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49화 (250/279)

249. 열혈… - 1.

“... 휴우, 또 오고야 말았군. 이 철이.”

시장실 한쪽 테이블에 올려진 서류의 산을 보며 영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런 영배에게 말했다.

“이젠,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어? 몇 번 경험했잖아.”

“저게 적응하고 어쩌고 할 양이냐?”

“... 많긴 하다. 작년보다도 많으니까 할 말이 없긴 하네.”

“예산팀장님도 이날만 되면 저절로 긴장된다고 하시더라. 그 양반이 예산 짜는 걸 한두 번 겪으셨냐? 그런 양반도 긴장된다고 하시는데, 내가 벌써 적응 어쩌고 하면 안 되지.”

“... 말은 잘해요, 하여튼.”

“휴우.”

도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고 영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내년도 예산안을 이차적으로 취합하는 날.

내년도 예산안에 관한 논의는 시청에서도 시의회에서도 진즉부터 시작됐다.

한정된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배정받으려는 경쟁은 시청 내부적으로도 언제나 치열하지만, 시의회에서는 그간 도훈과 영배가 경험한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했다.

현 시의원들이 다시 선거에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짜는 예산안이기 때문에, 각자의 공약이라든가 선거구 현안을 챙기는 데 예전보다 더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도훈에게도 선거 전 마지막 예산이라는 건 마찬가지지만, 도훈은 뭘 만들겠다거나 뭘 짓겠다거나 하는 공약을 내걸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아무튼, 그런 논의가 시청 각 부서나 시의원과 일차적으로 이루어진 뒤, 본격 조정을 위해 각 부서나 의원의 요구를 취합해 출력해 모아놓은 결과가 저 테이블 위 서류의 산이었다.

예산안 자체는 ‘적당한 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예산안의 타당성이나 필요성을 부연하는 자료들이 더해졌기에 저만큼이 됐다.

“차혜진 표 폭탄이 저 중에 얼마나 되려나?”

“... 모르지. 다만, 확실히 작년보다는 퍼센티지가 높겠지.”

“이번엔 다른 의원들도 많이 냈던데 차 의원은 그런 의원들보다 더 냈다는 게 참···. 그 사람 눈에만 그렇게 돈 쓸 일이 잘 보이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지.”

차혜진 의원은 이번에도 엄청난 양의 반영 요구를 했고, 일차적으로 거르고 걸렀건만 아직도 시의원 중 가장 많은 반영 요구안을 제출한 상태.

“얼핏 보니까 작년과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던데.”

“그 사람도 절박하겠지.”

작년, 요구안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이 퇴짜 맞은 요구안을 다시 들이밀고 또 들이밀었다가 도훈이나 시청 공무원뿐 아니라 시민에게까지 욕먹은 차혜진.

그때 이후로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차혜진에 관한 시민의 평가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재선에 도전할 그녀로서는 ‘반전’의 계기가 절실한 상황.

그녀도 이번 예산안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지, 이번에는 아주 전투적으로 요구를 관철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었다.

“... 아무튼, 저걸 보니 입맛이 싹 사라졌어. 당분간 저절로 다이어트 하겠네.”

“입맛 사라졌어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어. 안 그러면 예산안 논의 버틸 재간이 있겠어? 해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 하긴.”

영배가 입맛을 다시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이잉.

“어라? 혜란 선배네.”

액정을 확인하고 구석으로 걸음을 옮긴 영배가 잠시 혜란과 통화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묘했다.

“... 왜 그래?”

“좀 엉뚱한 소리를 들어서.”

“... 엉뚱한 소리?”

“응.”

“뭔데 그래?”

“저번에 조민구 시장 주먹질 사건 있었잖아.”

지금은 11월 초.

조민구 시장의 주먹질 사건으로부터 2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게 왜?”

“조민구 시장은 탈당했고, 조민구 시장한테 한 대 맞고 마주 주먹 휘둘렀던 젊은 당원도 당에서 징계를 내리네, 어쩌네 했었잖아.”

“... 그랬지.”

휴게소 폭력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2주.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당 지지율이 3% 이상 급락할 정도로 폭력사건을 바라보는 민심은 싸늘했다.

그 때문에 조민구는 등 떠밀려 탈당했고, 조민구와 가장 적극적으로 싸운 젊은 당원과 시의원들에게도 내부 징계가 내려진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 젊은 당원도 탈당했다는데?”

“... 그래서?”

