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열혈… - 4.
시선을 마주하고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도훈과 안준식.
먼저 입을 연 것은 안준식이었다.
“시장님, 제가 가입 신청한 건 그냥 ‘욱’하는 마음에서가 아닙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
“저는 우리 대흥시 시민에게 뭐가 더 좋은지 고민하고 그런 선택을 한 겁니다.”
“... 의원님이 제 팬카페 회원이 되는 게 시민에게 좋다는 뜻이세요?”
“네.”
“... 그게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됩니까?”
도훈이 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안준식은 진지한 표정 그대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시장님이 다음 선거에서 낙선할 수도 있다고 하셨죠?”
“... 그랬죠.”
“저는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가입하려는 겁니다.”
“...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지난번에 제가 당원 가입 안 하겠냐고 물었던 이유 아시잖아요?”
“... 알기야 알죠.”
도훈이 민의당 당원이 되면 도훈도 좋고 민의당도 좋다는 논리.
그 논리에는 도훈이 끝까지 무소속을 고집하면 다음 선거에서 여당 후보와 맞붙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존재한다.
그리고 안준식은 그런 가정이 현실이 되는 것을 마뜩잖게 여기는 쪽이었다.
“우리 당에서 독자 후보를 내면 시장님 당선 확률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요?”
“좀이 아니라 많이 떨어지겠죠.”
자기 일인데도 담담히 말하는 도훈의 모습에 안준식이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도당이나 중앙당에서 대흥시장 후보로 누군가를 전략적으로 내려보낼지 아닐지, 보내면 또 어떤 사람을 보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장님 정도의 인물을 보낼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생각합니다.”
“... 흠, 의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낯이 간지럽네요. 하지만, 아직 판단하기엔 이른 것 아닐까요?”
다음 지방선거는 내년 6월인데 지금은 벌써 11월.
도훈의 말과는 달리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움직임이 점점 더 민첩해지는 상황이었다.
물론, 선거법 규정만을 생각하면 아직은 여유가 좀 있지만, 지역에서 활동하지 않던 신인일 경우 6개월은 얼굴을 알리기에 절대 넉넉한 시간이 아니니까.
안준식도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그는 굳이 도훈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저는 제 판단을 90% 이상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당 소속 충남 기초단체장님들과 비교해도 시장님보다 나은 분은 거의 없거든요. 충남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 쑥스럽네요.”
“시장님 칭찬하려고 드린 말씀 아닙니다. 그냥 팩트가 그렇다는 거죠.”
“......”
도훈이 뭐라 대꾸를 못 하는데, 진지한 표정의 안준식이 더욱더 정색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시장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건 시장님에 대한 제 호불호를 떠나서 시민의 복지향상을 위해 어떤 사람이 시장이 되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고민한 결과입니다.”
“......”
“혹시 시장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우리 당 대흥시장 후보가 된다면, 저는 당연히 그 사람을 지지할 겁니다.”
“... 그러셔야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10% 아니, 5%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네.”
도훈의 반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언하는 안준식.
“시장님. 우리 대흥시는 대전에 붙어있다지만, 인구 5만도 안 되는 작은 도농복합형 도시일 뿐입니다. 아무리 우리 민의당이 여당이고 거대 정당이라지만, 기초단체장에 공천할 수 있을 정도로 젊고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물은 항상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런 참신한 인물은 꼭 서울은 아니더라도 수도권, 혹은 대도시권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대다수죠.”
“... 흐음.”
“우리 당의 참신한 인물들에게는 이미 각자 목표로 한 지역이 있을 겁니다. 지금 각자가 목표로 한 지역에서 열심히 바닥을 다지고 있겠죠. 만약, 우리 대흥시에서 시작해보겠다는 참신한 인물이 있다면, 이미 이곳에 와서 그런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
“설사, 도당이나 중앙당에 의해 젊고 참신한 이미지의 인물이 뒤늦게 대흥시로 보내지더라도 검증되지 않았다는 약점이 있죠.”
“......”
“이미 3년 넘게 훌륭히 시정을 펼치고 있는 시장님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
도훈은 말없이 듣는 가운데 안준식의 담담하지만, 확신에 찬 말이 이어졌다.
“제게는 민의당 당원으로서 책임과 의무가 있지만, 대흥시 시의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도 있습니다. 뭐가 우선이어야 합니까?”
“그것들, 양립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냥 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어떤 게 우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시의원의 책임과 의무죠.”
