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감사 - 1.
6월이 되고 다음 지방선거까지 남은 시간이 1년 미만이 됐다.
마치 ‘D-365’가 신호탄이라도 되듯, 대한민국 곳곳에서 차기 지방선거 출마 희망자들이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흥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런저런 낯익고 새로운 얼굴들이 부지런히 시민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1년이라는 긴 시간이 남았지만, 그 1년간 부지런히 얼굴을 팔고 다닌다 해도 모든 유권자에게 얼굴을 알리기에는 부족한 시간.
출마 희망자들에 대한 시민의 반응은 젊고 참신한 인물에 대한 기대, 전혀 예상 못 한 사람에 대한 놀람, 누구나 그럴 거로 생각했던 사람에 대한 실소 등 무척 다양했다.
어쨌든, 시민들의 입에 출마 희망자들이 조금씩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여기에도 그럴 반찬 삼아 점심을 먹는 이들이 있었다.
“그 양반, 출마 준비한다는 얘기 들었냐?”
“누구 얘기하는 거야?”
“지난 선거 때 민의당 시장 후보였던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 나도 기억이 안 나네. 근데 그 사람이 다시 출마 준비한다고?”
“출마 선언을 하는 건 아닌데, 지역위원회 사람들과 은근슬쩍 접촉을 시도하며 냄새를 풍긴다네? 정작 민의당 지역위원회 분위기는 아주 싸늘한데도 말이야.”
“... 그럴 만도 하지.”
도훈이 출마하고 당선됐던 지난 지방선거 때 민의당 시장 후보는 낙선 후 대흥시에서 꾸준히 활동하기는커녕 얼굴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었다.
그는 원래 대전에 개인 회계 사무소를 가진 회계사였는데 당선을 확신하고 뛰어들었다가 낙선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시 대전으로 근거지를 옮긴 이후 정치판에 발을 끊다시피 했다.
애초에 대흥시에 오래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지난 선거 얼마 전 이사를 왔던 인물이었다.
“지금이 어떤 시댄데···. 유권자들 눈초리가 절대 고울 리가 없다는 걸 당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지.”
“그렇지.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계속 지역 관리를 했다면 또 모르겠으나 낙선 후 대흥시에 완전히 발을 끊었기 때문에 도훈과 영배가 이름조차 기억을 못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선거가 점점 가까워지니 은근슬쩍 다시 도전해보려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이 유권자는커녕 당 지역위원회에서 환영받을 리가 없었다.
“자네, 그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나?”
“안준식 의원이요. 그제 점심 먹고 ‘식후땡’ 하다가 자판기 옆에서 마주쳤습니다.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얘기하더라고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허허. 어지간했나 보군. 자네에게 그런 얘기를 다 하고.”
“그러게 말입니다. 그 사람 말고는 민의당 내에 아직은 시장에 도전하겠다는 사람이 딱히 없는가 보더라고요.”
오늘은 6월의 두 번째 일요일.
도훈과 영배, 두진은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점심을 먹으러 시청 청사 앞 식당가 백반집에 와 있었다.
갑자기 선거에 관한 얘기가 나온 것은 조금 전 자리를 비운 옆자리 사람들이 ‘누가 시의원에 도전한다네, 도의원엔 누가 나온다네 어쩌네’하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런 ‘희망자’들에 대한 도훈의 반응은···.
“그분들 많이 바쁘겠군.”
“... 아무리 바빠도 우리만큼이야 하겠냐?”
“우리보다 더할 수도 있지. 당선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아, 그리고 안 의원한테 민의당 말고 다른 당 사정도 좀 들었는데 말이야. 그게···.”
왠지 기운 없어 보이던 영배가 갑자기 신이 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걸 도훈이 심드렁한 말로 제지했다.
“밥이나 먹읍시다, 형.”
“......”
“얼른 먹고 들어가서 일해야지. 안 그러면 해지기 전에 집에 못 들어가.”
“......”
“어제도 늦게 끝났는데, 오늘도 늦으면 내가 형수랑 애들한테 아주 미안하다고.”
“... 휴우, 알았다, 알았어.”
