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53화 (254/279)

253. 좋은 날 - 1.

“예산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점심을 위해 정회합니다. 오후 2시 반에 속개하겠습니다.”

땅. 땅. 땅!

심남진 시의회 의장이 정회를 선포하며 의사봉을 두들기자, 뒤쪽에 앉았던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고생하셨습니다, 시장님.”

“네. 실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통과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눈으로 확인하려고 몸소 시의회에 나온 도훈.

조정 논의 기간만도 작년의 2주를 넘어 3주가 걸렸고, 각 시의원과의 개별 및 시의회 전체와의 논의 횟수도 훨씬 많았다.

그 논의 한 번 한 번도 무척 치열해서 이번 예산안 조정 논의는 시 집행부도 시의회도 과부하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도훈이 살이 다 빠졌겠는가.

아무튼, 이번 예산안은 그만큼 통과시키는 게 힘들었기에 의사봉 소리에 반가움보다 안도의 마음이 크게 드는 도훈이었다.

“가시죠. 점심시간 다 됐습니다.”

“네. 가시죠.”

오늘은 외부에 나가 점심 먹는 날이 아니었기에 본회의장을 나온 도훈과 두진은 시장실로 돌아가지 않고 비서실에 연락한 뒤 바로 1층 식당으로 향했다.

도훈과 두진이 음식을 배식받아 먹고 있는데 누군가 두진 옆에 와서 앉았다.

“축하드립니다, 시장님.”

“아, 의원님.”

“그 정도면 선방하셨어요. 저를 포함해 의원들이 죄다 눈에 불을 켰었는데.”

“알긴 아시는군요.”

“하하, 그럼요.”

앞에 앉은 안준식이 후련하다는 듯 웃었지만, 도훈은 그렇게 웃지 못했다.

안준식이 ‘선방’했다는 표현을 쓴 것은 이번 예산안에서 도훈이 일부 ‘타협’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원 각자가 워낙 끈질기게 매달리고 의원 모두가 시 집행부가 어느 정도 양보하길 바랐기 때문에, 도훈은 최소한의 양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년까지 자신이 정한 선을 절대 넘지 않았던 것과는 달랐기에 도훈은 불만족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의원들도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하튼, 지금은 그렇게 3주에 걸쳐 양자가 양보에 양보를 거듭해 마련된 내년도 예산안이 통과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이번 주 주말에 팬카페 오프라인 모임 하신다면서요?”

“...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 아는 방법이 있죠.”

“설마 아직도 포기 안 하신 겁니까?”

“하하. 그렇게 정색하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니까요.”

도훈, 두진, 영배의 협박 이후, 안준식은 팬카페 회원가입 신청을 스스로 철회했었다.

안 그래도 예산안 관련해서 머리가 아팠던 도훈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었는데, 예산안이 통과되자마자 혹시나 다시 시도하려는지 싶어 자기도 모르게 정색을 했던 것.

“사실, 우리 딸이 회원입니다.”

“... 그래요?”

“네. 그 녀석 통해서 알게 됐습니다.”

“......”

고등학생인 안준식의 딸이 회원이라는 건 도훈도 모르고 있었지만, 카페 회원 중 미성년자가 수십 명이라는 얘기는 혜란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강철기 소방관 아들인 초등학생 경태도 카페 회원이었다.

카페 정회원이 되는 것에 ‘대흥시 시민’이라는 걸 제외하면 별다른 제약조건이 없었으니까.

“저한테 팬카페 모임에 가도 되냐고 물어보기에 알게 된 겁니다. 일부러 알려고 한 것도 아니고요.”

“... 네.”

지나가는 듯 말하며 안준식이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기에 도훈도 숟가락의 밥을 입에 넣으려는데···.

“그래서 보호자 자격으로 저도 거기 가볼까 하···.”

“......”

동작을 멈춘 도훈이 그대로 고개만 들어 안준식을 바라보다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무슨 생각으로 거길 오시겠다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미성년자인 딸내미 보호자 자격으···.”

“그런 뻔한 핑계 말고요.”

“......”

“뭔데요, 의원님?”

도훈이 다시 정색하고 묻자 안준식이 피식 웃고는 답했다.

“저만 거기 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아십니까?”

“네?”