씨익.
미소를 머금은 안준식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 판단을 한 겁니다. 현실적으로 가장 훌륭한 차기 시장 후보인 시장님의 재선에 조금이라도 플러스가 되는 쪽으로요.”
“... 흐음.”
도훈이 멋쩍은 표정으로 신음성을 흘렸고, 안준식이 말을 이었다.
“이래도 반대하실래요?”
진중하게 눈을 빛내며 묻는 안준식에게 도훈이 답했다.
“물론입니다.”
“... 하하.”
조금 전의 안준식처럼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즉답.
이번에는 안준식이 쓰게 웃었고, 도훈이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저는 의원님이 카페 회원 되시는 거 절대 반대입니다.”
“... 흐음.”
도훈과 안준식이 다시 말없이 눈싸움했다.
서로의 논리는 이미 확인했다.
상대의 논리를 이해는 하는데, 도훈이나 안준식이나 각자의 판단을 되돌릴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말없이 눈싸움이 이어지던 순간.
똑똑.
철컥.
노크에 이어 시장실 문이 열렸지만, 도훈이나 안준식의 시선은 여전히 상대에게 고정된 상태.
안으로 반만 몸을 들이민 영배가 잠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 지금 뭐하십니까, 두 분?”
“......”
“... 실장님이 회의 언제 시작하실 거냐고 물으시는데요.”
영배의 말에 도훈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시선은 안준식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우리 얘기는 이 논의 끝나고 다시 하실까요?”
“그러시죠.”
안준식이 선선히 응했고, 도훈이 그제야 영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시작하자고 하세요.”
“... 알겠습니다.”
별 이상한 광경을 다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영배가 몸을 돌리는 가운데, 도훈과 안준식이 서로에게 ‘아직 안 끝났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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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안준식의 팬카페 가입 여부에 관한 2차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정요구안에 관한 논의가 길어졌고, 안준식에 뒤이어 장민호와 조정요구 논의를 바로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흘 뒤에 다시 뵙죠.”
“네, 안 의원님.”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장 의원님.”
안준식과의 논의가 원래 예정된 시간을 지나서까지 이어졌기에 도훈은 안준식과 장민호가 자신에게는 인사하면서도 서로를 대놓고 ‘쌩까는’ 장면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 감정이 단단히 상한 모양인데?’
장민호도 이번에 마음먹고 조정요구안을 잔뜩 밀어 넣었기에, 다른 이야기를 할 여유는 없었다.
바로 시작된 장민호와의 논의는 차혜진보다는 못해도 다른 의원들과의 논의보다는 훨씬 힘들었다.
다른 의원들에게는 과한 조정요구에 대한 도훈의 논리적인 거절이나 대안 제시가 먹혀들었지만, 장민호는 그렇지를 않았으니까.
“꼭 해주셔야 합니다.”
“지역 주민들이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아뇨. 납득 못 합니다. 저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결국, 퇴근 시간을 30분 정도 넘기고 장민호와의 이야기를 끝냈을 때 요구안 중 반도 검토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사흘 뒤에 뵙겠습니다.”
“... 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의원님.”
쿵.
장민호가 채 사그라지지 않은 전의를 품고 시장실을 나가자 도훈, 두진, 예산팀장이 동시에 소파에 다시 앉아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치네요.”
“... 그러게 말입니다.”
“... 휴우.”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도 상대가 설득되지 않는다는 건 사람을 무척 지치게 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소파에 앉아 기운을 회복한 뒤, 예산팀장이 시장실을 나갔고 도훈과 두진은 비서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고생 많았다.”
“응. 지연 씨랑 홍 주무관님은 퇴근했어?”
“어.”
오늘은 도훈, 두진, 영배도 야근하지 않을 계획이었기에 도훈은 회의 중간에 두 사람에게 시간 되면 알아서 퇴근하라고 메시지를 보냈었다.
“우리도 가야지? 아, 그전에 안 의원이랑은 어떻게 됐어?”
“... 결론 안 났어. 난 회원가입 못 받아들인다고, 스스로 철회하라고 했는데 안 의원은 그럴 생각이 없다네.”
“하하. 그 양반도 고집은 있는 사람이니까.”
“자기 고집 때문이 아니라 그게 대흥시 시민을 위한 길이래.”
“...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두진이 물었고 도훈은 안준식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 허.”
“... 흐음.”
