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운명의 그 날 - 1.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됐다.
11월에 갑작스럽게 기온이 내려가며 매우 추웠던 것과는 반대로, 12월 초에는 겨울치고는 푸근한 날씨가 이어졌다.
영하로 내려가지 않은 날씨 덕분에 눈이 아닌 비가 오기도 했다.
겨울다운 겨울이 된 건 12월 중순에 접어든 다음이어서 첫눈은 크리스마스 전전날 처음으로 내렸다.
“제법 쌓이겠는데? 눈 내린다는 예보는 없더니 갑자기 쏟아지네.”
“작년에는 잘 맞추더니 올해는 시작부터 헛방이네.”
시장실 창가에서 중얼거리는 도훈과 영배.
작년 겨울에 예년보다 눈이 많이 올 거라는 기상청 예보가 맞아떨어졌던 것과는 달리, 올해는 예보에도 없던 첫눈을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영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올해도 제설제 많이 사 놓기를 잘한 거겠지?”
“재난대응은 과한 게 모자란 것보다 낫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
“들어봤지. 나도 공감하고.”
대흥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많은 양의 제설제를 비축했다.
제설제 비축으로 끝난 게 아니라 장비도 좀 보충했고, ‘자기 집 앞 눈 치우기’ 등의 홍보도 적극적으로 했다.
눈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올 때마다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길에 쌓인 눈까지 공무원을 동원할 수는 없는 일.
‘함께 사는 사회’라는 말은 거창한 구호나 정책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구호로 꽤 열심히 시민을 설득하고 홍보했으니 이제 그 결과를 기다려 볼 일이었다.
“토요일 준비는 잘 돼가냐?”
“난 준비할 게 없지. 식당에서 알아서 다 해줄 텐데. 세경 씨도 마찬가지일 걸?”
“... 부럽다.”
“별걸 다 부러워하고 있네.”
“인마. 네가 과정, 절차 다 거쳐서 예식장에서 하는 결혼식을 안 해 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그거 얼마나 스트레스인 줄 아냐? 어휴! 나도 선아도 결혼식 준비하면서 살 빠졌었어. 넌 파격도 더한 파격이 없는 그런 결혼식을 하는 거야!”
크리스마스이기도 한 이번 주 토요일은 도훈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해를 넘기면 절대 안 된다’는 도훈의 아버지와 세경의 어머니 성화를 못 이기고 드디어 식을 올리기로 한 것.
다만,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게 아니라 세경의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직계 가족과 가까운 친구만 초대해 결혼 서약을 하고 반지를 교환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도훈과 세경 양쪽을 모두 합해도 초대한 직계 가족은 서른이 넘지 않았고 친구들의 숫자도 비슷해서, 초대한 하객이 모두 참석한다 해도 60명이 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고는 해도 너희 아버지나 세경 씨 어머니나 모두 대단하신 분들이야. 내가 결혼식 많이 참석해 봤지만, 너랑 세경 씨처럼 간략하게 치르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형편이 그런 걸 어떻게 하냐?”
“형편이 아무리 그래도 그걸 이해하고 용인하시는 수준을 넘어 두 분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셨잖아. 부모 입장에서 그게 쉬운 결정이 아니야, 인마.”
“모르는 바 아니야.”
이런 ‘간소한’ 결혼식은 도훈과 세경이 협의했다기보다는 도훈의 아버지와 세경의 어머니가 계속 줄기차게 논의해 온 결과였다.
간략해서 준비할 게 없으니 서두르자는 두 분의 주장은 도훈과 세경이 뭐라 다른 말을 못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집은 알아보고 있냐?”
“천천히 해도 돼. 어차피 계약이 2월에 끝나는데.”
“허? 야, 이번엔 네 마음에만 들면 되는 집이 아니잖아. 세경 씨 취향도 고려해야 할 것 아니야?”
“... 세경 씨는 별말 없는데?”
“아이고, 이 화상아.”
“......”
간소하고도 간소하게 치르기로 한 도훈과 세경의 결혼에 집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도훈은 대흥시에서 시장으로 근무하고 세경은 홍성 도청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당분간 주말부부로 지낼 게 확실했으니까.
게다가 도훈이 다음 선거에 당선되면 이 상황이 계속될 테니 신혼집은 따로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아무래도 시장인 도훈이 대흥시를 떠나 세경에게 가는 것보다 세경이 도훈에게 올 경우가 많을 테니까 도훈이 집을 조금 넓은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현재의 작은 방 2에 주방이 딸린 빌라도 별로 불편함이 없다고 느낀 도훈이었지만, 도훈의 아버지가 세경이 주말에 와도 ‘좁고 빡빡한 곳이 아닌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는 곳’이라고 느껴야 한다며 강권했고 도훈도 그 뜻을 따르기로 했다.