“그리고 조민구 시장 말대로 OO 시를 떠나서 대흥시로 이사를 왔대.”

“... 엥? 진짜?”

“혜란 선배가 그렇게 말하는데?”

“... 그걸 혜란 선배가 어떻게 아신대?”

도훈의 질문에 대한 영배의 답은 이랬다.

“그 사람이 대전에 직장이 있고 출퇴근하는 사람이라는데, 네 팬카페에 가입 신청했대. 그 사람이랑 부인이랑 두 사람이.”

“......”

“가입 신청할 때 사정 얘기를 자세히 적어놔서 알게 되셨는데, 혜란 선배가 판단을 못 내리시겠다네.”

“......”

“아무래도 사건 있었던지 얼마 안 된 상황이잖아. 혜란 선배가 따로 연락해서 물어보셨단다. 꼭 가입해야겠냐고.”

“... 그런데?”

“꼭 가입하고 싶다고 했대. 그리고 널 만나보고 싶다고도 했단다.”

“... 하하.”

“혜란 선배 말로는 장난 아니게 열혈 지지자라는데?”

“... 하하하.”

“이 사람들 카페 정회원으로 받아줘야 하느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너랑 상의해 보고 전화한다고 했어.”

“......”

조민구가 자신에게 비판적인 민의당 당원들에게 대흥시로 이사 가버리라고 말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장 맨 앞에서 맞서던 사람이 탈당까지 하고 진짜 이사를 왔을 줄이야.

“... 정말로 날 만나보고 싶대?”

“혜란 선배와 통화할 때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는데?”

“흐음.”

도훈이 묘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다가 벽에 걸린 달력에 시선을 줬다.

“오늘이 목요일이고 주말에 우리 출근할 거니까···.”

“만나보게?”

영배의 질문에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사정이야 몰라도 우리 시로 새로 이사 온 시민인데, 어차피 바빠도 밥은 먹을 테니까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하자.”

“점심?”

“응. 가급적이면 혜란 선배도 함께.”

“흠. 알았어. 그렇게 연락하마.”

영배가 혜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탈당에 이사까지 행동력이 아주 대단한데···. 어떤 사람인지 갑자기 궁금해지네.”

인터넷이나 방송에 소개된 영상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던 남자의 얼굴을 상상하며 도훈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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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점심시간, 운계면 사거리의 부대찌개 집.

도훈과 영배가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혜란이 손을 흔들었다.

혜란 곁의 남녀가 먼저 인사했다.

“차인호라고 합니다.”

“이세희예요.”

“김도훈입니다. 반갑습니다.”

“비서관 조영배입니다.”

이제 서른이 갓 넘었다는 남자는 도훈이 예상했던 강직한 이미지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성격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외모는 ‘곱상하다’는 표현이 딱 맞을 만큼 흰 피부에 선이 가는 부드러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또한, 성격도 그리 쾌활한 건 아닌지 도훈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수줍음이 묻어났다.

“뵙게 돼서 정말 영광입니다.”

“영광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죠. 저도 사람인데요.”

살짝 상기된 표정인 차인호의 말에 도훈이 답하자, 차인호의 아내가 웃으며 덧붙였다.

“남편 말 진심이에요, 시장님. 지난 지방선거 직후부터 시장님께 아주 관심이 많았거든요.”

“하하, 감사합니다.”

음식을 주문한 뒤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탈당을 하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네. 당에서 하는 짓이 너무 답답해서요. 휴우.”

한숨을 내쉰 차인호가 부연했다.

“잘못은 명백히 조민구 시장이 했잖습니까? 독불장군으로 행동했던 건 논외로 하고 그날 일만 해도 그래요. 우연히 휴게소에서 마주치자 버럭 소리 지르며 욕한 것도 그 사람이고, 제풀에 흥분해서 절 주먹으로 갑자기 때린 것도 그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그 영상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고, 민심이 나빠지니까 저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당원들에게도 징계 운운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징계를 내리더라고요. 그리고는 저희에게 ‘민심을 다독이려면 어쩔 수 없다. 당을 위해 참아다오.’ 그러는데 도저히 참아지지를 않았습니다.”

차인호를 비롯한 현장에 있던 민의당 당원들에게는 가장 가벼운 징계가 내려졌다는데, 차인호는 도저히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단다.

다른 당원들도 심정은 차인호와 비슷했는지 탈당계를 제출한 건 몇이 더 있다는데, 이사까지 결행한 건 차인호가 유일했다.