영배나 두진이나 적지 않게 놀랐고, 도훈은 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절대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 역시 안 의원도 보통 사람은 아니야. 그냥 시의원으로 머물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야.”
“그러게 말일세. 그릇이 무척 커.”
영배와 두진의 말에 도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영배가 말을 이었다.
“고마운 생각이고 행동이긴 한데, 넌 받아들일 생각 없지?”
“응. 안 의원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하긴, 시의원이 시장 팬카페 회원이 된다는 건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해도 무리가 있어. 원래 의회와 집행부는 긴밀히 협력하면서도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견제를 해야 하잖아. 그런 원칙을 훼손하는 것으로 비칠 수가 있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도훈이 맞장구를 치자, 영배와 두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어떻게 하긴요. 무조건 거절해야죠.”
“안 의원도 꽤 끈질긴 사람이야.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데?”
“흐음. 그래서 고민입니다. 이런 건 질질 끌지 말고 단박에 해치워야 하는데 말입니다.”
“음.”
도훈과 두진이 고민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침묵하는데 영배가 입을 열었다.
“묘안이 없는 건 아닌데···.”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이게 좋은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효과가 확실할 것 같기는 하다.”
“그게 뭔데?”
궁금해하는 도훈과 두진에게 영배가 말을 이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뭔 소리야, 그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도훈에게 영배가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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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무조건 지금 시장님이 다시 시장했으면 좋겠어요. 철딱서니 없는 중딩 얘기에도 진심으로 관심 가져 주는 그런 사람이 시장이어야지 ‘척’ 하기 잘하는 사람은 싫어요.”
“그렇지?”
“네, 아빠. 하아, 왜 고 1한테는 투표권이 없는지 몰라.”
“... 하하. 조금만 기다려라. 너도 열여덟 살 멀지 않았다.”
“당장 내년에 투표를 못 하는데 열여덟 살이 뭔 소용이래요? 하아. 신경질 나. 저 들어가요.”
“오냐.”
내내 도훈 칭찬만 하고 제방으로 들어가는 딸의 모습에 안준식이 웃었다.
중딩 때 우연히 도훈과 만나 그의 팬이 된 녀석은 내년에 투표는 못 해도 이미 도훈의 팬카페 정회원이었다.
내년에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시간이 되는대로 도훈의 선거운동을 돕겠다는 얘기를 벌써 하고 있었다.
정작, 녀석의 아빠인 안준식도 같은 선거에 출마할 텐데 말이다.
사실, 독자 후보 추진을 주장하는 지역위원회 내부의 목소리에 대응을 고민하던 안준식이 도훈의 팬카페에 눈길을 준 건 차인호를 만나기 훨씬 전에 딸이 정회원이 됐다고 자랑한 때부터였다.
어찌 됐든, 안준식의 그런 결정은 이런저런 상당한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것으로 그는 그 결정을 되돌릴 생각이 없었다.
“... 나도 어떻게든 밀어 붙···.”
띵동.
중얼거리던 안준식이 핸드폰을 집어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 하하. 뭐 이런···.”
- 생각해 보니 의원님 후원회가 있었네요. 팬카페 가입 철회 안 하시면 저도 의원님 후원회 가입하고는 동네방네 소문낼 겁니다. (시장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된 안준식.
안준식의 후원회가 실제로 있지만, 애초에 운계면 주민인 도훈은 안준식의 선거구에 살지도 않았다.
시장이 시의원 후원회에 가입한다는 발상 자체가 웃긴 걸 떠나서, 도훈은 그간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강정문 도지사나 김용진 의원과 꽤 친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도훈이 정말로 안준식의 후원회에 가입하면, 전국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대흥시에서는 제법 화제가 될 게 분명했고 몇몇 사람의 심기를 건드릴 것도 틀림없었다.
대자당 소속인 차혜진은 말할 것도 없고 운계면 선거구의 민의당 시의원인 장민호는 물론, 의장인 심남진도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의원들과 무난했던 관계가 헝클어지는 것.
당연히 도훈에게도 안준식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 아닐 터.
“... 이 친구가 머리를 써도 꼭···.”
살짝 미간을 찌푸린 안준식이 중얼거리는데 또 메시지가 왔다.
띠링.
띠링.
“......”
연달아 들어온 두 개의 메시지에 말문을 잃은 안준식.
- ‘미 투’입니다. (조영배 비서관)
- ‘미 쓰리’입니다. (송두진 비서실장님)
“... 허허허.”
안준식이 졌다는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11월 어느 날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