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누구냐, 너 - 2.
도훈이 ‘더’ 똑똑해졌다는 건 금세 시청 내에 소문이 되어 퍼졌다.
원래도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도훈이었기에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 좀 있다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직원들의 ‘목격담’이 쏟아진 다음.
“아, 우리 팀 회의하는 데 내내 듣고만 계시다가 갑자기 불쑥 끼어드시는 거야.”
“어떻게?”
“계장님이 설명하시다가 근거자료 수치를 못 찾으시니까 시장님이 그걸 그대로 읊으신 거지. 숫자로만 된 거의 A4 반 페이지 분량의 내용이었는데, 그걸 숫자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말씀하셨다니까?”
“정말로?”
“응! 마침 내가 계장님에게 그 자료 보여드리려고 들고 있었거든. 정말로 하나도 안 틀리고 인용하셨어.”
“후와. 대단하네.”
당일 회의자료를 보지도 않고 줄줄 읊더라는 건 기본.
“남 주무관이 발제하는데 시장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예전에 우리 시청에서 이거랑 비슷한 사업 시도했다가 자진 철회한 적 있는데 그건 검토해 봤냐고요.”
“그래? 자네들은 몰랐어?”
“몰랐죠. 알고 보니 9년 전 일이더라고요. 그땐 저나 남 주무관이나 공무원 되기도 전이었어요.”
“허허. 시장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대?”
“취임하기 전에 공부하다가 보신 적이 있대요. 그런데 그냥 기억하시는 게 아니라 거의 사업계획서와 평가서를 암기하고 계신 수준이더라고요. 저나 남 주무관이나 회의 끝나고 시장님이 알려주신 사업계획서랑 평가서 검토하다가 깜짝 놀랐잖아요. 시장님 말씀하신 내용이 거의 그대로 적혀 있어서요.”
“와, 무슨 서류를 복사해서 머릿속에 저장이라도 하시는 거야?”
3년 반 전에 공부한 것을 여전히 완벽하게 기억한다는 혀를 내두르게 하는 사실.
“사업계획서 올라가고 10분 만에 답이 왔거든? 그런데 세부계획에서 법률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지 뭐야?”
“어머! 그래서요?”
“지적받은 부분을 찾아봤지. 그런데 정말이더라고. 우리가 계획한 방법의 하나가 위험물안전관리법 시행령에 걸리더라고. 나도 몰랐고 팀원들도 몰랐고 팀장님조차 모르고 넘어갔는데 말이야.”
“시장님이 찾아내신 거래요?”
“당연하지. 팀장님에게 이메일 보낸 게 시장님 본인인데.”
“... 와. 시장님 그쪽 전문가도 아니신데···.”
“그러니까. 내가 도시주택과에만 5년짼데 할 말이 없더라니까?”
담당자, 담당 팀, 담당 팀장이 사업계획서를 완성해 시장실에 보낼 때까지 파악하지 못한 오류를 족집게처럼 한 번에 찾아내기도 했다.
목격담은 도훈이 직원들과 회의를 하면 할수록 늘어났고, 엄청난 기억력뿐만 아니라 문제의 핵심을 콕 짚어내는 등 다양한 사례가 직원들 사이에 회자 됐다.
결국, 소문과 목격담은 이런 결론으로 이어졌다.
- 시장님의 천재성이 폭발했다.
이런 얘기는 당연하게도 장본인도 알고 있었다.
“들었냐?”
“... 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청사 옆 자판기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도훈.
자신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영배를 향해 심드렁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네 컴퓨터가 업그레이드됐다는 얘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머리 좋고 일 잘한다고 널 컴퓨터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좀 있었거든.”
“... 컴퓨터?”
“그래. 컴퓨터. 컴퓨터와 같은 두뇌를 가졌다는 그런 뜻이었다지.”
“......”
“그런데 요즘에 그 컴퓨터가 업그레이드됐다고 표현하더라고.”
“... 후우.”
도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었다.
좋아진 건 단순히 기억력만이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 문제의 핵심을 잡아내는 능력 등이 몰라보게 좋아졌다는 건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기도 모르게 이런저런 회의에서 그 능력을 보인 것도 사실.
하지만, 요즘엔 그러지 않기 위해 극도로 노력하고 있었다.
바로 저런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서.
“......”
“... 왜?”
미간을 살짝 찌푸린 도훈이 말없이 바라보자 영배가 물었고 도훈이 푸념하듯 답했다.
“... 또 이상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거든, 형이.”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휴우.”
“... 하, 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서 말이지.”
머쓱한 표정으로 변명하는 영배.
아무리 오래 본 절친이라도 신기하긴 신기할 터였다.
아니, 오래 봤으니 더 그럴 수도 있었다.
도훈이 똑똑하고 머리가 좋았다고는 해도 이해가 가는 수준이었는데 별다른 계기도 없이 갑자기 훨씬 더 머리가 좋아졌으니까.
