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좀 더 멀리 - 3.
장민호가 꺼낸 이야기를 두진에게 들려준 도훈.
“... 그 사람, 갑자기 미친 거 아니야?”
두진도 어이없어했다.
장민호가 공개적으로 ‘독자 후보’를 주장하고 다니는 데에는 도훈의 재선을 막겠다는 그 나름의 목표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몇 달 동안이나 그런 주장을 하고 키워나갔던 장본인이 갑자기 도훈을 찾아와 선거 때 ‘상부상조’하자고 말하다니.
설사, 도훈과 장민호가 같은 당 소속이라고 해도 가벼이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발언의 위험성은 둘째 치더라도 대리인도 아닌 장본인이 도훈과 단둘이 마주 앉아 아무 설명도 없이 대뜸 꺼낸다는 건 뭔가 ‘염치’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하질 않는가.
“일이나 하죠.”
“... 그러세.”
도훈의 기분이 무척 나쁜 걸 눈치챈 두진은 도훈을 따라 묵묵히 업무에 집중했다.
장민호가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훈의 눈치가 보여 그 사정이란 걸 알아볼 생각은 아예 하질 못했다.
그런데, 이런 두진의 의문은 오후 늦게 선본 일을 마치고 비서실에 나타난 영배에 의해 풀렸다.
“... 시장 지지도 여론조사?”
소파에 앉자마자 꺼낸 영배의 말에 도훈이 반문했다.
“응. 민의당 충남도당에서 대통령 후보 지지도 조사하는 김에 문제가 되는 지역 몇 곳을 꼽아서 은밀히 실시했다는데?”
“하는 중인 게 아니라 이미 조사를 해서 결과가 나왔다는 거야?”
“그렇대.”
영배의 말에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헛소문 아니야? 은밀히 했다며?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인호 씨한테 들었지.”
“차인호 씨?”
“그래. 그 친구 아직 OO 시 시의원하고 친하대. 그쪽을 통해 들었다는데? OO 시도 그 조사대상 지역이었대.”
“... 대흥시도?”
“그렇다더라.”
도훈과 두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잠시 서로 마주 보던 두 사람 중 두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군.”
“... 아마도요.”
“장 의원은 그 결과를 본 모양이야. 그래서 그렇게 다급해진 것일 테고.”
“... 그게 가장 그럴듯한 추측인 것 같습니다.”
“허허허. 수치화된 민심을 보니 똥줄이 바싹 탄 모양이로군.”
“......”
어떤 사안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의 지지도를 객관적으로 알아보는데 잘 짜인 여론조사만 한 것이 없다.
여론조사의 방식이나 문구에 따라 왜곡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래도 정치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단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을 터.
“갑자기 장민호 의원 얘기가 왜 나오는 겁니까, 실장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영배.
두진이 도훈을 바라봤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야, 나도···.”
도훈을 따라 일어나려던 영배를 두진이 말렸고, 도훈은 홀로 청사 밖으로 나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은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상부상조라.”
그 말을 꺼내던 장민호의 진지하고 간절한 표정을 떠올린 도훈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어렸다.
“말은 좋지.”
상부상조.
서로서로 돕는다는 말뜻은 좋았다.
시장과 시의회 의원이라는, 깨끗하고 효율적인 시정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관계의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하는 도훈이었다.
그러나, 지난 4년간 도훈은 장민호와 상부상조라는 걸 현실에서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하나뿐만이 아니다.
사퇴한 뒤 얼굴마저 가물가물한 양상택, 소송으로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미 정치인으로서 사망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는 서태기, 도대체 어떻게 공천을 받았는지 심히 의심이 가는 차혜진.
장민호도 그쪽에 가까우면 가까웠지 절대 다른 부류의 시의원이 아니었다.
“... 다른 사람들이 완전한 선의를 가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과 그런대로 잘 협력해 온 심남진이나 송지은, 손발이 맞는 걸 떠나서 마음도 잘 맞았던 신길영과 안준식 등도 선의로 ‘만’ 시의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도훈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개인이든 소속 집단이든 노리는 ‘이익’과 ‘공익’ 사이에서 선을 지킬 줄 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게 기본이지.”
