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좋은 날 - 3.
2차가 시작되고 2시간 가까이 지난 시각, 중국관 내부.
“자, 이제 완전히 정리하자고.”
“쩝. 아쉽네요.”
“아쉽기는? 저 술병들 안 보여? 아무리 좋은 날이라도 작작들 마셔야지. 그리고 나도 집에 좀 가자, 이제.”
“... 네에.”
제법 술기운이 오른 상태에서도 아주 활발히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중국관 사장과 혜란, 영배.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했어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알딸딸한 것도 그렇고 관심 두는 얘기 많이 한 것도 그렇고, 오늘 기분 좋네요. 다음에 또 이런 자리 만들죠.”
“호호. 그래야죠.”
2차 시작할 때 마흔이 넘던 사람들은 이제 스물이 채 안 되는 정도만이 남은 상태.
이런 좋은 자리에서 만취해 주사를 부리거나 추태를 보이지 말자고 미리 이야기해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사람은 먼저 하나둘씩 자리를 떠서,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 중 지나치게 취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거 주방으로 가져가면 됩니까?”
“응. 설거지는 내일 하면 되니까 그냥 설거지통에 넣기만 해.”
“네.”
다들 가게 밖으로 나가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영배는 가게 안에 남아 중국관 사장을 도와 정리를 하고 있었다.
“허. 우리 회원들 다 술고래네. 엄청 마셨네.”
구석에 쌓인 빈 술병을 보며 중국관 사장이 하는 말에 영배가 대꾸했다.
“하하. 많이 마시긴 했네요. 하지만, 다들 알아서 조절하시더라고요. 저도 별로 안 마셨어요, 사장님.”
“그래? 잘했어. 적당히 자기 주량에 따라 마시는 게 좋지.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왜 있겠어?”
“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는 술에 너무 관대해요.”
“내 말이.”
영배와 중국관 사장이 대화하고 있는데, 회원들과 인사를 마친 도훈과 두진, 혜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갔어?”
“네. 사장님.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단골 좋다는 게 뭔가? 그리고 나도 팬카페 회원이잖아. 공짜로 놀게 한 것도 아닌데, 그러지 마. 하하.”
“그래도요.”
담담히 웃는 도훈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 2차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은 단연코 도훈.
마흔이 넘는 사람들이 따라주는 소주를 모두 받아마셨기 때문이었다.
한 잔씩 받다가는 2차에 참가한 모든 회원의 술을 받지 못하고 뻗을 것 같다고 엄살을 피워서 반 잔씩만 받았기에 그나마 이 정도였다.
“얼굴에 살이 좀 빠진 상태에서 술 취하니까 사람이 영 딱해 보이네.”
“하하. 괜찮습니다. 이번 예산안 처리가 힘들어서 살이 좀 빠진 건 사실인데, 쉬고 잘 먹으면 곧 회복되겠죠.”
“얼른 들어가 쉬어. 오늘 고생 많았네.”
“... 네.”
웃으며 답하긴 했지만, 도훈이 잠시 뜸을 들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중국관을 나온 도훈이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가 살짝 넘은 시각.
“... 1시간 조금 넘게 기다리고 계신 거지?”
“기다리는 게 아니고 자기들끼리 술 마시고 있다니까요.”
두진의 물음에 투덜대듯 답한 도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응? 누가 기다려?”
“네. 미처 선배님께는 말씀 못 드렸네요.”
“미리 약속이 있었던 거야?”
“아니요. 자기가 오고 싶다고 그냥 왔어요. 집에서 출발한 다음에야 저도 아니고 영배 형에게 연락했더라고요.”
“그냥 중국관으로 오라고 하지 그랬어?”
“... 그러기엔 좀···.”
“... 누군데 그래?”
궁금해하는 혜란을 도훈이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선배님도 같이 가실래요?”
“나도?”
“네.”
“내가 가도 괜찮은 거야?”
“물론이죠. 아마 그 양반이 선배님을 궁금해할 것 같기도 하고···.”
“그 양반?”
“있어요. 그런 사람이. 아, 그 사람 말고 개인적으로 소개해드릴 사람도 있고요.”
혜란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도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말을 돌리는 거야? 오히려 궁금해지네?”
“같이 가세요, 그럼.”
“그러자. 어차피 막잔 생각이 나기도 했고.”
“가시죠, 그럼.”
혜란과 도훈을 선두로 모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중국관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단골 실내포차.
‘... 어우, 알딸딸한데···. 이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술기운이 오르는 걸 느낀 도훈이 머리를 털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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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도훈 일행은 실내포차에 도착해 미리 진을 치고 술 마시던 이들과 합류했다.
원래는 셋이 있어야 하는데, 자리에 있는 건 두 명.
