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45화 (246/279)

245. 열정, 그 자체 - 3.

시간이 한 달 정도 흘러 9월 말이 된 토요일 오후.

도훈은 순심이를 데리고 진주네 집에 와 있었다.

준수가 순심이와 제 방에서 노는 가운데,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는 도훈과 진주.

진주가 방금 도훈이 한 얘기에 살짝 놀라서 질문을 던졌다.

“... 정말로? 끝내 이번 가을 안에 식 안 올리기로 한 거야?”

“안 올린다기보다 못 올린다는 게 맞지. 나나 세경 씨나 원래 바빴지만, 요즘 세경 씨가 맡은 프로젝트로 아주 바쁘다니까. 당분간 계속 바쁠 예정이고.”

“네 아버님이나 세경 씨 어머님이나 그렇게 서두르자고 하셨다면서. 서운해하시겠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다음 주말에 다시 가족끼리 식사하고 약혼반지 교환하기로 했어.”

“오오? 약혼식을 하는 거야?”

“약혼식이 아니라 반지만 교환한다고.”

도훈이 심드렁하게 답했지만, 진주는 눈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훈이 진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 왜 날 그런 눈으로 봐?”

“뭐? 내 눈이 어때서?”

“내가 세경 씨랑 약혼식 하는 게 아니라 너랑 약혼식 하냐? 뭔 그런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냐고?”

“이 자식이? 야! 잠깐 대리 만족 좀 하면 안 되냐? 멋진 약혼식 상상 좀 해봤다. 물론, 파트너는 네가 아니라 내 남편이고.”

“멋진 약혼식 아니니까 상상하지 마. 그냥 식당에서 밥 먹는 것뿐이니까.”

도훈의 타박에 순간 발끈했지만, 진주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원래는 가을에 가족과 가까운 친구만 초대해 식을 올리려던 계획을 연기하게 된 도훈이었으니까.

“안타깝지 않냐?”

“안타까울 것까진 없지. 프로젝트 끝나고 하면 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열정적이고 충실하다는 걸 아는데 좀 늦추는 게 뭐 대수라고.”

도훈의 말에 닭살 돋는다는 표정으로 팔을 긁는 진주였다.

“어우,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던가? 막 간지럽다.”

“... 너랑 네 남편은 안 그러는 줄 아냐? 결혼 초기에 너희 부부는 훨씬 심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만.”

“흥! 우린 아직도···, 아니 그때보다 더 애틋해!”

톡 쏘아붙인 진주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그 프로젝트라는 게 언제 끝날 줄 알고?”

“... 목표가 11월이라니까, 아무리 늦어도 올해 안에는 끝나겠지.”

“내년이 되면 네가 바쁠 거 아니야. 6월에 선건데.”

“우리가 갖출 건 다 갖춘 결혼식을 할 것도 아니고, 식 올리고 바로 신혼 여행을 떠날 것도 아니잖아. 가족들하고 친구들 불러 모아서 밥 먹을 여유만 있으면 돼.”

“세경 씨가 서운해하지 않아?”

“전혀.”

지난주 데이트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미루기로 합의를 봤다.

세경이 얼마 전 시작된 도청 프로젝트팀의 부팀장을 맡게 됐고, 그 팀이 11월까지 활동할 예정이기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아무리 주말에 하루 정도 온전히 휴식을 보장한다지만, 주 중에는 야근이 계속될 정도로 바쁘고 주말 중 하루 정도는 꾸준히 일해야 할 정도라니 도리가 없었다.

이 일로 강정문이 도훈에게 ‘결혼을 방해하게 된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하다’는 전화까지 했었다.

도훈은 그럴 필요 없다며 웃어넘겼으나 강정문은 이모님, 그러니까 세경의 어머니 뵐 면목이 없다며 정말 미안해했었다.

“아, 참. 혜란 선배가 너 만나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안 그래도 나한테 쪽지 보내서 그런 얘기 하시더라.”

“쪽지? 무슨 쪽지?”

“카페 쪽지. 내가 네 친구 진주가 맞냐고 물으시던데?”

“카페 쪽지? 설마 너···?”

“어, 맞아. 나도 가입했다.”

“... 진짜?”

“응. 카페 정회원이 200명이 넘었어.”

“......”

“준회원은 600명이 넘는다.”

“... 하아. 어째 처음부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더라니.”

도훈이 묘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혜란이 만든 팬카페가 온라인에 문을 연 지 몇 시간 만에 수십 명의 회원을 모집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혜란 부부가 동호회에 가입했다가 도훈과 친한 이들을 잔뜩 만났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그녀와 남편이 건강을 위해 꾸준히 함께 해왔다는 운동이 우연하게도 탁구였고, 그녀 부부가 가입한 동호회가 다름 아닌 도훈이 여전히 회원 자격을 보유한 탁구 동호회였다.

