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57화 (258/279)

257. 운명의 그 날 - 2.

아버지의 ‘훈계’ 혹은 ‘잔소리’ 공격에 내내 시달리면서도 운전에 집중한 도훈의 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10시도 안 된 시각.

10시도 안 됐다기보다는 9시를 조금 넘었다는 게 더 정확한 그런 시각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크리스마스치고는 도로 사정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잔소리에서 단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도훈이 자꾸 가속 페달을 힘주어 밟은 결과였다.

그런데, 이심전심 혹은 자식 결혼시키는 당일 날 아침의 부모 마음은 비슷하다고나 할까.

결혼식이 열릴 예정인 레스토랑에는 이미 세경과 그녀의 어머니도 도착해 있었다.

“아니, 자네 벌써 왔나?”

차에서 내리는 도훈을 보고 레스토랑에서 반가운 얼굴을 하고 달려 나온 세경의 어머니.

그런 세경의 어머니와 먼저 인사한 것은 도훈이 아니라 냉큼 조수석에서 내린 도훈의 아버지였다.

“아이고, 벌써 오셨네요. 어허허!”

“아! 안녕하세요. 사돈.”

“사, 사돈? 어, 허허! 그렇죠. 제가 사돈이죠? 날이 참 좋지 않습니까? 어허허허!”

‘사돈’이란 단어에 새삼스럽게 감격이라도 한 것인지 너털웃음을 웃는 도훈의 아버지.

도훈은 가만히 세경의 어머니에게 묵례했고, 어느새 세경도 달려 나와 도훈의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두 어르신은 그런 도훈과 세경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다시 자신들의 대화를 이어갔다.

“12월 말치고는 날도 푸근한 편이고 바람도 없네요. 이 정도면 정말 좋은 날씨죠. 안 그렇습니까, 사돈?”

“사돈께서 고르신 날 아닙니까? 이게 다 사돈의 혜안 덕분입니다.”

“호호. 혜안이랄 것은 없죠. 사돈도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

“......”

‘사돈’이란 호칭으로 부르고 불리는 걸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두 어르신의 모습에 도훈과 세경은 말문을 잃었다.

더군다나 12월 말치고는 추운 날씨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하늘은 구름이 가득 낀 우중충하고 흐린 빛을 띠고 있었기에 ‘좋은 날’이라는 말이 좀 듣기에 민망했다.

하지만, 두 어르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 들어가실까요, 사돈? 아직 시간 여유가 있고 여기가 명색이 레스토랑이니 커피 한 잔 마시며 이야기 더 나누시지요.”

“하하. 그럴까요? 오늘따라 커피가 정말 맛있을 것 같습니다, 사돈.”

두 어르신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고 자리에 남은 도훈과 세경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후우.”

한숨을 내쉬고 머쓱한 미소를 머금은 두 사람이 그제야 대화를 시작했다.

“어째 우리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하시는 것 같지 않아요, 세경 씨?”

“호호. 그러게 말이에요. 엄마가 아침부터 어찌나 일찍 가자고 성화를 부리셨는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 엄마만 그런 게 아니라 아버님도 비슷하셨던 모양이네요?”

“네. 말도 마세요. 7시도 안 돼서 제집에 쳐들어오셔서는 빨리빨리 하라고 어찌나 등을 떠미시는지···. 여기 오는 내내 잔소리는 또···. 어휴, 아무리 봐도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호호호!”

소리 내어 웃는 세경의 얼굴에 도훈이 시선이 닿았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도훈.

세경이 잠시 그런 도훈과 눈빛을 교환하다 얼굴을 붉혔다.

“... 왜 그렇게 봐요?”

“... 예뻐서요.”

“... 도훈 씨도 참 별말을···.”

“별말이 아니라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은 더 예뻐요.”

“... 정말로요?”

“네. 정말로요.”

세경의 발그스름한 볼이 더욱 붉어지더니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고 여전히 그런 세경에게 시선을 고정한 도훈이 담담히 웃고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왈! 왈왈!

“아, 순심이.”

차 뒷자리에 여전히 순심이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도훈이 얼른 가서 순심이를 데리고 왔고, 세경이 도훈에게서 순심이를 빼앗아 안고는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들어가서 커피 마셔요. 여기 커피 나쁘지 않아요.”

“그러죠.”