도훈 본인도 ‘시민에게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만’ 시장을 해왔고 다시 하려는 게 아니었다.
분명, 도훈에게도 월급을 받거나 명예를 얻는 등의 개인적 이익이 되는 부분이 있었고 그것이 만족스러웠기에 직무에 열성을 다했던 것.
하지만, 행정을 통해 시민 복지의 증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를 만들어냄으로써 얻는 만족감은 더 컸다.
그랬기에, 아무리 큰 개인적인 이익이라고 해도 그 공적 영역의 만족감을 해칠 수 있는 건 일절 돌아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4년간의 장민호 의원의 행보와 오늘 그의 제안에 전혀 호감은커녕 일말의 공감조차 가지 않았다.
위이이잉!
“... 어, 왜?”
- 담배 다 피웠으면 얼른 올라와. 아직 날도 쌀쌀한데 홀로 무슨 청승이냐?
“... 금방 올라갈게.”
- 그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끈 도훈이 청사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앞으로는 장 의원이랑 단둘이서 만나는 건 절대 지양해야겠네.’
청사에 들어서는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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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첫 수요일 늦은 오후 퇴근이 가까운 시각.
오늘은 웬일로 업무가 일찍 끝나 도훈을 비롯한 비서실 직원 모두가 비서실 소파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직원들이 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도훈은 가만히 듣는 가운데, 영배가 장민호의 얘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장 의원 생각 외로 잠잠하지 않습니까, 실장님?”
“그러게. 그 날 나갈 때는 당장에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듯한 분위기였는데 말이지.”
일요일, 도훈과 장민호 사이에 있었던 일은 비서실 직원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혹시나 장민호가 또 그런 대화를 하길 원할지도 모르고, 반대로 악감정에 기인한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으니 도훈과 두진이 상의해 모두에게 알리고 주의를 시킨 것이었다.
물론, 외부에는 절대 알리지 말라는 두진의 엄명도 같이 내려졌는데, 다행히 도훈의 비서실 직원들은 외부 소식은 잘 알아와도 비서실과 시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외부에 흘리는 적이 없었다.
임기 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랬기에 두진이 이것도 인복이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아마 여론조사 결과가 시장님께 너무 좋아서가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지연의 말에 두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민의당이 은밀히 여론조사를 했다는 얘기는 소문이 되어 꽤 널리 퍼졌다.
적어도 시청과 시의회 직원 및 관련자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만, 여론조사 결과가 서로 다른 버전이 여럿 돌아다녔는데 어떤 게 진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일부 진짜가 뭔지를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걸 확인해주지도 않았고.
물론, 거의 모든 버전의 조사 결과에서 시장 후보로 도훈의 지지도가 1등이라는 건 똑같이 언급되고 있었다.
“시장님, 정말로 여론조사 결과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 몇 번을 물어보는 겁니까, 도대체? 그리고 몇 번을 안 궁금하다고 대답해야 포기할래요?”
영배의 질문에 심드렁하게 답한 도훈.
영배의 말은 그냥 질문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김용진 의원이나 강정문 도지사를 통해 여론조사의 진짜 결과를 알아보는 게 어떠냐는 부추김이기도 했다.
일요일부터 꼭 잊을만하면 저 질문을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도훈은 아주 짧게 ‘아니요’라고 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배가 대표로 나선 것일 뿐 지연이나 홍영진도 여론조사의 진짜 결과를 궁금해했고, 이는 진주나 선아, 세경은 물론 팬카페 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두진도 말은 안 하지만 그런 기색을 내비친 적이 있을 정도.
“휴우. 그냥 궁금해서 이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현재 우리의 객관적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까 이러는 거라고요. 저만 그러는 게 아니라 선본 사람들도 다 동의···.”
