
“네. 오늘은 좀 일찍 끝났어요. 원래 찾아가려던 모임이 둘이었는데 하나가 취소되었다고 해서요.”
- 잘됐네요.
“하하. 잘 되긴요. 전이라면 좋아했을 영배 형도 선거 다가오니까 하나라도 더 모임을 많이 찾아다녀야 하는데 이렇게 됐다고 아쉬워했는데요, 뭘.”
- 호호. 그렇긴 하지만, 도훈 씨는 3년 넘게 시민 모임 줄기차게 찾아다녔잖아요. 좋은 소리 못 듣고 혼도 나고 욕도 먹으면서요. 얼마 전에는 취한 어르신한테 붙들려 한 시간 동안 진땀을 뺀 적도 있다던데요? 뭐,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더한 경우도 많이 당했다고 하던데요.
“... 그 얘기는 또 어디서 들었어요?”
- 호호, 뻔하잖아요.
“... 이 인간이 진짜···.”
도훈과 세경이 연인이 된 뒤로 도훈은 자신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세경에게 숱하게 들려줬다.
다만, 그러면서도 좋지 않은 일을 겪었던 부분은 쏙 뺐다.
약속하고 모임에 찾아갔으나 약속과 달리 문전박대를 당했다거나 비판 아닌 비난을 욕과 함께 들었던 일, 취객에게 멱살이 잡히기도 했던 일 등까지 세경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어떤 ‘촉새’가 그런 얘기도 도훈 몰래 해 준 모양이었다.
- 영배 씨 나무라지 마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열심이니까 나한테 도훈 씨 잘 봐주라는 그런 뜻으로 말했던 거니까요.
“... 그건 세경 씨가 영배 형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요. 그 인간은 그냥 그 얘기가 재미있으니까 한 걸 겁니다.”
- 호호. 아니에요. 분명 그런 뜻이었어요.
“... 뭐, 세경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담담하게 웃으며 통화를 이어가는 도훈.
결혼 뒤 아무리 피곤한 일이 있어도 퇴근 뒤 세경과 통화하는 일은 거르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세경과의 통화는 그의 정신적 피로를 푸는 회복제로 자리매김했으니까.
- 아, 오늘 아버님하고도 통화했어요.
“아버지요? 혹시 아버지가 전화하신 건가요?”
- 아뇨. 제가 안부가 궁금해 문안 전화를 드렸죠. 도훈 씨가 엊그제 엄마한테 전화를 드렸다면서요? 엄마가 사위는 그렇게 장모 열심히 챙기는 데 너도 아버님께 연락이라도 자주 드리라고 전화로 눈치를 주더라고요. 도훈 씨 생각보다 약았어요.
“하하.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 호호. 나도 알아요. 그냥 장난으로 해본 말이에요.
세경과의 정겨운 수다는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
대화가 너무 즐거워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도훈이 의도적으로 통화를 길게 끌어서.
- 쉬어요. 도훈 씨.
“네, 세경 씨도 쉬어요. 내일 또 연락하죠.”
뚝.
통화를 마친 도훈은 샤워하고 나온 뒤 주방 테이블에 앉았다.
새로 이사한 집은 역시 빌라였지만, 전보다는 한결 넓어서 주방에 버젓이 식탁을 놓을 수 있었다.
좀 더 넓은 방 두 개짜리 집을 구하려고 했었는데,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진주가 소개한 부동산 사장이 능력이 좋았는지 방 두 개에 작은 드레스룸까지 달린 빌라를 전세로 얻은 도훈.
“세경 씨랑 있을 땐 넉넉한 줄 모르겠던데, 역시 나 혼자 있으려니까 많이 넓네.”
전세금도 생각보다 더 나가긴 했지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라 좋았는데 집주인이 도훈을 알아본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사실, 전의 집주인은 대흥시에 살지 않고 정치에 일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들키지 않았던 것이지, 대흥시 시민이라면 알아보는 게 자연스러울 터였다.
아무튼, 도훈이 사는 동안은 시장이 사는 걸 절대 비밀로 하고 혹시라도 그게 알려지면 당장 이사를 하여도 아무 말 않기로 약속을 한 다음에 집을 계약했다.
“흐음.”
테이블 위에 놓인 물체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답답한 신음을 흘렸고, 저만치서 조상님이 말을 걸었다.