머릿속 컴퓨터 어쩌고 김도훈의 탈을 쓴 외계인 어쩌고 하는 말은 장난이겠지만, 저절로 드는 신기한 마음 까지 어쩔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런 마음이 깃든 이상한 눈빛을 받는 도훈은 기분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시간 지나면 잠잠해지겠지.’
- 하하, 그럴 테지.
‘......’
-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야. 잊거나 희미해지는 게 당연한 거지. 하하하.
‘......’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능청스런 말로 끼어든 조상님.
하지만, 도훈은 그를 살짝 째려보기만 할 뿐, 일절 대꾸하지 않았다.
“갑시다, 형.”
“응.”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도훈이 걸음을 옮겼고 영배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머쓱한 표정의 조상님도 뒤를 따랐다.
- 자식이 감히 조상님 말씀하시는 데 대꾸도 안 하고···. 도대체 언제까지 삐져있을 거야?
조상님이 도훈에게 다 들리게 투덜거렸지만, 도훈은 여전히 대꾸도 안 했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 쩝. 이거 천고에 다시 없을 귀한 힘을 선물로 줘놓고도 이런 신세라니···. 에휴.
조상님의 푸념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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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대흥시 운계면의 한 카페.
홀이 아닌 작은 세미나실 형태의 방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도훈, 두진, 영배에 팬카페 회장인 혜란과 차인호까지 모두 다섯 사람.
다들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인데 반해 도훈은 뭔가 마뜩잖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 빨리 끝내고 가죠.”
“어머? 김 시장. 김도훈 시장의 재선을 준비하는 선거운동본부의 역사적인 첫 모임인데 뭐가 그리 급하니?”
혜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대한민국이 대선으로 시끌벅적한 상황에 정중동의 일상을 유지하는 도훈이라지만, 그 자신의 향후 4년이 걸린 지방선거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집에 새색시가 와 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이래 봬도 결혼 한 달밖에 안 된 따끈따끈한 새신랑 아닙니까? 캬! 좋을 때다.”
“......”
말없이 영배를 쏘아보는 도훈이었지만, 딱히 부정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금요일인 어제저녁 늦게 세경이 온 게 사실이었으니까.
“호호! 새신랑이랑 새신부가 뭘 하려고 그렇게 서두르는 걸까? 선거운동본부 논의보다 더 중요한 거라도 있는 거야?”
혜란이 짓궂게 묻자 도훈이 담담히 답했다.
“엉뚱한 상상은 하지 마세요. 저 이사하기로 한 것 때문에 집 보러 가야 하거든요.”
“아, 그래?”
“네.”
꼭 ‘집’ 때문에 일찍 가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담담한 표정으로 일절 내색하지 않는 도훈.
“이거 그런 줄도 모르고 꼭 오늘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네요. 죄송합니다, 시장님.”
“아닙니다, 인호 씨. 한번 미리 정리할 필요가 있긴 했어요.”
미안해하는 차인호에게 웃으며 답해 준 도훈.
“정리라니? 뭘 말인가?”
“우리가 선거를 준비하는 원칙 같은 거랄까요? 아직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하기까지는 여유가 좀 있으니 미리 짚어놓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했습니다.”
“음, 일리 있는 말이로구먼.”
두진이 공감을 표했고 차인호가 말을 이었다.
“시장님이 생각을 정리하신 게 있는 것 같은데, 먼저 말씀하시죠.”
“그럴까요? 먼저 이건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게 아니라 ‘그랬으면 좋겠다’는 수준의 제 희망이라는 걸 고려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생각이 시장님과 다르면 바뀔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네. 제 생각이 꼭 옳다는 법이 없잖습니까. 토론해볼 필요가 있겠죠. 제 생각을 고집할 마음은 없습니다. 뭐, 거창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요.”
그렇게 전제를 한 도훈이 말을 이었다.
“저는 지난 선거 때처럼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도훈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지만, 도훈은 말이 없었다.
“뭐야? 설마 그게 끝이야?”
“어.”
“엥? 진짜로?”
“그렇다니까.”
“......”
담담한 도훈에 반해 모두가 살짝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왜? 그때보다는 형편이 나아진···.”
“형편이 나아지긴 뭐가 나아져?”
심드렁한 도훈의 말에 영배가 잠깐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 안 나아진 건 또 뭐야? 네가 현직 시장인데.”
자부심까지 내비치며 말하는 영배.
다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훈은 차분히 반론하기 시작했다.
“나 선거운동에 돈 많이 못 써. 이번에 집 넓히고 나면 지난번이랑 별로 달라질 게 없어. 아니지. 지난번에는 전세를 잠깐 월세로 돌릴 수라도 있었지만, 이번엔 그것도 안 돼. 후보등록 기탁금 제하면 지난번과 비슷할걸?”