전경완 부시장, 세경과 인사한 도훈이 혜란에게 세경을 소개했다.
“인사하세요, 선배님. 이쪽은 민세경 씨, 도청 소속 공무원이고요. 제 예비신부님이에요.”
“아, 그분이 이분이구나. 반갑습니다, 윤혜란이에요.”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민세경입니다.”
혜란은 팬카페 일을 상의하기 위해 시청에서 영배와 밥을 먹다가 전경완과 이미 안면을 익혀 따로 소개나 인사는 필요 없었다.
“도훈 씨에게 선배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아주 열정적인 분이시라고요. 팬카페 이끌어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실 텐데, 대단하세요.”
“호호. 아니에요. 그냥 사는 게 무료한 참에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겠다 싶어서 시작한 걸요. 도훈이, 아니 김 시장님이 일하는 걸 보니까 갑자기 저도 의욕이 막 생기더라고요.”
‘도훈’이라고 하려던 혜란이 전경완의 눈치를 보고 말을 올렸고, 전경완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제 눈치 보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사석인데 뭐 어떻습니까.”
“호, 호호! 그럴까요, 그럼?”
“말 나온 김에 편하게 말씀하세요, 선배님. 제가 까마득한 후배인데요.”
“좀 편해지면 그렇게 할게요.”
역시 K대 출신인 세경에게 혜란은 대선배.
그걸 고려한 세경의 말에 혜란은 정겹게 웃으며 답했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 화장실에 가셨습니다.”
“... 휴우, 왜 굳이 오늘 여길 오셔서···.”
도훈이 투덜거렸고 세경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꼭 그 자리에 얼굴을 내밀려고 하신 건 아니고, 그냥 도훈 씨를 순수하게 축하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하고 단둘이 오셨어요. 경완 삼촌은 도훈 씨 대타로 끌려 나온 셈이죠.”
“진짜요?”
“네.”
“... 흐음.”
도훈이 심드렁한 소리를 내자, 혜란이 물었다.
“누구 다른 분도 있는 건가요?”
“아, 네. 제가 원래는 오늘 올 계획이 아니었는데 그분 때문에 밤늦게 등 떠밀려 왔어요.”
“... 누구시길래···.”
혜란이 궁금해하는데 그녀의 등 뒤에서 문제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어! 김 시장, 드디어 왔군요.”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안녕하죠. 그런데 김 시장은 얼굴이 좀 상했네요?”
“예산안 때문에요. 요즘 지사님도 비슷한 일을 겪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요”
“하하, 나야 뭐 같이 당해주는 사람이 많아서 그래도 괜찮아요.”
도훈이 ‘지사’라 언급하며 친근하게 대화하는 이가 누군지 궁금한 혜란이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 가, 강정문? 강정문 지사님 아니세요?”
“안녕하세요.”
담담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강정문을 본 혜란이 놀라 굳어졌다가 강정문과 악수를 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아, 우리 김 시장 팬카페 회장님이시라고요? 야, 중요한 분이셨네.”
“주, 중요하긴요.”
“어휴, 중요하죠. 연예인은 아니지만, 정치인에게 코어 지지층은 무척 힘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까. 팬카페라면 코어 지지층 중에서도 코어인데, 팬카페 회장님이 안 중요하면 누가 중요하겠습니까?”
“... 호, 호호.”
혜란이 머쓱하게 웃었고,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아는 도훈과 영배, 두진이 빙긋이 웃었다.
“절 단박에 알아보시는 걸 보니 제 지지자 아니면 ‘안티’이실 확률이 큰데, 설마 안티는 아니시죠?”
“호호! 그, 그럼요”
오늘 모임에서 주인공인 도훈도 도훈이지만, 얼마 전 ‘황당한 경험’을 한 차인호도 꽤 화제가 됐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OO 시 조민구 시장에 대한 욕이 풍성하게 쏟아졌고, 그보다는 좀 못해도 민의당의 속 좁은 대처법에 대한 비난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비난을 가장 많이 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혜란이었다.
차인호 부부는 팬카페 활동에 적극적이어서 이전부터 오프라인 모임 준비를 도왔고, 자연히 혜란은 그들과 친분이 깊어져 이런저런 사정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까.
오죽했으면, 중국관 사장님이 ‘내 앞에서는 민의당 비판 좀 적당히 하라’고 말했겠는가.
“음? 왜 그런 표정이실까요? 저한테 뭐 찔리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호호!”
눈치 빠른 강정문이 물었지만, 얼른 시치미를 떼는 혜란.
그녀는 오늘 저녁, 민의당 자체에 대한 비난도 많이 했지만, 민의당 소속 대흥시 일대 지역구 국회의원 김용진과 민의당 충청남도 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강정문에 대한 비난도 꽤 했었다.
