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새우등 - 2.
도훈이 도지사 비서실장에게 전화해 회의 장소 제공이 어렵겠다는 이야기를 한 얼마 뒤 안준식이 다시 비서실을 찾았다.
OO 시 시의원들을 만나고 그들의 부탁을 수용한 것에 감사하는 안준식에게, 도훈은 비서실장과 통화한 내용을 말해줬다.
“... 그러셨습니까?”
“네. 비서실장님도 OO 시 지역위원회 분들이 회의 때 뭔가를 하려 한다는 걸 알고 계시더군요.”
“... 흠. 모를 수가 없겠죠. 조 시장 측도 알고 있다는데.”
도훈은 비서실장의 요청을 단순히 거절만 한 것이 아니라 OO 시 시의원들을 만나 간략하게나마 관련 사실을 알게 됐고, 그들의 요청을 받아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것까지 얘기했다.
굳이 그런 설명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강정문 도지사를 생각하면 그 정도의 예의는 보이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거기 시장님은 시의원 경력도 있으시니, 소통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 도대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듣고 있던 영배의 말에 안준식이 쓰게 웃고는 말했다.
“경력이 오래된 정치인 치고 자기 나름의 독선이나 아집이 생기지 않는 분이 드물죠.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시지만 바로 그 점, 독선이나 아집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빛이 나는 거고 오래 정치 일선에 계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영배가 공감을 표했고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OO 시 지역위원회는 완전히 두 동강이 났겠습니다?”
“그렇죠. 절대다수와 극소수로요. 물론 절대다수가 현 시장을 비판하는 쪽이랍니다.”
“... 쯧쯧.”
“우리랑은 정반대죠.”
“네?”
“우리 대흥시 상황이랑은 절대 반대라는 말씀입니다. 아시면서 왜 모른 척하십니까?”
“... 아, 네.”
대흥시나 OO 시나 대전에 딱 붙어있으니 지역위원회 구성원 중 젊은 층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OO 시 지역위원회에는 독선적인 시장에 비판적인 이들이 절대다수라면, 대흥시는 도훈에게 호의적인 이들이 ‘절대’까지는 아니라도 다수인 상황이었다.
“시장님, 정당에 소속될 생각 아직도 없으시죠?”
“네.”
“... 쩝.”
조심스러운 질문에 즉답하는 도훈의 모습에 안준식이 입맛을 다셨다.
도훈이 만능은 아니고 시정의 모든 부분에서 성공만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사업의 준비부터 시행, 이후 평가에 이르기까지 일반 시민부터 담당 공무원, 사업 관련자 등 가능한 많은 이들과 꾸준히 소통하며 잘못과 실수를 줄이는 건 정당 관계자라면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쩝. 김 시장이 입당만 하면 우리 지역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시정 전반과 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모르는 부분이 있더라도 금세 자기 것으로 습득하는 총명함, 누구에게나 예절 바른 소탈함, 매사에 시정을 우선하는 책임감 등 도훈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안준식이 ‘제일’로 꼽는 건 바로 그 꾸준하고도 광범위한 소통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훈에게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고 안준식이 생각하는 건 바로 ‘무소속’을 고집한다는 것이었다.
“설마, 안 의원님도 제게 입당 권유하시려는 겁니까?”
“아뇨. 저는 예나 지금이나 시장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진심이시죠?”
“물론입니다.”
물론, 안준식은 도훈의 그 고집을 이해하고 존중했지만, 아쉬운 건 여전히 아쉬운 것이었다.
주변에서 당신이 시장과 가장 친하니 ‘어떻게 좀 나서 보라’고 등을 떠미는 요즘 같은 때는 더더욱.
다음 지방선거 때 우리도 ‘시장 후보’를 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 있고, 도훈보다 더 훌륭한 시장 후보를 찾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현실적인 판단이 있었다.
아무리 지방 소도시라지만, 명색이 집권여당인데 선거에 시장 후보조차 못 내는 건 ‘못난’ 모습이 아니냐는 자괴감 섞인 우려.
