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43화 (244/279)

243. 열정, 그 자체 - 1.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의 어느 날, 대흥시청 시장실.

시장실 문이 열리고 작은 체구의 남자 하나가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 왔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힘들지 않으셨어요?”

“전혀. 지하철에, 기차에, 네가 보낸 승합차 타고 오느라 내내 에어컨 바람 쐬면서 왔어.”

“하하. 시원한 차 한잔 드릴까요?”

“그러자.”

“알겠습니다.”

시장실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영배에게 차를 부탁한 도훈이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오늘은 도시발전계획 논의 위원회 회의가 있는 날.

2주 혹은 3주 간격으로 열리는 위원회 회의는 대개 오후에 잡혔고, 윤 교수는 항상 점심 전에 시청에 도착했다.

위원회 회의가 있는 날이면 도훈은 웬만해서는 다른 일정을 잡지 않고 윤 교수와 점심을 먹으며 위원회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상황에 따라 안준식이 함께하는 적도 있었고, 다른 위원이 여럿 참여해 점심을 먹는 일도 흔했다.

회의가 끝난 후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윤 교수가 뒤풀이에 오래 참석하기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 자리 잡은 방식이었다.

윤종일 교수가 도훈이 소파에서 읽던 서류를 뒤적거리다 질문을 던졌다.

“이건 뭐냐? 월말 평가서?”

“아, 네. 사업 평가섭니다.”

“시에서 진행하는 모든 사업을 매달 평가하는 거야?”

윤 교수의 물음에 도훈이 고개를 가로젓고 답했다.

“그건 아니고요. 시작한 지 1년 미만인 사업은 매달 담당 부서가 진행 상황을 자체 평가해 보고하도록 했거든요.”

“1년 미만?”

“네. 1년이 넘어가면 평가서 제출 간격을 좀 늘립니다. 분기에 한 번으로요. 그다음에는 반년 단위가 되고요.”

“직원 평가만 있는 게 아니고 시민 평가도 있는데?”

“정책에 영향받는 시민들로부터도 평가서를 받도록 했습니다. 아무래도 직원들보다 더 냉정하게 사업을 평가할 수 있을 테니까요.”

“흠. 그래?”

윤 교수는 대충 들추던 서류를 좀 더 신경 써서 읽기 시작했다.

영배가 시원한 둥굴레 차를 가져다 놓고 나간 뒤에도 얼마간 더 그러고 있다가 윤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건 학생들 대상으로 한 사업인가 보다? 중학교 애들 평가서가 잔뜩 있는데?”

“네. 문화활동 지원 프로그램입니다. 그건 차라리 평가서를 받기가 쉽죠. 아이들에게 부탁하니까, 다들 잘 써주더라고요.”

“하하. 좋은 말은 별로 없는데? 애들 되게 솔직하네?”

“뭐, 그렇죠.”

도훈이 머쓱하게 웃었고 윤 교수가 문득 생각난 걸 입에 올렸다.

“아, 그러면 우리 위원회도 매달 평가서 쓰냐?”

“모르셨어요? 당연하죠. 교수님 말고는 다 씁니다.”

“그래? 왜 나한테는 쓰라고 안 했냐?”

“때가 되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아직은 교수님이 전반적으로 위원회를 주도하시는 상황이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평가를 받으시는 게 맞지, 평가하시는 건 아니죠. 그리고 저한테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하시니까, 교수님 의견은 제 평가서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너도 써?”

“네.”

“흐음. 그래? 이거 다들 나에 관해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네?”

“하하. 다들 좋은 얘기만 하던데요.”

“설마 그럴 리가. 내가 회의 때마다 사람들을 얼마나 갈구는 줄 나 스스로가 잘 아는데.”

“... 하하.”

공부부터 시작한 도시발전계획 논의 위원회는 기초 학습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공부할 양이 많기도 했지만, 초기에 이런저런 위원들의 사정으로 진도를 잘 못 나간 이유가 컸다.

윤 교수는 그럴 때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딴 식으로 민폐 끼칠 거면 당장 그만두라.’고 불호령을 내렸고, 젊은 여자 시민 위원을 울린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런 윤 교수의 활약 덕분에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고 위원회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는 분위기가 완전히 정착된 상태였다.

도훈과 윤 교수는 차를 마시며 자연스레 위원회와 관련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느새 영배도 합류해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길 얼마.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도훈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점심 드시러 가시죠.”

“그럴까? 아, 맞다. 그 얘기 깜박했네.”

“뭘요?”

“조만간 대흥시에 누가 이사 올 거다.”

“이사요? 누가요?”

“글쎄다. 지금 얘기해 주면 재미가 없지. 다만 힌트는 주마.”

“... 힌트요?”

“그래, 인마.”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는 윤종일 교수.

영문 몰라 하는 도훈을 보는 그의 얼굴에 장난기가 짙어졌다.