그렇게 저녁 내내 ‘씹어대던’ 사람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으니 어찌 찔리지 않겠는가.
“호, 호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건배할까요?”
“그러시죠.”
빠르게 술잔이 채워지고 강정문이 도훈을 바라보며 축하의 말을 했다.
“팬카페 모임 축하합니다, 김 시장.”
“고맙습니다, 지사님.”
“하하! 김 시장이나 팬카페나 함께 번창하세요. 건배!”
“건배!”
모두가 밝은 표정으로 건배했다.
강정문에게 전화해 ‘여기 나타나시면 안 된다’고 투덜대던 도훈 역시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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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김 시장, 오늘 술 많이 마셨어요?”
“그것도 있지만, 피로가 쌓인 이유가 더 클 겁니다.”
“저런, 예산안 때문에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네. 예산안 통과된 뒤에도 고생한 직원들 격려하고 챙긴다고 정작 본인은 푹 쉬지를 못했거든요.”
“쯧쯧. 하여간 일 관련해서는 영 요령이 없는 사람이라니까···.”
어느새 세경의 어깨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도훈.
모두가 그런 도훈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첫해엔 배우고 익히느라 그렇겠거니 했는데 아직도 그때랑 크게 달라지지 않았죠?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좀 쉬엄쉬엄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강정문의 말에 두진이 웃으며 답했다.
“행정에 초짜에 문외한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자신을 채찍질하느라 그랬겠죠. 앞으로는 요령이 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죠. 우리 시장님이 시민들, 직원들 복지는 꼼꼼하게 잘 챙기면서 정작 자기는 안 챙긴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괜히 있겠습니까?”
전경완의 말에 두진, 영배, 세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임 이후, 도훈은 주말을 온전히 쉰 적이 거의 없을뿐더러 연가를 사용한 적도 단 두 번에 불과했다.
여름 휴가를 챙기긴 했지만, 그때도 고향 집에 다녀온 뒤 대흥시의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쉴 뿐 여행 같은 걸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오래 일한다고 무조건 열심히 하는 건 아닌데 말이에요.”
“하하. 본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 초반보다는 조금씩 초과근무 시간을 줄이기도 했고 앞으로도 점점 나아지겠죠.”
걱정하는 강정문에게 답하는 전경완 부시장.
평소에 도훈에게 가장 휴식을 강조하는 게 그였다.
“그렇게라도 했으니까 오늘 같은 날이 있는 거겠죠.”
“하긴···.”
“그렇죠.”
“물론입니다.”
두진, 세경, 영배가 한마디씩 공감을 표했다.
정치인의 후원회 같은 것은 흔하지만,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팬카페는 무척 드물다.
여러 번 언론에 등장하며 화제가 됐다지만,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지방 도시 시장에게 팬카페가, 그것도 그 도시 시민이 4백 가까이 정회원이 된 팬카페가 생긴 건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오프라인 모임 때 언론 취재를 거절한다는 팬카페의 공식 공지에도 불구하고 최승범과 도연이 억지스럽게 취재를 시도한 건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던 것.
“아무리 ‘난 사람’이라고 해도 그만큼의 노력이 있었기에 좋은 평가를 듣는 거겠죠.”
“물론이에요. 놀라운 게 오늘 모임에 온 회원 중에 김 시장이 얼굴을 모르는 분이 거의 없더라고요. 저는 얘기만 들었는데, 김 시장이 얼마나 시민들 만나는 일에 공을 들이는지 그걸 보고 알 수 있었어요.”
“... 하하. 그 부분이 좀 유별나긴 하죠.”
도훈이 저녁마다 다양한 성격의 시민 모임을 찾아다니는 건 여전했다.
몇 년째 그러고 있다 보니 처음엔 시장의 방문이 부담스럽다며 거절하던 모임이 제법 있었는데, 요즘엔 환영하면 환영했지 거절하는 모임이 거의 없었다.
모임에 가서 쓴소리를 듣는 일은 요즘도 흔했지만, ‘만남’ 자체를 거절당하는 일이 거의 없어진 것만으로도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대개의 사람은 그런 것도 모르고 김 시장을 대단하다고만 하죠.”
영배가 도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고, 강정문이 덧붙였다.
“물 위의 고고한 백조가 물밑에서 아주 열심히 발을 놀린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온기 가득한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보던 강정문이 술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축하하네, 김 시장.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시게.”
“......”
도훈에게 어깨를 빌려준 세경을 제외한 모두가 강정문의 행동을 따라 했다.
“파이팅.”
“힘내세요.”
“축하합니다, 시장님.”
모두의 축하와 격려가 이어지는 가운데, 도훈이 세경의 어깨에 기댄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