다만, 그렇게 결정은 했으나 아직 집 알아보는 일은 시작도 하지 않은 도훈이었다.
“... 안 되겠으면 진주한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지, 뭐.”
“차라리 그래라. 걔가 땅 알아보고 건물 올리면서 친해진 부동산 사장이 꽤 많을 테니까. 당장 전화해서 부탁해.”
“뭘 그렇게까지 서두르래? 형 왜 그렇게 갑자기 열을 내?”
“... 내일모레 결혼식인데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 널 보고 있으니 내가 괜히 성질이 나서 그런다, 왜?”
부러움을 넘어 화가 난다는 듯한 영배의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고, 소파에서 뭔가를 읽고 있던 두진이 끼어들었다.
“조 비서관, 거기까지만 해. 자네 그러다가 결혼식 초대 취소되면 어쩌려고 그러나?”
“뭐, 그럼 실장님이랑 같이 시청이나 지키죠.”
“허허. 절친 결혼식에도 못 가고 그러고 있으면 참 보기 좋겠네.”
“실장님에 부시장님도 못 가시는 걸요, 뭐.”
도훈의 결혼식은 비밀이 아니었지만, 초대된 하객이 극히 제한적이라 시청 직원은 초대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세경과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인 부시장 전경완도 결혼식 날 대흥시에 없을 도훈을 대신해 시청을 지켜야 하는 처지.
아무튼, 하객은 물론 축의금도 선물도 모두 거절한 도훈은 요즘 청사 내에서도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듬뿍듬뿍 ‘축하 말’을 듣느라 무척 바빴다.
“김 시장, 이거 다 읽었네.”
“아, 네.”
도훈이 소파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영배도 말없이 입을 삐죽이며 뒤를 따랐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적에 일리가 있어. 아무리 공무원 신분이 아닌 시민이 감사관이라지만, 최소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배경지식은 갖춘 사람이어야 하는 게 맞아.”
“... 네.”
“다만, 그런 사람만 감사관이 될 수 있어서는 안 되겠지.”
‘시민감사관 제도’는 대흥시의 일반 시민 중 몇 명을 시민감사관으로 임명해 시 행정과정이나 결과를 감사하게끔 하는 제도를 의미했다.
도훈은 작년에 이 제도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지원자가 너무 적어 실패한 뒤 올해 초에 다시 도전했다.
지원자가 많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중에서 우선 셋을 선별해 시민감사관에 임명해 활동하게 했다.
임기는 2년이지만, 1년 활동을 마무리하며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두진이 읽은 것은 그 평가서였다.
호평도 있었지만, 세 사람 모두 회계 관련 전문지식이나 경력을 가진 이들이어서 일반 시민이 시 행정과정을 감사한다는 원래의 취지에 미흡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건 꼭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야. 잘 되는 곳은 잘 되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아예 폐지해 버린 곳도 있으니까 말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좀 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지 않나 싶습니다.”
이미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는 지자체가 있었지만, 제도의 활성도는 너무나 달랐다.
제도가 잘 운용되는 곳은 ‘모범행정’ 사례로 꼽힐 정도로 평가받고 있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유명무실한 것도 모자라 소리소문없이 철회해버린 곳도 여럿이었다.
시민감사관에 좀 더 많은 사람이 지원하도록 시에서 적극적으로 참여를 유도하고 단체장이 시민감사관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주느냐가 주된 문제였는데, 대흥시의 경우만 보자면 참여가 부족한 것이 현재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년에 뽑는 감사관에는 전문지식은 좀 부족하더라도 활동의욕이 큰 분들이 많이 지원하면 좋겠는데요.”
“그러길 바라야지. 부지런히 홍보하고 추천받고 하면 100% 만족은 못 하더라도 그에 가까워지지 않겠나?”
“... 네.”
도훈이 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답하고는 두진이 읽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시 행정의 구상 단계부터 진행, 수정 보완 및 종료 이후 감사까지 시민과 함께한다.’는 것은 도훈의 몇 안 되는 선거공약 중 하나.
임기를 끝내기 전에 그 공약을 실천하고 싶었던 도훈에게 ‘반쪽’이라는 평가를 받은 시민감사관 제도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었다.
똑똑!
덜컹.
노크에 이어 시장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것은 지연.
“시장님, 세무회계과에서 전화가 왔는데요. 과장님이 잠깐 시장님 뵙고 싶은데 지금 시간 괜찮으시냐고요.”
“지금이요? 무슨 일로요?”
“징수와 관련한 사항이라고 하시는데···.”
“전화 끊었나요?”