“저 말고 우리 당 다른 의원들도 시장님 팬카페 모임에 축하하러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

“모르긴 몰라도 신길영 의원님도 그런 생각 하고 있을 걸요?”

“......”

“정말 모르셨어요?”

“... 네.”

예산안 관련 논의에 집중하느라 도훈은 주말에 팬카페 오프라인 모임에 관한 사항을 전부 팬카페 회장인 혜란과 영배에게 맡긴 채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행사 자체에도 신경을 안 썼는데, 그 행사에 누가 축하를 하러 올지 안 올지를 과연 신경 썼겠는가?

“... 일단 차 의원님은 거기에 포함 안 되는 거죠?”

“그럴 겁니다. 물어본 적이 없으니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 민의당 의원님 전부가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일단은요. 한 분은 좀 안 내켜 하는 것 같긴 한데···. 아마 다른 사람들이 간다면 그분도 가실 겁니다.”

“... 그분이 누군지는 상상이 가네요.”

도훈이 짐작한 사람은 장민호였고, 안준식이 말한 사람도 장민호였다.

어쨌든, 내켜 하는 사람이든 안 내켜 하는 사람이든 시의원들이 그 자리에 오게 할 마음이 애초에 없는 도훈이었다.

“시의원님들이 그 자리에 오면 볼썽사납습니다. 오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 그걸 몰라서 거기 가겠다는 게 아닐 겁니다. 시장님 팬들에게 눈도장 찍겠다는 것이겠죠. 아무래도 대흥시에서 시장님 인지도와 지지도를 따라갈 시의원은 없으니까요. 선거도 가까워지고 있으니 묻어가자는 속셈이겠죠.”

“... 의원님도요?”

“하하. 저도 의원이고 선거에 나갈 사람이니까요.”

말은 ‘그렇다’고 하고 있었지만, 안준식의 얼굴에서는 진심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도훈이 그런 안준식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을 이었다.

“그날 공무원들만 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는데, 시의원님들도 포함 시켜야 하겠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을까요?”

“굳이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저를 위해서나 의원님들을 위해서나.”

“... 하하.”

안준식이 담담히 웃고는 식사에 집중했고, 도훈과 영배도 뒤이어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해 오프라인 모임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식기를 반납하고 구내식당을 나온 안준식이 도훈에게 말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세요, 시장님. 얼굴이 좀 상하셨네요.”

“... 의원님도 그러십시오. 피곤해 보이십니다.”

“네. 하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밝게 웃으며 멀어져 가는 안준식의 표정에는 팬카페 모임에 못 가게 되어 아쉽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도훈은 그런 안준식의 모습에서 뭔가를 유추했는데, 두진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 일부러 그 얘기를 해준 모양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의원들이 아무런 얘기도 안 하고 있다가 갑자기 팬카페 회원 모임 장소에 나타나면 아무리 도훈이라도 ‘안 된다’며 돌려보내기가 민망하다.

특히나 첫 회원 모임이니 시의원이 축하 정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분위기를 잡고 회원들이 이에 호응하면 더더욱 그럴 터.

아무래도 안준식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일부러 자기 딸 얘기를 하며 간접적으로 주의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저 양반도 바쁘네요. 예산안 챙기랴, 남모르게 시장 챙기랴.”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가시죠.”

멀어지는 안준식을 보며 피식 웃고 난 도훈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또 있을 거라는 걸 도훈도 두진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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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마지막 주 토요일 초저녁.

날이 추운 데다가 하늘이 흐려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날씨 속에서 운계면 상가거리에서 조금 떨어져 자리한 어느 고깃집에서 대흥시 시장 김도훈 팬카페의 첫 오프라인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카페 정회원의 숫자가 조만간 400을 넘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예고된 행사 시작시각까지 식당에 자리한 사람은 1백이 넘었다.

“자, 김도훈 시장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다들 박수!”

“와아아아!”

짝짝짝짝짝!

시청에 나갔다가 잔업이 늦어져 시작 직전에야 도훈과 두진, 영배가 도착했고, 회원들이 박수와 함성으로 그들을 환영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자신을 반기는 회원들에게 연신 인사하며 안쪽으로 향하던 도훈은 연신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오랜만이에요, 시장님.”

“그래. 요즘은 학원 땡땡이 안 치냐?”

“고딩이잖아요. 웬만하면 착실하게 살고 있답니다.”

“훌륭하네.”