- 그렇게 꺼려지면 그냥 씹어라. 전화기 앞에 놓고 그게 무슨 청승이야?
“...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눈 딱 감고 씹든지, 담담하게 통화하면 될 일인데 뭐가 이렇게 꺼림칙한 것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훈은 지금 오정민에게 연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을 못 하고 고심하고 있었던 것.
- 네가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거 난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그냐 씹어. 내가 전에도 얘기했잖아. 오정민 그놈, 가까이할 놈이 아니라고.
“이미 가까이할 수 없는 사이가 됐습니다. 저도, 오 의원도 그걸 잘 알고요.”
- 그런데?
“그런데도 이렇게 잊을만하면 얼굴을 보거나 연락하는 게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럽니다.”
도훈의 자조 섞인 말에 조상님이 핀잔했다.
- 너나 그걸 어처구니없게 생각하지 오정민 그놈은 아닐 거다. 널 어떻게 써먹을지 그 생각뿐일걸?
“저를 써먹어요?”
- 너와 어떤 관계를 맺겠다는 게 아니고 걔한텐 네가 더 큰 영향력이나 자리를 얻기 위해 쓰는 ‘재료’로 보일 거란 말이다. 이를테면 제 마음대로 쓰고 싶은 꽤 좋은 포석이랄까?
“아, 예. 그런 뜻이셨군요.”
- 이미 몇 번이나 그런 시도를 했지만, 네가 간단히 이용당하지 않는 게 좀 당황스럽긴 했겠지. 그래서 더 큰 유혹을 느끼는 것일 테고.
오정민이 그런 시도를 했다는 걸 도훈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에게 걸어온 ‘수작’을 웃어넘긴 적도 있었고, 은밀하고 음흉한 암수에 모골이 송연해진 적도 있었다.
정치인을 좋아하지 않는 도훈이라지만, 강정문이나 김용진, 임지희 등의 경우를 보면 알 듯이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정민은 정치인이 아니라고 해도 구원이 없다고 해도 결코 가까이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도훈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난 어떻게든 그놈과의 인연에 매듭을 짓는 걸 추천한다. 하지만, 그게 지금 네 힘과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지.
“... 네.”
- 어쨌든, 난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더는 잔소리 안 하마.
“... 네.”
조상님이 조용해진 다음에도 한참이나 말없이 업무용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던 도훈이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 이제는 어떤 일로든 서로 연락하지 말자고 선을 확실히 그어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도훈이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는데···.
위이이잉.
“... 이 양반은 또 갑자기 왜···?”
저만치 옆에서 개인용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한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지사님.”
- 아, 김 시장.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죠?
“그럼요. 지사님은 어떠십니까?”
- 하하. 나야 물론 잘 지내죠. 그런데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지사님이라고 할 겁니까? 그냥 형님이라고 하라니까요. 그것도 아니면 처남이라고···.
“... 전화 끊을까요?”
- 아, 끊지 마요. 어허! 농담이에요, 농담!
강정문은 세경의 이모 아들.
그러니까 세경과 강정문은 서로 외가 쪽 사촌이고 따지자면 도훈에게 강정문은 손위 처남이 되는 셈이었다.
그 관계를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결혼 직후, 강정문이 도훈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하하. 이보게, 김 서방.
“......”
도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례임에는 분명했지만, 아무리 사적으로 손위 처남이라고 해도 도지사를 ‘형님’, ‘처남’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강정문과 도훈은 둘 다 현직 공직자여서, 언제 어디서든 사적인 관계보다 공적인 관계를 우선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곧 강정문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을 때, 처가댁의 사적인 모임 자리에서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자리가 아니고서는 절대 사적인 관계를 드러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었다.
- 하여간, 안 그래도 되는 부분까지 인간미 없이 꼼꼼하다니까요, 김 시장은?
“... 혹시라도 제가 이번에 재선에 실패하면 원 없이 형님이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아, 지사님이 실패하셔도 그럴 수 있겠네요. 둘 다 실패해도 그럴 수도 있겠고요. 안 그렇습니까?”
- 허허, 이 사람이. 안 그래도 내 선거 다가온다고 주변에서 다들 날카로운 소리만 하는데 김 시장까지 그러지는 마요.
강정문도 현직 광역자치단체장이니 대선에 일절 개입할 수 없었다.