“... 맙소사.”
지난번 선거운동이 어떠했는지 잘 아는 영배 말고는 다들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지난번에 선거운동을 어떻게 했길래 그래?”
“그러게. 좀 검소하게 하긴 했지만, 자네가 맙소사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휴우. 그게 말이죠···.”
혜란과 두진의 질문에 영배가 한숨을 내쉬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빌리고 유인물 인쇄를 맡기고 이동용 자전거와 확성기 등을 갖추고 선거보조인력 몇 명을 고용하고 나니 자금이 똑 떨어졌다는 얘기.
검소하게 하려고 해서 선거운동이 검소했던 게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 그때 김 시장이 집에다 라면 하나 사다 놓을 돈이 없을 정도로 쪼들리며 선거를 마쳤습니다.”
“... 진짜?”
“네. 하하.”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다는 듯 웃는 영배.
그런 영배를 바라보며 씩 웃은 도훈이 말을 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떻게 그랬나 형도 황당하지?”
“말도 마라. 투표 다음 날 진주가 아니었으면 해장도 못 했을걸?”
“큭. 그랬었지.”
웃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다들 잠시 말문을 잃은 가운데, 도훈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처럼 쫄쫄 굶으면서까지 치르자는 게 아니고 검소하게, 신인의 자세로 선거운동을 하자는 겁니다.”
“... 신인의 자세라고요?”
“네. 차량 같은 걸 동원하기보다는 차라리 운동원을 늘려서 거리에서 더 많은 시민과 직접 접촉하는 그런 방식으로요.”
“......”
도훈의 말은 예전 한우리 기획의 제안서나 차인호가 만든 기획서의 내용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도훈에게 ‘완숙한 행정가’의 면모를 보일 것을 권했으니까.
그런 주장의 근거가 된 것은 ‘실적’.
실적이 없는 사람이 그런 태도를 보이면 비난밖에 받을 게 없겠지만, 도훈은 시민 다수가 인정할 정도로 건실하게 시정을 펼쳤으니까.
더군다나 도훈은 ‘재선’에 도전하는 것이질 않은가.
“시민들이 저를 왜 지지할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 그런데요?”
“성과고 뭐고를 떠나서 일단 젊고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점, 어떤 사안이 됐든 기획 단계에서부터 널리 의견을 구하고 취합하려 하는 점, 진행 과정에서도 확인하고 또 확인해 실수를 줄이려고 하는 점 등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아, 자리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시민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것도 포함해서요.”
“... 흐음.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그런데 그게 다 능숙한 행정가의 모습보다는 신참이 겸허하게 발로 뛰는 모습에 가깝더라는 말이죠.”
“......”
“무엇보다 제가 완숙한 행정가라고 저 자신을 선전하는 게 어색합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그런 느낌이랄까요?”
“......”
도훈의 말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기에 다들 생각에 잠겼다.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 도훈을 보고 ‘시장이 저렇게 젊다고?’ 하고 처음 놀란다.
그다음으로는 그렇게 젊은 초짜 시장이 별다른 실수 없이 시정을 무난하게 이끈다는 것에 또 놀라고, 무난한 수준이 아닌 성과도 견실하게 내고 있다는 걸 알고는 다시 한 번 놀란다.
지금은 대흥시민 대다수가 도훈이 시장이라는 걸 알고, 그가 참신하고 청렴하며 능력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훈은 그런 자신의 이미지 중 ‘참신함’을 아직 놓을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가 재선에 성공한다고 해서 제 스타일이 변하지도 않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완숙한 행정가?”
“......”
“뭔가 좀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끄덕, 끄덕.
시간 차이는 있었지만, 도훈의 질문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공감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찬성입니다.”
“나도 찬성.”
“... 나도 찬성이네.”
“나 역시.”
마지막으로 말한 영배가 도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언제 그런 생각을 한 거냐? 전에는 그 기획서들 보면서 이대로만 하면 되겠네 하더니.”
“오늘 이 회의하기로 하고 차분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흐음. 아무래도 수상해.”
“... 뭐가 또 수상해?”
“정말 외계인이 김도훈의 탈을 쓴 게 아닌가 싶단 말이지.”
“......”
“그래서 묻는 건데, 누구야, 너··· 억! 컥!”
영배가 캑캑거리는 건 도훈이 자기 앞에 놓였던 냅킨을 구겨 던진 게 우연히도 입에 쏙 들어갔기 때문.
“한 번만 더 그 얘기해 봐. 다음엔 휴지가 아니라 다른 거로 입을 막아버릴 테니까.”
“... 쩝. 알았어.”
“하하하!”
“호호!”
으르렁거리는 도훈과 머쓱하게 답하는 영배의 모습에 모두가 웃었다.
그렇게 도훈도 슬슬 선거운동 준비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