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급한 건 따로 있다 - 2.
도훈과 세경이 도훈의 아버지와 마주 앉아있던 바로 그 시각.
영배는 대흥시의 집이 아닌, 충청남도 모처에 차를 세워놓고 운전석에 앉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질러, 말아?”
중얼거리는 영배의 목소리에서도 심각함이 묻어났다.
“... 걸리면 그냥 욕 잔뜩 얻어먹고 끝나려나? 도훈이 그 자식 진심으로 화나면 정말 무서운데···.”
오래 어울려 지내다 보니 도훈에 관해 속속들이 아는 영배.
아버지도 두 번 만났고 동생인 도연이와도 친하며 당사자인 도훈과는 친구를 넘어 형제에 가까운 사이였다.
딱히 어떤 구구절절한 사연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영배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인정할 정도로 도훈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껏 어울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아무리 학원 강사 일에 무료함을 느꼈고 삶의 변화를 꿈꿨더라도, 도훈이 아니었다면 막무가내나 다름없는 출마와 선거운동, 그리고 당선 이후 비서관까지 맡으며 그를 돕지는 않았을 터.
“... 분명 그 자식을 위한 일이지만, 들키면 감당이 안 될 수도 있는데···.”
도훈과 영배는 서로에게 속을 속속들이 터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물론, 거기에는 진주도 포함되고 오늘 영배가 이 자리에 와서 고민하는 것은 진주의 ‘동의’도 영향을 끼쳤다.
- 알려. 무조건 알려. 이런 일에 대처할 때는 현실적인 힘을 가진 조력자가 있으면 당연히 좋은 거 아니야? 믿을 수 있고 비밀도 지켜줄 만한 사람인데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게 멍청한 짓이지. 도훈이 녀석은 이럴 때 너무 벽창호야. 이럴 땐 오빠가 나서야지.
게다가 몇 안 되는 ‘김도훈 사단’에서도 진듯하게 무게 중심을 잡는 두진도 동의하질 않았나.
- 찬성하네. 물론 김 시장은 아주 싫어하겠지만, 비서라는 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도 자네도 김 시장 비서니까 무엇이 김 시장에게 더 좋은 일인지 당연히 고민해야 해. 욕이 아닌 매를 맞는 일이 있어도 말이야. 이 일만큼은 김 시장의 뜻을 거스르는 게 옳다고 생각하네. 다만, 여기저기 알리지 말고 그분 한 분에게만 그래야겠지.
진주와 두진이 했던 말을 되새긴 영배가 도훈의 얼굴을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다.
“쩝, 맘먹고 왔는데도 살이 떨리네.”
평소 한없이 온화하기만 한 것 같지만, 도훈에게도 보통 사람처럼 절대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예를 들어 가족과 관련된 일 같은 부분.
그 영역이 침범당하거나 해서 도훈이 진심으로 화내면 정말 무섭다는 걸 영배는 모르지 않았다.
도훈이 진심으로 화내는 걸 본 적은 거의 없지만, 이번 일은 도훈이 진심에 진심으로 화를 낼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도.
심지어 말로 그치지 않고 때릴지도 모른다.
“... 이 자식이 주먹질은 나보다 잘하던가?”
도훈에게 얻어맞는 장면을 상상해 본 영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가 나서 폭발한 도훈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한참 상상하고 있던 영배가 드디어 다시 결심하고 중얼거렸다.
“... 지르자. 절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인데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꾹.
영배가 핸드폰 액정을 눌렀고 곧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뚜르르르르.
다행히도 핸드폰을 꺼놓지는 않은 상황.
얼마간 신호가 가다가 드디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어, 어? 저, 저기요.”
- 네, 말씀하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게 예상했던 목소리가 아니어서 살짝 당황한 영배.
이 번호는 남자, 그것도 나이 50이 넘은 중년 남자의 것이었는데 웬 앳된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질 않은가.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재차 확인한 영배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죄송한데 이거 강정문 도지사님 전화번호 아닌가요?”
- 음, 누구신데요?
“아, 저는 대흥시 김도훈 시장 비서관인 조영배라고 합니다.”
- ... 조영배 비서관이요?
“네. 도지사님과 몇 번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 잠깐만 기다리세요.
‘... 휴우. 맞는가 보군.’
당황했던 영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곧 기대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조영배 비서관? 나 강정문입니다. 우리 애가 전화를 받았네요.