“아뇨. 지금 기다리고 계세요.”
“그럼 제가 받아볼게요.”
도훈이 몸을 일으켜 비서실로 나갔고, 그런 도훈의 등을 바라보던 영배가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결혼식 이틀 남겨놓고 저렇게 담담하고 태평한 사람은 세상에 저 녀석밖에 없을 거야.”
두진이 공감한다는 듯 아무 말 없이 피식 웃는 가운데, 결혼을 이틀 남겨둔 도훈의 하루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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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당일인 크리스마스 날 이른 아침, 도훈의 집.
자다 깨서 부스스한 모습의 도훈이 누군가를 위해 현관문을 열어줬고, 들어선 사람에게 푸념하듯 말했다.
“... 일찍도 오셨네요.”
“당연하지, 인마. 오늘이 무슨 날인데?”
“바우랑 누리, 아침밥은 주고 오셨어요?”
“당연하지. 나는 굶어도 걔들은 밥 안 굶겨.”
“... 휴우, 아버지. 지금 7시도 안 됐습니다. 식은 1시에 시작이잖아요. 거기까지 아무리 오래 걸려도 1시간 반이면 갑니다, 여기서.”
“아, 일찍 가서 인사도 하고 준비도 해야 할 것 아니야? 결혼하는 신랑이란 놈이 1시에 맞춰서 가면 어쩌려고!”
“......”
아무리 간소한 인사와 식사가 전부인 결혼식이라도 신랑이니까 두루 인사하고 준비도 할 겸 11시까지 가기로 한 도훈.
그걸 생각해 아버지와 함께 좀 여유를 두고 출발하기로 한 시간이 9시였다.
즉, 도훈의 아버지는 출발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앞서 도착했던 것.
“작은집 어른들은요?”
“남훈이가 승합차로 때맞춰서 태우고 올 거다.”
남훈이란 도훈의 사촌 이름이었다.
돌아가신 지 오래인 도훈의 할아버지 형제는 작은할아버지 하나뿐이었고 그분 자식도 남매가 전부여서 결혼식에 친척의 이동도 승합차 한 대로 해결이 됐다.
세경 쪽도 비슷한 상황인데 촌수가 좀 있는 친척이 없는 건 아니어서, 그런 이들은 나중에 각각 따로 인사하는 자리를 갖기로 했다.
이게 다 도훈 아버지와 세경 어머니가 ‘빨리 해치운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일을 추진한 결과였다.
“도연이는 곧바로 그리 온다고 했지?”
“네. 안 그래도 어제 통화했어요.”
“걔한테도 일찍 오라고 했냐?”
“제가 말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일찍 오겠다고 했습니다. 늦어도 12시 전에는 도착한다고 하대요.”
“12시? 에이, 조금만 서두르지.”
“... 하하. 아버지 걔가 결혼하는 거 아니거든요?”
“쩝.”
“아무튼, 걔 내일까지 쉰다고 끝나고 아버지랑 함께 집에 간댔어요.”
“알았고, 빨리 씻어라. 얼른 출발하게.”
“... 아버지.”
“아, 얼른!”
도훈은 아버지에게 등을 떠밀려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하고 간단히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순심이 밥도 먹이고···.
그렇게 서두르라고 성화인 아버지를 못 본 척한 체로 할 일을 다 하고 집을 나섰건만 아직 시간은 8시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얘 데리고 가도 되는 거냐?”
아버지가 뒷좌석의 순심이를 흘끔 하며 물었고 도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영배 형이랑 진주네도 거기 올 거라서 맡길 수가 없습니다. 집에 혼자 둘 수도 없잖아요. 오늘 저 장모님 댁에서 자고 올 건데. 이미 장모님 허락도 맡았어요.”
“뭐, 그럼 됐고. 가자. 얼른 출발해.”
“... 네.”
부르릉.
도훈이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채 속도를 내기도 전에, 옆에 앉은 아버지의 ‘훈계’가 시작됐다.
“너 말이다. 일단 큰 산 하나는 넘었다만, 아직 더 큰 산이 남았다는 거 알아?”
“... 더 큰 산이라뇨?”
“아, 2세 말이다, 2세.”
“......”
“인마, 너 곧 마흔이야. 당장 나아도 애가 스무 살 되면 너 환갑이라고. 그러니까···.”
“......”
묵묵부답인 도훈에게 아버지의 훈계는 이어졌다.
남에게는 ‘쿨’한 아버지일지 모르지만, 아들 일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 휴우, 오늘 하루가 정말 길겠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는 도훈.
평생 다시 없을 아주 좋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잔소리를 견디는 도훈의 마음은 구름 낀 하늘처럼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