“... 힌트가 뭡니까, 교수님?”

“흐흐. 아마 너 그 사람 만나면 깜짝 놀랄걸? 너도 잘 아는 사람이거든.”

“......”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 네.”

싱긋 웃어 보인 윤 교수가 앞장섰고 영배가 얼른 뒤를 따랐다.

‘도대체 누구를 얘기하신 거지? 전혀 짐작 가는 사람이 없는데···.’

도훈이 전혀 감을 못 잡겠다는 표정으로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장실을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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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일 교수가 대흥시에 다녀가고 일주일이 조금 넘게 지난 어느 날 아침.

시청에 출근한 도훈은 차에서 가방을 챙겨 내리다 청사 현관 쪽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니, 방금 청사에 들어간 사람이 왠지 낯이 익어서.”

“그래? 아는 사람인 거야?”

“... 글쎄.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낯이 익어.”

영배와 대화하며 청사에 들어간 도훈은 좌우로 고개를 돌려 청사 복도를 훑었다.

출근하는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낯이 익다고 느껴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봤나?’

그렇게 중얼거린 도훈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한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

“... 어라?”

“어?”

놀란 도훈이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고 굳어졌고, 여자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도 일순 놀랐다가 대번에 반가운 표정을 했다.

“도훈아. 너, 도훈이 맞지?”

“... 선배님? 윤 선배님 맞으시죠?”

“이야! 반갑다!”

여자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도훈을 덥석 껴안았고, 도훈은 얼떨결에 그녀를 마주 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러게요.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야, 너 하나도 안 늙었다? 관리라도 받니?”

“하하. 전혀요. 그러는 선배야말로 그대론데요. 처녀라고 해도 믿겠어요.”

“어머, 얘 좀 봐? 예전엔 완전 숙맥이었는데 이젠 접대성 멘트도 할 줄 아네? 호호! 아, 아는 사이라고 반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 지금은 어엿한 시장님인데.”

“괜찮아요. 편히 말씀하세요. 주변에 듣는 사람도 마침 없네요.”

“그래? 고마워. 호호!”

반가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도훈과 여자.

도훈은 잠시 그녀와 반갑게 인사하다가 옆에 선 영배를 뒤늦게 의식하고 소개했다.

“영배 형, 인사해. 이분은 윤혜란 씨야. 우리 대학교 국문학과 선배님이셔.”

“안녕하세요. 조영배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윤혜란이에요.”

윤혜란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영배가 맞잡았다.

“그냥 선배일 뿐인 게 아니고 윤종일 교수님 큰딸이기도 해.”

“아, 그래?”

접대성 미소를 띤 영배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고, 도훈이 아까부터 머리에 떠올라 있던 걸 입에 올렸다.

“윤 교수님이 누가 여기 이사 올 거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설마 그게 선배님이었어요?”

“얘는? 딱딱하게 선배가 뭐냐? 예전처럼 누나라고 불러.”

“하하. 차차 그렇게 할게요. 여하튼, 대흥시로 이사 오신 건가요?”

“응. 맞아. 우리 남편이 이번에 천안에서 대전으로 발령이 났거든.”

윤혜란은 도훈보다 8살이 많았고, 그녀의 동생은 4살이 많았다.

도훈이 시민단체 활동을 하며 윤종일 교수와 친분이 생겼을 때, 윤 교수의 집에 여러 번 불려 다니며 얼굴을 익혔다.

윤 교수의 둘째 딸은 도훈과 친하지도 않고 안 친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관계였지만, 큰 딸인 윤혜란은 도훈이 학교 후배라는 것과 시민단체 활동가라는 걸 알고는 꽤 귀여워했었다.

도훈이 제대하고 복학한 다음 그녀가 오랜 연인이던 사람과 결혼했다는 얘길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아이 있지 않으세요? 걔들은 어쩌고요?”

“아, 고 2짜리 아들 하나 있는데, 걔는 기숙사 있는 학교에 다니거든. 어차피 한 달에 한 번 집에 올까 말까 하니까 크게 상관은 없지. 방학 때는 내려와 있으면 될 테고. 원래는 대전에 집을 구하려고 했는데, 아빠가 여기가 사정이 더 좋을 거라고 하시더라고. 알아보니까 같은 값에 훨씬 환경이 좋은 집을 얻을 수 있질 않겠어? 남편 직장까지 차로 30분도 안 걸리니까 이쪽으로 정했지.”

“그렇군요.”

10년도 넘게 소식이 오가지 않은 사이였지만, 얼마 전부터 윤종일 교수와 자주 얼굴을 마주치다 보니 생각보다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네가 여기 시장이라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서 전입신고를 하러 일부러 시청으로 와봤지. 그런데 이렇게 거짓말처럼 딱 만나네.”

“하하. 그러셨군요. 정말 반갑네요.”