도훈의 말에 한숨을 내쉰 영배가 다시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고 도훈과 두진도 묵묵히 식사에 집중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토, 일요일 모두 출근해야 할 정도로 지금 시장실에는 일이 쌓여 있는 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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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대흥시청 3층 시장실.
“... 아무리 생각해도 예비후보들보다 우리가 더 바쁠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르지.”
영배의 푸념에 도훈은 읽던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답했다.
“지난달도 바빴지만, 이번 달도 바쁘구나. 휴우.”
“지난달만 바빴어? 지지난달도 그 전 달도 바빴지. 아니, 안 바빴던 적이 거의 없지. 새삼스럽게 왜 그래?”
“그냥···. 쩝,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
“... 일찍 들어갈래?”
“... 이 서류의 산속에 너 하고 실장님을 놔두고 집에 가라고? 하하. 집에 가서 참 마음 편하겠다.”
영배의 투덜거림에 가만히 서류를 보던 두진이 입을 열었다.
“나도 이 서류 뭉치를 보고 있으면 좀 질리긴 해. 있던 의욕도 사라질 광경이긴 하지. 하필,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훨씬 서류가 많잖나.”
“그렇죠, 실장님? 저만 그런 거 아니죠?”
“허허. 그래. 평생 공무원으로 살아온 나도 이런 서류 뭉치 앞에서는 입맛부터 떨어져. 안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에휴. 그러니까요.”
영배와 두진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에 도훈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잠깐 쉬죠.”
“... 에고.”
“허허허.”
맥빠진 소리를 내며 제각기 소파에 몸을 기대는 세 사람.
세 사람 앞의 테이블에는 서류 뭉치가 높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이 정도인데, 직원 숫자가 훨씬 많은 도나 광역시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인사를 진행할까요?”
“다 나름의 시스템이 있겠지. 하지만, 거기서도 인사 시즌만 되면 홍역을 치르는 건 비슷할걸? 인사가 만사라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중요한 만큼 어렵기도 한 거지.”
두진의 말에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인사가 어려운 건 꼭 공무원 사회만이 아니겠죠. 저는 잠깐 겪고 말았지만, 사기업 승진 경쟁도 장난이 아니니까요. 유력한 상급자와 온갖 접점을 만들려고 사력을 다하거든요. 직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하죠.”
“그렇지. 인생은 ‘줄’이라는 얘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돌아다닌 지 오래됐잖아.”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시장실 테이블에 수북이 쌓인 건 인사 관련 자료.
한눈에 봐도 많은 양이었지만, 이건 7월 정기 인사에 포함될 대흥시청 소속 모든 직원에 관한 게 아니라 승진 추천이 된 사람들만의 자료였다.
이미 담당 부서에서 1차로 걸러진 것들을 다시 검토하는 자리.
공정한 검토를 위해 시장실에서만 이걸 하는 게 아니라 부시장 전경완이 다른 팀을 꾸려 같은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시장팀의 검토 결과와 부시장 팀의 검토 결과를 종합해 인사위원회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질 예정이었다.
“팀장님은 통화가 기네.”
“... 그러게.”
시장실 검토 팀에는 자치행정과 시정 인사 담당 팀장이 포함되어 있어 오후부터 계속 함께 서류를 검토하다가 전화를 받으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어디서 청탁 전화 들어온 거 아니야?”
“어허. 장난이라도 그런 소리 말게. 특히, 인사 팀장 앞에서는 절대로.”
“... 하하. 물론이죠. 안 계시니까 그냥 해보는 소립니다. 농담입니다, 농담.”
정색하는 두진에게 머쓱하게 답하는 영배.
“농담도 가려서 해야지, 형.”
“... 알았어. 에휴, 맥이 빠지니 입까지 사고 치네.”
“입이 무슨 죄냐? 뇌가 문제지. 아닌가? 뇌는 또 무슨 죄야? 그냥 사람 자체가 문젠가?”
“... 아, 적당히 좀 넘어가자. 잘못했다니까?”
“큭큭. 그러니까 잘하라고. 잘못하지 말고.”
도훈이 영배를 향해 실없이 웃고는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지금의 인사 팀장은 도훈이 취임하고 처음으로 인사를 할 때 가장 공들여 고른 사람이었다.