“그럼 원래 이사를 계획했던 게 아니시겠네요?”

“OO 시에 연고가 있는 건 아닌데요. 전세계약이 끝나가고 있던 건 맞습니다. 하지만, OO 시 안에서 이사하려고 했죠. 대흥시는 원래 계획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사하고 나니까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졌습니다.”

“아, 네.”

영배가 묻자 차인호가 답했고 그의 아내가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

“새로 이사한 집이나 주변 환경이 전보다 나아요. 대전으로 출퇴근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환경이 나아진 게 저도 좋더라고요.”

곱상한 차인호나 차분한 이미지의 아내나 모두 ‘열혈’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두 분 모두 대전으로 출, 퇴근하시는 겁니까?”

“아, 네. 저희 모두 박사과정 중이라서요.”

남편인 차인호와 아내인 이세희 모두 박사과정 중이었다.

대학원생일 때 결혼했다는 두 사람은 양쪽 집안에 손 벌리지 않고 살림을 시작했다는데, 가진 돈으로 대전에서는 만족할 만한 집을 구할 수가 없어서 OO 시에서 생활을 시작했단다.

“선배님께 열혈 지지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두 분 모두 예상했던 것보다 차분하셔서 좀 마음이 놓입니다.”

“열혈 지지자면 좋은 것 아닌가요?”

차인호가 묻자 도훈이 답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열혈이라는 단어가 좀 감정에 치우친 듯한 느낌을 주잖습니까? 전 시민들의 감정적인 지지도 감사합니다만,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시민들께서 이성적으로 냉정히 평가해주시는 게 더 좋아서 말입니다.”

“역시, 시장님은 조민구 시장에 비할 분이 아니네요. 조 시장이라면 뭐가 됐든 자기 좋다는 얘기라면 입이 쭉 찢어질 텐데요. 열혈 지지자라면 아마 환장을 할 겁니다.”

“하하, 글쎄요.”

차인호의 말에 도훈은 그냥 담담히 웃기만 했는데, 내내 보고만 있던 혜진이 입을 열었다.

“시장님이 아직 차인호 씨를 잘 모르니까 그런 얘기 하시는 거예요. 두고 보면, 제가 괜히 ‘열혈’이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니라는 걸 아실 걸요?”

“두고 보다뇨?”

“호호. 인호 씨, 그거 보여드려요.”

“네, 회장님.”

차인호가 백 팩에서 두툼한 문서철 하나와 노트북을 꺼내더니 노트북 전원을 켜 뭔가를 띄웠다.

그리고는 노트북을 돌려 도훈과 영배에게 보여줬다.

“... 대흥시 재집권 플랜?”

화면에 떠오른 글자를 이구동성으로 읽은 도훈과 영배.

“이게 뭡니까?”

“제가 만들어본 겁니다. 시장님도 내년 지방선거에 출마하실 것 아닙니까? 그때 참고하시라고요.”

“... 이 문서는요?”

“아, 이건 같은 내용입니다. 먼저 문서로 작성했는데, 오늘 시장님과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이 PPT를 따로 만든 거고요.”

“... 잠깐 봐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조금 수줍은 듯하던 사람은 어디 가고 장난 아니게 강렬하게 눈을 빛내는 차인호.

도훈이 노트북을 조작해 PPT의 페이지를 넘겼다.

서른 장으로 구성된 PPT는 대흥시의 유권자 지형 분석부터 시작해 도훈의 강점과 약점, 선거전략 제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쩍 살피기만 했지만, 만든 사람이 무척 공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내용 역시 일반인이 즉흥적으로 쓴 수준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뗀 도훈이 여전히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고 있는 차인호에게 질문했다.

“... 저기 박사과정 중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전공하시는 분야가···?”

“정치학입니다.”

“... 아, 네.”

“제가 정치학을 전공해서가 아니라 그냥 소시민으로서도 시장님께 무척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지난 2년간 민의당 당원으로 있으면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어쩌다 자격 미달인 시장을 만나서 말도 안 통하고 짜증만 났었는데, 차라리 탈당하고 이렇게 대흥시로 온 게 다행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

붉게 상기된 표정과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빛의 차인호와 그런 차인호에는 못 미쳐도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도훈을 바라보는 그의 아내.

“호호. 이분들 어떻게 할까요, 시장님?”

“......”

회원가입 승인 여부를 묻는 혜란의 질문에 도훈은 잠시 답을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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