그 사정을 알게 된 혜란은 반색하고 팬카페를 만들 거라 홍보를 했고, 자연스레 동호회 회원 여럿이 가입을 하게 된 터.

‘회원들 얘기 들어보니까 탁구 실력도 상당하다던데···. 에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전의 팬카페에 무심했던 것처럼 도훈은 혜란이 만든 팬카페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무리 지인이 운영하고 대흥시 시민만이 정회원이 될 수 있는 팬카페라지만,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잘 감이 안 와서였다.

반면, 영배는 팬카페에 관심을 많이 두고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아내인 선아를 통해 팬카페 활동을 모니터랑 하는 모양이었다.

진주는 도훈이 한숨을 내쉬는 걸 보고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네 팬카페 준회원 중에 도연이도 있어.”

“... 도연이? 정말이냐? 영배 형은 나한테 그런 얘기 안 했는데?”

“영배 오빠도 모를걸? 글 같은 거 안 쓰고 주로 구경만 하는 것 같던데. 나도 톡으로 걔랑 연락하다 알았어.”

“... 기자가 그런 곳에 가입해도 된대?”

“나야 모르지. 되니까 가입하지 않았겠냐?”

“... 하하.”

“혹시 아니? 너희 아버님도 가입했을지?”

“... 설마.”

“자신 있어?”

“......”

도훈이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예비 장모님 즉, 세경의 어머니도 팬카페 준회원이었다.

팬카페에 관한 얘기를 듣고 당장 가입하겠다는 세경을 말렸더니, 그녀가 자기 대신 어머니를 가입시켰던 것.

‘... 잘하면 나랑 세경 씨 빼고 온라인 카페모임에서 사돈 가족이 다 만날 수 있겠네. 그나저나···.’

정회원이 200이 넘었다는 게 은근히 신경 쓰이는 도훈이었다.

대흥시 시민만 정회원이 될 자격이 주어지니, 근 한 달 만에 시민 200명 이상이 모인 조직이 된 것이다.

그 정도면, 아무리 팬카페와 거리를 두고 싶은 도훈이라고 해도 접촉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요즘도 부지런히 시민들 모임에 참석하는 도훈이었지만, 200이 아닌 20명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도 흔치 않았다.

팬카페를 동해서라면, 대흥시의 바닥 민심이라든가 시민의 요구사항을 더 쉽고도 자세하게 수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간 혜란은 도훈에게 팬카페 만들었다는 사실 말고는 팬카페의 일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뭔가 언급이 있을 것 같은 눈치이기도 했고.

‘... 오후에 사무실에 나가면 얘기를 해봐야겠군.’

도훈이 팬카페와 관련한 생각을 이어갔다.

마주 앉은 진주가 그런 도훈의 속내를 짐작하고 빙긋이 웃고 있었다.

-----

몇 시간 뒤, 시청 비서실.

두진과 영배와 마주 앉은 도훈이 진주네 집에서 떠올렸던 생각을 입에 올렸다.

도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색하며 먼저 찬성하고 나선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영배였다.

“진짜지? 이야, 드디어 네가 정신을 차렸구나!”

“... 뭘 차려?”

“정신을 차렸다고, 인마! 애초에 너 좋다는 사람들, 지지한다는 사람들이랑 거리를 둔다는 게 말이 되냐?”

“......”

도훈이 말없이 영배를 째려봤다.

홍보 담당이라서인지 예전부터 팬카페가 생기면 어떻게든 도훈을 설득해 카페와 접촉하고 좋은 관계를 이어가자고 주장했던 영배.

하지만, 이번 혜란이 만든 팬카페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도훈의 동의를 받은 적이 없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아무리 나 좋다는 사람들이라도 전국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뭔가를 하는 건 불필요한 일일 수도 있어. 이번 팬카페의 정회원이 대흥시 시민이라서 다를 뿐이야. 말이 안 되긴 뭐가 말이 안 돼?”

“어쨌거나! 나는 대찬성이다.”

도훈은 영배에 이어 두진에게 시선을 줬고, 두진도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찬성이네. 사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우리 와이프도 거기 회원이야.”

“... 진짭니까?”

“그래. 나도 며칠 전에 알았어. 가입은 나도 모르게 카페 생긴 다음 날에 했더라고.”

“... 하하.”

도훈이 살짝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는데, 영배가 끼어들었다.

“확실하진 않은데, 홍 주무관님 부인도 팬카페 회원일지 몰라.”

“정말?”

“눈치가 그래. 나는 와이프 아이디로 꾸준히 카페 들어가서 모니터링을 했잖아. 그런데 홍 주무관님도 카페에서 나오는 얘기랑 분위기를 아는 듯한 눈치였어.”

“......”