두진에게 추천받은 후보를 도훈과 조상님이 시청과 주민센터를 돌며 일일이 확인해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검소하고 청렴한 데다가 공무원으로서의 명예를 중히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도훈이 그를 인사 팀장으로 승진 발령했을 때 놀란 사람도 많았으나 하급 직원 사이에 환영의 목소리도 컸다.
당시 두진이 비서실장으로 활약하는 것에 가려져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도훈도 딱히 그와 접점을 늘리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이 인사 팀장으로 일하고 있기에 도훈은 인사팀을 통해 올라오는 1차 자료를 신뢰할 수 있었다.
만약 도훈이 인사 팀장을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높고 우람한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겠지.’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시장실 문이 열리고 인사 팀장이 들어왔다.
‘응? 저 양반, 표정이 왜 저래?’
대흥시청의 팀장급 이상 직원 중 표정 때문에 별명이 유명한 이가 둘 있었다.
하나는 ‘부처님’으로 알려진 예산팀장으로, 예산과 관련한 온갖 사람에게 별 해괴한 이야기를 들어도 잃지 않는 담담한 미소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다른 하나가 다름 아닌 인사 팀장인데, 인사와 관련한 별의별 사람과 상황을 겪으면서도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인사 팀장의 별명은 ‘시청 석상’이었다.
그런 ‘시청 석상’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좀 놀라고 당혹스러운 것이었기에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세요, 팀장님? 무슨 일 있습니까?”
“저기···. 들어오다 들었는데, 당직실에 감사원에서 연락이 왔답니다.”
“... 감사원이요?”
“네. 내일 감사원에서 감사를 나온답니다.”
“... 내일이요?”
“네. 일반적인 기관운영감사가 아니라 특정감사라고 했다는데···.”
“......”
감사원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운영 및 회계와 관련한 감사 권한이 있으니 감사를 나오는 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감사가 지방자치단체의 자율권을 침해한다는 의견이 있어 활발하다거나 일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라는 점에 비추어 ‘의외’인 건 맞았다.
게다가, 내일부터 시작되는 감사를 일요일인 오늘 시청 당직실에 연락해 통보하는 것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나오면 받으면 되···.”
“소식 들으셨습니까, 시장님?”
의도치 않게 도훈의 말을 끊은 건 인사 팀장 등 뒤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전경완 부시장.
조금은 긴장된 모습의 그가 말을 이었다.
“내일 우리 시청에 대한 감사가 시작된다는군요.”
“... 네. 방금 들었습니다.”
도훈의 시선이 전경완 부시장의 얼굴에서 인사 팀장의 얼굴을 거쳐 두진의 얼굴에 이르렀다.
셋 모두 의아함과 긴장이 섞인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세 분 표정을 보니 감사가 보통 일이 아닌 건 맞는 건 같네요.”
도훈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고 시선이 마주친 인사 팀장이 머쓱한 표정을 했다.
“경찰이나 검찰 수사도 아니고 저승사자가 온다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차분하게 응하면 될 겁니다.”
“... 감사를 온다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방식이 좀··· 신경 쓰입니다.”
굳은 표정으로 말하는 전경완.
두진도 전경완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직 경험에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던 이들이니,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예민할 터.
도훈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독이듯 말을 이었다.
“저는 제 나름으로는 공정하고 투명하게 일해왔습니다. 직원들이 그렇게 일하도록 독려하고 감독했다고 생각하고요. 부시장님이나 실장님도 저와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시장님. 하지만···.”
“그러니 별로 걱정되는 게 없습니다.”
“......”
눈빛도 표정도 ‘평온’ 그 자체인 도훈의 모습에 두진과 전경완은 뭐라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우리 하던 일 계속하죠. 내일부터 감사라는 데, 이거라도 끝내 놔야 그나마 덜 정신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도훈이 사람들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려놨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간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다 몸을 움직였다.
쿵.
전경완 부시장이 문을 닫고 나갔고 인사 팀장은 소파에 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륵.
스르륵.
도훈과 인사 팀장이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영배와 두진이 각자 서류를 손에 들고서도 걱정스러운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