도훈과 세경이 나란히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박박. 박박!

- 어우, 가려워. 소름에, 닭살에···. 하여간 애나 어른이나···.

주차장에 홀로 남은 조상님이 허공에서 팔을 긁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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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한 하객이 레스토랑을 꽉 채운 가운데, 결혼식은 예정대로 1시에 시작됐다.

- 여러분,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하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짝!

도훈과 세경의 친구들이 환호하며 분위기를 띄웠고 이에 뒤따르는 하객들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예복과 드레스를 입은 도훈과 세경이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조카 멋있다!”

“내 조카는 정말 예쁘다!”

“하하하!”

성격이 쾌활한 도훈의 당숙이 외치자 세경의 작은아버지가 응수했고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도훈과 세경이 실내 한쪽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된 테이블에 앉자, 사회를 맡은 영배가 하객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 결혼식을 반대하시는 분은 지금 거수해 뜻을 밝혀주시거나 아니면 영원히 닥쳐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계신가요? 아, 혹시 계시더라도 심사숙고하고 손을 드시기 바랍니다. 지금 저쪽에서 신랑 아버님과 신부 어머님이 도끼눈을 하고 계시거든요.

“하하하하!”

장난으로 손을 들려던 세경의 친구가 도훈의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는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고, 하객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영배가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진행을 계속했다.

- 앞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오늘 결혼식에 주례 선생님은 모시지 않았습니다. 신랑, 신부와 친분이 깊은 주례 선생님이 좋은 말씀 해주시는 것도 좋겠지만, 두 사람과 더 가까운 인연인 사람들이 소박하게나마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여긴 때문입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축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첫 순서는, 신랑 김도훈 군의 아버님이십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세요.

짝짝짝짝짝!

도훈의 아버지가 앞으로 나와 영배가 섰던 자리에 섰다.

감개가 무량하다는 표정으로 살짝 얼굴이 상기된 도훈의 아버지는 도훈과 세경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뗐다.

-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이 있지요. 제가 그 말을 실감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야 실감합니다. 제 아들 도훈이랑 며느리 세경 양의 저 모습을 사진기로 찍어 크게 인화해 집에 걸어놓으면 식비도 아끼고 다이어트도 자연스럽게 될 것 같습니다. 기분도 매일매일 좋을 것 같고요.

“하하하!”

한바탕 좌중을 웃게 한 도훈의 아버지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 먼저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을 해야겠지요. 결혼은, 다른 걸 다 떠나서 인생을 함께 걸을 동반자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큰 축하를 받을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도훈 아버지의 ‘덕담’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은데, 굳이 말까지 길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덕담의 마지막, 축하 말을 끝내려던 도훈의 아버지가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 이제 저도 먼저 간 와이프한테 할 말이 생겼습니다. 분명 그 사람이 저보다 훨씬 더 기뻐하고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럴 겁니다.

도훈은 어머니가, 세경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

도훈의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으로 세경의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으로, 엄마와 아빠가 없이 아이를 키우며 갖은 고생과 노력을 했다.

하객 중 그런 두 사람의 형편을 모르는 이가 없어 장내가 잠시 숙연해졌고, 이심전심인 세경의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잠시 침묵하던 도훈의 아버지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 그래도 산 넘어 산이랄까요? 험준한 산 하나를 넘고 나니, 또 다른 산이 보입니다. 저한테는 시집 보내야 하는 딸도 하나 있거든요. 부디 이 자리를 빌려 부탁하는데, 아비가 제발 결혼하라고 귀에 못 박히도록 잔소리하지 않게끔 미리미리 알아서 잘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친구들, 아무리 부모한테라도 잔소리 듣는 거 좋아하지 않겠습니다만, 나이 든 부모도 잔소리하기 정말 싫거든요.

“하하하하하!”

도훈 아버지의 의도는 다행히 먹혀 하객들이 소리 내어 웃으며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도훈 아버지가 인사말을 마무리하고 내려가자 그 자리에 선 것은 세경의 어머니.

- ... 흑.

마이크 앞에 서고도 얼마간 말을 잇지 못하던 세경의 어머니는 기어코 눈물을 다시 쏟고 말았다.

영배가 다가가 손수건을 건네고 세경의 작은아버지가 다가가 위로해도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그녀.

결국, 도훈과 세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엄마, 좋은 날이라면서 왜 울어.”