안준식은 민의당 소속이 아니더라도 이미 훌륭한 도훈과 더 밀접하게 협력하면 되는 문제라고 설득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의 주장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건 아니었다.
‘김 의원도 나랑 같은 생각인데···.’
입장이 있으니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지역구 국회의원인 김용진조차 안준식과 같은 의견이었다.
지방선거 전에 도훈이 민의당 가입하게끔 ‘꼬셔보라고’ 가장 안준식의 등을 떠미는 게 김용진 의원이니 더 말해 뭐할까.
“우리 시 문제가 아니니 제가 관심 가질 일은 아닙니다만, OO 시 문제가 잘 마무리됐으면 좋겠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아마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안준식은 도훈과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 OO 시 시의원들의 부탁을 들어줘 고맙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영배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엉뚱한 쪽으로 불똥이 튀지는 않겠지?”
“설마.”
“모르지. 전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선거와 관련이 있잖아. 선거라는 게 보통 문제냐? 얼마나 괴상망측한 요물인지 너도 모르지 않잖아.”
“흐음.”
도훈은 심드렁한 소리를 내고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 저 자식은 꼭 이런 일에는 무신경하다니까.’
그런 도훈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영배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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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시장, 군수 회의가 열리는 날 점심시간, 도훈은 영배와 함께 도청이 있는 홍성에 와 있었다.
“...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거예요?”
“물론이죠. 안 그래도 업무량이 늘어서 삼시 세끼 안 챙겨 먹으면 얼마 못 가 쓰러지고 말 걸요?”
“그럼 쉬질 못해서 그런가? 저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세경 씨.”
“호호. 일 끝내고 쉬면 금방 회복될 거에요.”
점심을 함께 먹고 영배가 자리를 비켜줬기 때문에 도청 청사와 가까운 카페에는 도훈과 세경 단둘이 마주 앉아있었다.
프로젝트팀은 11월까지 가동될 예정이었기에, 세경은 아직 한 달이나 더 ‘과로’를 해야만 하는 처지.
통화는 자주 해도 10월 들어 두 사람이 얼굴을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도훈은 핼쑥해진 세경을 보고 좀 놀란 상태였다.
“... 이거 도지사님께 항의해야겠는데요.”
“호호. 정말요?”
“네. 사람 얼굴이 이렇게 될 정도로 과로를 시키다니···, 당연히 항의해야죠.”
“... 호호. 그러지 마세요, 도훈 씨. 지사님도 저 못지않게 과로하시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부탁이에요.”
도훈이 너무도 정색하고 말했기 때문에 세경은 어색하게 웃고는 그를 말렸다.
그녀가 핼쑥해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도훈은 당장에라도 강정문에게 달려가고픈 마음이었다.
한참 수다를 떨던 두 사람이 시계를 봤다.
“일어날까요? 점심시간 다 끝나가는데.”
“그러죠. 저도 곧 회의 시작이니까요.”
도훈이 영배에게 문자를 보내고 세경과 함께 걸었고, 곧 다른 카페에서 영배가 나와 합류했다.
영배도 세경에게 걱정의 말을 했다.
“세경 씨,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휴가 달라고 하세요. 그렇게라도 보상을 받아야죠.”
“호호! 안 그래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은 끝나고 모두 특별휴가 3일 받기로 했어요.”
“에게? 겨우 3일이요? 일주일은 줘야죠.”
“3일이 어디에요. 주말 붙이면 5일을 연달아 쉬는 건데.”
“흐음, 그건 그러네요. 그럼 휴가비라도 듬뿍 달라고 하세요.”
“아마 나오긴 할 건데, 큰 기대는 안 해요. 우리 지사님 짠돌이거든요.”
두런두런 대화하며 도청 청사에 들어선 세 사람의 눈에 예상치 못한 장면이 들어왔다.
“... 이거 설마···?”
“맞는 것 같은데? 그때 그 사람들이야.”
청사 안에는 검은색 마스크로 입을 가린 십여 명의 남자들이 손에 팻말을 들고 한쪽에 일렬로 서 있었다.