안준식의 딸이 와 있었고.

“시장 아저씨!”

“어, 경태야. 아! 안녕하세요.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시장님.”

경태와 경태 엄마도 와 있었다.

경태는 ‘공무원 가족은 자제해 달라’는 팬카페 공지가 있기 전에 가입했기에 당당한 정회원이었다.

게다가···.

“... 사장님도 회원이세요?”

“응. 몰랐어?”

“... 전혀요. 왜 얘기 안 하셨어요?”

“안 물어봤잖아.”

“......”

자타가 공인하는 민의당 열혈 지지자인 중국관 사장님도 있었다.

개표 다음 날, 주문한 짬뽕에 몰래 침을 뱉거나 중식도를 뽑아 들지도 모른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어린 얘기를 하며 해장하러 가지 못 했던 것을 생각하면 상전벽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저녁 장사는요?”

“오늘은 마누라한테 맡겼어.”

“... 하하.”

“나 이런 자리 처음인데, 왠지 나쁘지 않네.”

“...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탁구 동호회 회원들에, 차인호와 그의 부인 등 도훈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미성년자도 스물이 넘었고 청년에 중년층, 노인까지 연령대도 다양했으며, 남녀도 고루 섞인 그런 사람들.

도훈은 중앙에 자리한 테이블에 가 앉았고, 혜란이 마이크를 들고 발언을 했다.

- 자,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오셨네요. 바로 시작을 하겠습니다. 아직 서로 모르시는 분들은 중간중간에 자유롭게 자리도 옮기시고 하면서 통성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따가 여러분들에게도 마이크를 드리는 시간을 갖긴 할 텐데 인원이 많아서 모든 분께 기회가 안 갈 수도 있거든요. 아, 카페 닉네임이랑 실명이 적힌 이름표는 꼭 가슴에 붙이고 계세요. 그래야 서로 알기가 더 쉬울 테니까요. 아셨죠?

“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답하다 보니 소리가 아주 우렁찼고, 혜란이 기분 좋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 자, 그럼 주인공 인사말부터 들어볼까요? 박수로 시장님을 환영해주세요!

“와아아아!”

짝짝짝짝짝!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몇몇 사람이 분위기를 띄웠다.

“잘 생겼다!”

“멋있다!”

“하하하하하!”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조금 얼떨떨한 표정의 도훈이 마이크를 잡았다.

“... 부족한 저를 이렇게 아끼고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인사말을 마친 도훈이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여러분께 뭐라 인사를 드려야 할지 생각을 좀 해놨는데, 이 앞에 서니까 긴장해서 그런지 생각이 전혀 안 납니다.”

“하하하하!”

회원들이 다시 폭소를 터뜨렸고, 도훈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마이크를 잡고 연설이나 발언을 제법 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막상 이 자리에 와보니 그렇지가 않아서였다.

“멋진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야겠죠. 지금까지 제 나름으로는 열심히 했고, 임기 마칠 때까지 계속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 나름’이라는 기준이 여러분이 보시기에 분명 부족할 겁니다만, 퇴보하지 않고 발전하기 위해서 성심성의를 다하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저와 마주치신다면 따끔한 충고나 지적 망설임 없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팬카페에 글 올리셔도 되고요. 제가 다른 건 못 해도 그 글들은 다 읽어보고 있습니다.”

“오오오오!”

도훈이 모든 글을 읽는다는 말에 사람들이 반색했고, 도훈이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주제든 상관없이 거리낌 없이 글을 써주시길 바랍니다. 보니까, 답변할 필요가 있는 글도 있더라고요. 엊그제까지 예산안 통과 때문에 전혀 신경을 못 썼는데, 앞으로는 답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짜죠?”

“네, 진짭니다.”

누군가가 묻자 도훈이 단언하듯 답했다.

“인사는 길 필요가 없겠죠. 오늘 행사하면서 한 분 한 분과 제대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

도훈의 짧은 인사는 회원들의 열렬한 박수 속에 마무리됐고, 곧이어 혜란이 제안해 건배했다.

“건배!”

“건배~ 에!”

건배에 뒤이어 혜란이 마이크를 들고 운영진 선출 등 오늘의 안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영배가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 진짜?”

“응.”

“... 장난 아니고 진짜?”

“아, 진짜라니까.”

“......”

말문을 잃은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식당 출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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