지난번에 통화할 때 ‘국회의원 때가 좋았다느니 어쩌니’ 투정하던 걸 떠올린 도훈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지사님이 적당히 하시면 저도 이렇게까지는 안 합니다.”
- 알았어요, 알았어.
“그나저나 갑자기 어떤 일이십니까?”
- 뭐, 그냥 생각 나서 전화했어요.
“... 저더러 그걸 믿으라고요?”
- 하하. 못 믿을 건 또 뭡니까?
“선거 다가와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건 저보다 지사님이 열 배는 더하실 텐데요?”
- 뭐, 그렇긴 하지만요.
담담한 도훈의 말에 강정문도 스스럼없이 답했다.
“이제 본론을 꺼내보시죠.”
- 어휴. 정말, 정나미가 떨어지는 얘기만 하네요. 그러다가 나중에 나한테 크게 당할 겁니다. 나 엄연히 김 시장 손위 처남이라고요.
“당해야 할 때는 찍소리 안 하고 당해 드리겠습니다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쩝, 어쩔 수 없네.
곧, 강정문이 전화한 본론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중간쯤부터 놀라 휘둥그레 커진 도훈의 눈은 통화를 마칠 때까지도 그 상태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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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 객실.
호텔 객실이었지만, 내부에 있는 건 다섯 명의 남자.
전원이 정장 차림인 그들은 테이블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글쎄요. 솔직히 나도 당 대표실의 속내를 잘 모르겠습니다. 오 의원님은 우리 당 내부에서도 몇 안 되는 국민적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잖습니까.”
“그야 두말할 나위가 없죠.”
“우리 당 재선의원 중에 국민적 스타가 여럿이라는 건 맞고, 그분들이 더 열정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건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 의원님을 전국 지원유세단에서 배제하는 게 과연 쓸 카드가 충분하기 때문 ‘만’일까요?”
머리숱이 없어 앞이마가 휑한 남자의 말에,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장 의원님 말씀은 우리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까?”
“휴우.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를 보세요.”
“......”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현역의원은 저뿐입니다.”
“......”
“오 의원님에 회장님을 더하고 다른 회원들을 생각해도 우리 모임의 수도권 현역은 다섯에 불과합니다. 전국으로 넓혀도··· 초라하죠.”
“... 그렇죠.”
“이런 계파를, 대통령 선거 투표일이 코앞인 지금 굳이 견제해서 자극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남자의 말에 두어 사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가 말을 이었다.
“또 한 가지, 모임에 대한 견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게··· 정작 가장 중요한 회장님을 대상으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겁니다.”
“... 혹시 은밀히 추진하고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이렇게까지 조용히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중앙당 사무처에도 우리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런 낌새를 느낀 적이 없다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황 위원장님?”
“... 맞습니다. 제가 여러 사람에게 확인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답했고, 의원과 대화하던 남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이건 오 의원님 개인에게 국한된 거란 뜻입니까?”
“...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
“아니 왜요? 오 의원님이 무슨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더 영문을 모르겠고 답답하다는 겁니다. 듣기로는 오 의원님이 선선히 수긍하지 않자 당 대표님이 꽤 강경한 어조로 얘기하셨다는데···.”
“......”
테이블에 모여 앉아 굳어진 표정을 한 이들은 모두 여당 내 한 계파의 회원들이었다.
이 계파의 2인자가 다름 아닌 3선 현역의원 오정민.
남자들이 갑작스럽게 모여 회의하는 이유는 바로 그 오정민 의원에 대한 당 대표실의 어떤 조치 때문이었다.
말없이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 오 의원님은 아직도 의원회관에 계신 건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사자인 오정민은 당 대표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의원회관에서 민의당의 다른 의원을 접촉하는 중이었다.
당사자인 그가 도착해야 제대로 된 논의가 가능하므로 모두가 그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위이이잉!
의원의 핸드폰이 울렸고, 메시지를 확인한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 오 의원님 못 오실 것 같답니다. 대표님과 친한 의원을 몇 만나봤는데 그분들이 오히려 놀란 상황이라네요.”
“......”
“아무래도 오늘 회의는 못 할 것 같습니다.”
“... 일어나시죠.”
다섯 사람이 몸을 일으켜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
회의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호텔을 떠나는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거나 찌푸려진 상태.
그들의 기분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 구름 낀 밤하늘에서는 빛 한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