도훈과 영배는 그들 중 인사를 나눈 시의원들이 있는 걸 알아봤다.
- 조민구 OO 시장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 불통의 대명사, 조민구 시장은 각성하십시오.
- 소신과 아집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시위대를 구경하는 사람들 외에 청사 경비원들이 근처에 모여 있었지만, 어떤 협의가 있었는지 지켜만 볼 뿐 침묵시위를 말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훈 씨, 저 올라갈게요.”
“아, 네. 몸 챙기면서 일해요.”
“네. 도훈 씨도요.”
세경이 사무실로 올라간 뒤에도 도훈과 영배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시위하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아직 회의까지는 시간이 좀 있었으니까.
“시위치고는 팻말의 글도 공손하네.”
“아무래도 여기가 도청이라는 걸 의식했겠지. 형식도 침묵시위잖아.”
공공기관 내부에서 여러 사람이 큰소리를 내며 시위를 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되고 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을 터.
도청의 문제도 아닌 OO 시의 일을 거론하는 것이기에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었다.
“... 소속이 어딘지는 안 밝혔네.”
“그만큼 부담스러운 거겠지, 저 사람들도.”
“하기야 도지사부터가 민의당 사람이고, 기초단체장 중에도 민의당 사람들이 다수니까.”
“어찌 보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걸 각오하고 하는 일이야.”
“... 그만큼 대머리 시장님이 문제가 있는 걸 테고.”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하다가 2층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회의까지 10여 분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대다수 단체장은 이미 도착한 상황이었다.
“안녕하세요, 군수님.”
“아, 김 시장님. 오랜만이에요.”
“네. 건강하시죠?”
“물론이죠.”
단체장 중 가장 나이가 어렸고 무소속이어서 도훈은 여야 할 것 없이 단체장들과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은 도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OO 시 시장 조민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 시장님은요?”
“아마 도지사님과 얘기하고 있을 겁니다. 1층 로비에··· 김 시장도 봤죠?”
“네.”
대화를 마친 도훈이 회의자료를 읽고 있는데, 조민구 시장이 들어왔다.
벌게진 얼굴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이, 강정문 도지사와 어떤 성격의 대화가 오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필, 조민구의 자리는 도훈의 옆이었는데 그는 자리에 앉는 대신 가방과 회의자료를 챙기는 게 아닌가?
“... 회의 참석 안 하십니까?”
조민구와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조민구는 싸늘한 눈빛으로 잠시 노려보다 씹어 내뱉듯 답했다.
“김 시장이나 열심히 회의해요.”
“네?”
“난 컨디션이 나빠서 먼저 갑니다. 젊고 인기 많은 김 시장 같지가 않아서 말이오.”
“......”
“아, 내 몫까지 열심히 해요. 내 것도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든 두꺼운 회의자료를 도훈 앞에 내던지듯 내려놓는 조민구.
퉁!
싸늘하던 그의 눈빛이 일순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듯이 활활 불타는 것을 도훈은 놓치지 않았다.
“... 빌어먹을, 내 더러워서···.”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은 조민구가 회의실을 나갔고, 그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의 표정도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조민구가 강정문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도훈이 그에게 이런 무례를 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 대충 사정 알죠? 조금만 참아줘요, 김 시장님.”
옆에 앉은 민의당 소속 단체장이 부탁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독이듯 속삭였기에 도훈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 휴우, 네.”
도훈이 소리 죽여 심호흡하는데, 강정문이 들어섰다.
강정문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비어있는 조민구 시장의 자리에 시선을 줬고, 내내 회의실 안에 있던 직원 하나가 얼른 달라붙어 뭐라 속삭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바로 회의 시작하죠.”
자리에 앉는 강정문 도지사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 인사말은 생략하기로 합시다. 첫 번째 안건 발제 부탁합니다.”
“발제 시작하겠습니다.”
도지사의 눈짓을 받은 간부 하나가 마이크를 잡았고, 강정문의 시선이 도훈을 향했다.
‘조 시장이 저 사람 반만, 아니 반의반만 닮았더라도···.’
회의자료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리는 강정문의 눈이 착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 강정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