자기도 눈물을 참느라 코끝이 빨개진 세경이 다독였고, 도훈은 말없이 장모의 등을 토닥였다.

“... 그, 그러게 말이다. 주책없이···.”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세경 어머니가 입을 열었고, 도훈이 가만히 속삭였다.

“장모님 마음 모두가 이해할 겁니다. 흉볼 사람 아무도 없어요.”

“... 그, 그런가?”

“당연하죠.”

딸의 위로와 도훈의 다정한 미소에 세경 어머니는 곧 눈물을 그치고 마이크를 잡았다.

- 오늘같이 기쁘고 좋은 날, 괜한 주책을 보였습니다.

“괜찮습니다!”

짝짝짝짝짝!

저만치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자 하객들이 동감이라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아직 눈가가 붉은 얼굴로 담담히 미소 짓고 난 세경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 우리 사위 어머님께서 좋아하실 거라는 말씀처럼, 저승에서 세경이 아빠도 정말 좋아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 그 사람 앞에서 면이 서는 기분이네요. 주책없는 장모도 다정히 위로해 주는 사위를 보니 우리 세경이도 그렇게 아껴줄 것 같아 더 마음이 놓입니다. 우리 딸이 겉으로는 이렇게 얌전해 보여도 푼수 같은 면이 좀 있거든요.

“하하하!”

“호호호호!”

세경 어머니의 담담한 말에 하객들의 폭소가 터졌다.

- 두 사람이 함께하는 앞날에 항상 행복한 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함께 노력해서 오늘처럼 모두가 웃는 그런 날을 더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따스한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결혼식이 차분히 진행되고 있었다.

신랑 신부 부모님의 덕담에 이어 두 사람의 친척 대표와 친구 대표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친척 대표들은 의례 하는 덕담을 건네는 것으로 끝냈지만,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훈의 친구 대표로 나선 진주는 한때 도훈이 고자가 된 게 아닌지 정말 걱정했다며 농담을 건넸고, 세경의 친구 대표로 나선 한 남자는 대학 때 ‘철벽’이었던 세경을 도대체 어떤 남자가 채갈까 궁금했는데 신랑을 보니 세경의 취향이 참 ‘독특’하다며 좌중을 웃겼다.

아무튼, 그렇게 축하 말을 다 듣고 당사자의 소감을 듣는 시간이 됐다.

도훈은 시장으로서도 연설이 짧기로 유명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

- 잘 살겠습니다.

- 더 행복하도록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도훈에 이어 세경의 짧은 말로 모든 식순이 끝났다.

아니, 끝나야 했다.

- 음. 원래 식순에는 없는 겁니다만, 사회자 재량으로 긴급히 하나를 추가하려고 합니다.

움찔.

갑작스러운 영배의 말에 반응한 도훈.

불길한 예감에 도훈이 영배를 향해 서릿발 같은 눈빛을 쏘아 보냈지만, 영배는 이를 간단히 외면했다.

- 아마 많은 분이 아실 겁니다. 우리 신랑님이 결혼식 축가 불러서 제법 화제가 됐다는 사실을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네!”

“맞아요!”

“한 번 들어봅시다!”

하객들이 호응했고, 영배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 자! 우리 신랑님, 자축의 노래를 들어볼까 합니다. 박수!

짝짝짝짝짝!

하객들이 박수를 쳤고, 영배가 다가와 마이크를 도훈에게 건넸다.

“... 두고 보자, 형.”

“하하! 오냐, 많이 두고 보자.”

간단히 도훈의 으르렁거림을 격퇴한 영배가 멀어졌고, 도훈이 난감해하는데 세경이 속삭였다.

“그냥 눈 딱 감고 불러요. 좋은 날이잖아요.”

“... 하하. 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자, 스피커에서 반주가 흘러나왔다.

‘긴급히’ 추가된 게 아니라 이미 다 계획하고 있었다는 얘기.

뭐, 그걸 깨달았다고 해봤자 이미 반주가 흘러나오고 있고 마이크까지 들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도훈이 눈을 감고는 마이크를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렸다.

-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이.

“오오오!”

노래를 듣는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 가운데, 저만치 허공에 떠서 노래하는 도훈과 도훈을 향해 사랑스러운 눈빛을 뿜어내는 세경을 바라보는 조상님의 입가에도 의미심장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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