투덜거리던 영배가 아치 싶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업무시간에 그것도 다른 직원들이 있을 때는 ‘선본’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말라고 지시한 도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으니까.
영배를 쏘아보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 자꾸 그렇게 긴장 놓고 있다가는 저 사퇴하기 전에 해고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 쩝. 알겠습니다.”
담담하지만, 그래서 더 진심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말.
영배는 찔끔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시장님, 장 의원 제안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건가요?”
지연이 난처해진 영배를 도우려는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도훈은 대꾸하지 않고 담담히 지연을 바라봤고, 지연이 얼른 부연했다.
“이건 그냥 제 좁은 소견일 뿐인데요. 장 의원이 정말로 독자 후보 요구를 접고 당원들도 설득하면, 시장님이 민의당과 공식적으로 연대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그건 당선 확률을 확 높이는 방법 아닐까요?”
도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공식적으로 연대하면 당선 확률을 크게 놓일 수 있긴 할 겁니다.”
“그렇죠?”
“네. 하지만, 그를 위해 제가 장민호 의원 개인의 당선을 위해 나서는 건 그야말로 소탐대실이에요.”
“......”
일요일 이후, 아무도 묻지 않았던 내용이었기에 다들 도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제가 장민호 의원의 정견이나 지난 4년의 의정활동에 조금이라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아무리 급해도 시의원이 시장에게 해도 될 말이 있고 안될 말이 있습니다.”
“... 그건 그렇죠.”
선거는 민심의 선택을 받는 과정이다.
초선도 아닌 재선에 도전하는 사람에게는 선택 이전에 ‘평가’의 의미도 있다.
아무리 기초의원의 인지도가 낮다지만, 대흥시만 놓고 봐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안준식도 그렇고 신길영도 그렇고 최소한 자기 선거구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고 평가도 좋았다.
좋지 못한 평으로 시 전역은 물론 인근 지역에도 유명한 차혜진은 좀 예외라고 해야겠지만, 심남진이나 송지은도 시민들과 좀 더 자주 만나고 성과를 내려 노력했다.
발로 뛰는 걸 싫어하고 목에 힘주는 자리나 찾아다니며 시민에게 봉사한다는 자세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장민호는 도훈이 인정하는 다른 이들과 아주 결이 달랐다.
아무리 도훈 자신의 재선도 중요하다지만, 재선 확률을 높이기 위해 그런 사람의 당선을 위해 협조한다?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무엇보다도···.”
도훈이 잠시 말을 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장 의원이 제가 사는 운계면 선거구 의원인데요.”
“아, 그렇죠.”
“저는 그분한테 투표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투표할 생각이 없어요.”
“... 아.”
“저 자신도 지지할 마음이 안 드는데 어떻게 당선을 위해서 노력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거 안 하렵니다.”
담담한 도훈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진이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부연했다.
“그게 당장도 옳지만, 좀 더 멀리 봤을 때도 옳은 거라네. 이런 정도의 어려움에도 타협하면, 더 큰 어려움에 부닥치면 어떻게 극복하겠나? 시냇물에도 흔들리면서 대양을 꿈꿀 수는 없는 법이야.”
“......”
도훈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두진을 향했다.
“... 왜들 그렇게 봐?”
“방금 말씀 되게 있어 보였거든요. 아니 멋있었어요, 실장님.”
“하하, 그랬나?”
“네. 그 시냇물 얘기 누가 한 건가요?”
“그냥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걸 말한 것뿐이라네. 어디서 들은 걸 수도 있는데 기억은 안 나는군.”
“와, 어디에다 등록이라도 해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지연의 너스레에 영배가 맞장구치고 두진이 쓰게 웃던 그 순간.
위이이잉.
핸드폰이 울려 품에서 꺼내 액정을 본 도훈이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였기 때문.
- 시간 괜찮을 때 통화를 좀 했으면 하는데, 언제가 좋겠습니까?
도훈이 전화번호를 저장해 놓지 않았을 걸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마지막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 메시지.
- ... 나 오정민입니다.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의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