“아무튼, 어떤 사람들이 가입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팬카페를 통해 민심을 파악한다거나 요구사항을 수렴한다는 건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아무리 팬카페라지만, 그쪽도 역할을 해줘야지.”

“......”

“연예인 팬카페도 아니고 시장 팬카페니까 그쪽도 그런 부분은 수용할 수 있을···.”

영배가 열심히 이야기하다 멈추더니 뭔가에 정신이 팔린 도훈의 무릎을 손으로 툭 건드리고 말을 이었다.

“야, 무슨 생각해? 중요한 얘기하는 중인데?”

“... 나도 중요한 생각 중이었어.”

“무슨 생각?”

“200명이 넘었다는 정회원 중에 혹시 시청 공무원 가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아닐까?”

“뭐?”

“......”

영배는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도훈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얘기가 괜히 있겠어?”

“......”

“... 그러면 어쩌려고?”

말문을 잃은 영배 대신, 두진이 물었고 도훈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러지 못하게 단속··· 아니, 그러지 말라고 부탁이라도 해야죠.”

“누구한테? 카페 회원들에게?”

“카페 회원들에게도 말을 전하고 직원들에게도 메일을 보내야죠.”

“... 하하.”

“... 허허.”

영배와 두진이 동시에 허탈하게 웃었지만, 도훈의 진지한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야. 팬카페 가입하는 건 자기 마음인데, 뭘 그러지 말라고 부탁을 해?”

“... 그러게 말일세. 우리가 그래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그래 달라고 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거니까 말입니다.”

“......”

“어떻게든 제게서 흠을 찾으려는 사람이 보기에 좋은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공무원 본인이 시장의 팬카페에 가입해 활동하는 게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건 공무원들이 잘 알 터.

그리고 공무원들의 가족이 그러는 것도 어찌 보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공무원들이 잘 이해할 터였다.

특히, 누군가 도훈을 노리는 상황이라면 이 팬카페 문제는 예기치 못한 문제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두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 자네 말에 일리가 있군. 그냥 흐뭇하게만 여겼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어.”

“... 쩝. 그러게요.”

두진과 영배의 말에 도훈은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쩌려고?”

“혜란 선배를 만나려고. 만나서 얘기해야지.”

두진과 영배가 좀 머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도훈이 혜란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30여 분 뒤.

도훈이 혜란이 혜란의 집 근처 카페에 마주 앉았다.

차분히 만나자고 한 용건을 꺼낸 도훈.

담담히 듣기만 하던 혜란은 도훈의 말이 끝난 다음에야 반응을 보였다.

“풋!”

“......”

“호호호호호!”

“......”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린 혜란은 잠시 후 눈가의 눈물을 닦고는 말을 이었다.

“넌 어째 남한테 폐 끼치기 싫어하는 그 성격이 시장까지 됐는데도 전혀 안 변했니?”

“... 꼭 남한테 폐를 끼칠까 봐 드린 말씀이 아니에요. 결과적으로는 저한테도 좋지 않을 수 있어서 말하는 거니까요.”

“어찌 됐든, 예나 지금이나 그런 기질은 여전하구나.”

“... 기질이요?”

“결벽증 기질.”

“그건 저를 너무 좋게만 생각하시는 거고요. 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니까요?”

도훈이 연거푸 말했지만, 혜란은 담담히 웃기만 했다.

‘자신을 위한 말’이라는 것도 이해하지만, 팬카페 카페지기답게 ‘좋게’ 보려는 그런 눈빛이랄까.

한참 그렇게 도훈을 바라보던 혜란이 입을 열었다.

“안심해도 돼.”

“네?”

“대흥시 시민이라는 걸 인증한다고 곧바로 정회원으로 승급시켜준 거 아니야. 정회원 승급 절차 중에 그런 내용이 있어. 혹시 가족이 대흥시 소속 공무원이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고. 좋은 마음으로 가입하려는 건 이해하는데 뜻하지 않게 네게 누가 될 수도 있다고.”

“... 그래요? 언제부터···?”

“카페 만들고 사흘인가 지났을 때부터. 나도 바보는 아니잖니.”

“......”

“정회원 모두의 가족관계를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설사 공무원 가족 중 좋은 마음으로 회원이 되려고 시도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 글을 읽었다면 마지막까지 고집하지는 않았을 거야. 실제로, 회원가입 신청했다가 철회한 사람이 좀 되거든.”

“......”

도훈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문을 잃었고 혜란은 그런 도훈을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우리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열심히 해. 네 발목 잡는 일 안 하도록 주의할게.”

“... 선배.”

“네게 조용히 도움을 줄 방법을 여러모로 고민 중이야.”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네가 차분히 열정을 품고 일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좋고 만족스러워. 그러니 내가 잘 중심을 잡고 조절할게.”

“......”

‘열정을 품고 빛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선배님인 것 같네요.’

혜란의 말에 뭐라 답을 못하는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