“아, 이런. 너 바쁠 텐데 내가 붙들고 있었네. 올라가 봐. 이젠 나도 여기 시민이니까 앞으로는 종종 볼 수 있겠지.”

“그래야죠.”

도훈은 윤혜란과 전화번호를 교환한 뒤 헤어졌다.

계단을 오르는데 옆에서 영배가 궁금한 듯 작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저 선배랑 많이 친했냐?”

“... 글쎄. 친했다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귀여움을 받았지. 우리보다 8학번이나 선배야. 까마득하지.”

“그랬던 것치고는 너도 조금 전에 아주 스스럼없던데?”

“형 말대로 사람 대하는 기술이 늘었나 봐. 선배가 너무 반가워하시니까 나도 자연스레 그렇게 행동하게 되더라고.”

“하하.”

실소를 흘린 영배가 말을 이었다.

“흐음. 어쨌든 확실한 한 표가 늘어났네. 아닌가? 남편분을 생각하면 두 표인가? 그나저나 저분 성향은 좀 어떠냐?”

우뚝.

영배의 질문에 도훈이 계단을 오르다 그대로 굳어졌다.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도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어느새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 왜, 왜 그래, 너?”

“... 형이 말을 꺼내서 이제야 생각났어.”

“... 뭐가?”

“아까 그 선배 성향.”

“... 그게 왜?”

어리둥절해 하는 영배에게 도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형, 윤 교수님 성향이 어떻다고 생각해?”

“윤종일 교수님?”

“응.”

“... 거침없고 할 말은 다 하시는 분이지. 상대가 누가 됐든지 간에 말이야. 아마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 앞에서도 똑같은 모습이실 걸?”

“... 잘 봤네. 그 양반은 광화문 광장에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이 가득 찼어도 그 앞에서 홀로 자기 얘기 꿋꿋이 하실 분이니까.””

“그런데 그게 왜?”

“... 그 선배는 아버지보다 더해.”

“뭐?”

“윤 선배의 정치적 성향은 윤 교수님보다 더 진보적이고, 개인적 성향은 윤 교수님보다 더 꼬장꼬장한 데다가 훨씬 더 ‘강성’이라고.”

“... 진짜?”

“응. 그 선배가 날 무척 귀여워했는데 내가 왜 친해지길 꺼렸는지 이제야 생각이 나네.”

“......”

“귄위적이거나 폭력적인 건 전혀 아닌데···. 토론을 너무 즐기거든.”

“......”

어느새 긴장감 가득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리는 도훈.

믿기지 않는다는 영배의 표정을 본 도훈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 선배 앞에서는 아무쪼록 말조심해.”

“... 왜?”

“잘못 얘기했다가 토론이라도 시작되면 끝이 안 나.”

“... 지, 진짜?”

“응. 내가 두 번 정도 호되게 겪었거든. 두 번 다 날을 셀 뻔했어.”

“......”

“특히 술 마셨을 때는 정말 조심해야 돼.”

“... 시간이 많이 지났고 이제 다 큰 아들까지 있는데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 글쎄. 이제 우리 동네 이웃이 됐으니···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가능성은 별로···.”

“......”

띠링.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 소리에 도훈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액정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굳어졌다.

“... 혹시 그 선배냐?”

“... 어.”

“뭐라고 했길래 그래?”

“......”

도훈이 말없이 핸드폰을 돌려 액정을 영배의 코앞에 내밀었다.

- 정말 반갑다, 도훈아. 이제 이웃이고 우리 동네 대장님인데, 조만간 맥주나 한잔하자. 너 우리 남편 못 봤잖아? 그 사람도 우리 동문이야. 금요일 저녁은 어떠니?

영배가 고개를 들다 도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도훈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똑똑히 목격한 영배.

진중하기로 유명한 김도훈이 누군가의 ‘맥주 한잔하자’는 말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 본 영배였다.

“... 하하. 오래간만에 본 분이니까 만나면 잘해. 나는 좀 천천히 만나···.”

띠링.

“... 는 게 좋···.”

‘천천히 만나는 게 좋겠다’라고 얘기하려던 영배가 입을 다물었고, 도훈이 손을 움직여 액정에 시선을 줬다.

- 아, 그 비서관분도 꼭 같이 보자. 너랑 친한 친구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면 나도 안면을 제대로 터야지. 알았지? 너랑 비서관분 괜찮은 시간이 언젠지 상의해서 연락 줘. 나랑 남편이 맞출게. 수고!

“... 안 나가면 안 되겠지?”

‘겁난다’는 표정으로 묻는 영배에게 도훈이 ‘딱하다’는 표정을 하고 답했다.

“... 안 나가도 되지. 뒷일은 오로지 형이 감당해야 하겠지만.”

“......”

“휴우.”

“......”

뚜벅.

말을 마친 도훈이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깨가 축 처진 도훈의 두어 걸음 뒤에서 얼굴을 잔뜩 구긴 영배가 말없이 뒤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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