“아, 안녕하세요. 도지사님. 주말에 쉬시는데 개인 번호로 전화 드려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 하하. 아니에요. 이 번호 내가 알려줬잖습니까.
강정문이 개인적으로 대흥에 와서 중국관 뒷방에서 도훈과 술 마실 때 몇 번 어울렸던 적이 있는 영배.
영배가 개인적으로 도훈과 절친한 친구 이상이라는 걸 안 강정문은 영배에게 외부에 잘 공개하지 않는 개인 번호를 알려줬었다.
아무리 본인이 알려줬더라도, 언감생심 도지사 개인 번호로 전화할 일은 없을 거로 생각했던 영배였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 그래요. 얘기해 보세요.
“아, 그게 전화로 말씀드리기는 좀 그런 일이라서요.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홍성에 와 있습니다. 직접 뵙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 ... 홍성에 와 있다고요?
“네, 지사님.”
- 음, 정말 중요한 일인가 보네요?
“그렇습니다.”
- 혹시 김 시장 일입니까?
“네. 그런데 도훈···. 아니, 김 시장은 지금 제가 홍성에 와 있는 걸 모릅니다.”
- ......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강정문이 얼마간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 알겠습니다. 우리 집 근처에 조용한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봅시다. 내가 문자로 주소 찍어줄게요.
“감사합니다.”
- 감사는요. 나 바로 나가겠습니다. 카페에서 봅시다.
뚝.
통화를 마친 영배가 한숨을 내쉬었고, 곧 강정문에게서 문자가 왔다.
띠링.
부르릉.
문자를 확인하고 차의 시동을 켠 영배가 운전대를 잡고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 어우, 몇 번이나 편하게 만났던 사람인데 왜 이렇게 떨리냐. 릴렉스, 릴렉스.”
부웅.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차를 모는 영배의 표정이 점점 차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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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홀로 출근한 도훈이 순심이를 품에 안고 시장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셨어요, 시장님.”
“안녕하세요, 시장님.”
“아, 안녕하세요. 두 분 다 주말에 잘 쉬셨어요?”
“호호. 물론이죠. 간만에 근무가 없었잖아요.”
“저는 와이프랑 딸내미 데리고 소풍 갔었습니다.”
지연, 영진과 반갑게 인사한 도훈이 안고 있던 순심이를 내려놨고, 지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제 민 과장님이랑 시장님 아버님께 인사드리러 갔다는 아주 따끈따끈한 정보가 있던데요?”
“... 그 따끈따끈한 정보의 출처는 아주 입 싼 조 비서관입니까?”
“호호. 그렇죠, 뭐.”
“하여간···.”
“어떻게 됐어요? 잘 됐죠?”
묻는 지연이나 귀를 쫑긋 세운 영진이나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건 마찬가지.
도훈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네. 잘 됐습니다. 너무 잘 돼서 문제였죠.”
“너무 잘 되다뇨?”
“아버지께서 세경 씨를 마음에 들어 하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날 잡자고 오늘이라도 상견례 하자고 성화셨거든요.”
“하하, 그랬습니까?”
“말도 마세요. 세경 씨랑 마주 앉은 지 5분도 안 돼서 저한테 당장 세경 씨 어머니께 전화해서 상견례 날짜 잡으라고 얼마나 닦달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호호호!”
“하하하!”
지연과 영진이 박장대소하고 도훈도 쓰게 웃었다.
이제 지난 일이니 쓰게 웃고는 있지만, 어제 아버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던 걸 다시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죽어도 두 번은 못할 짓이지.’
도훈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다 뭔가를 깨닫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실장님이랑 조 비서관은 아직입니까? 조 비서관이 오늘은 혼자 온다고 했는데.”
도훈과 영배의 집이 가까워 둘은 대개 같이 출근했는데, 영배가 오늘은 알아서 간다고 문자를 보내 함께 오지 않았다.
영배는 어제 홍성에서 늦게 돌아와서, 두진에게 강정문과의 만남 결과를 설명하러 오늘 아침 홀로 먼저 출근했다는 걸 다른 이들이 알 턱이 없었다.
“아뇨. 진즉에 나오셨죠. 잠깐 어디 가셨나 보네요.”
지연이 말하기가 무섭게 비서실 문이 열렸다.
“하하, 제가 누굽니까. 강···. 아, 나오셨습니까, 시장님.”
웃으며 두진과 대화하며 들어서던 영배가 도훈을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오셨습니까.”
뒤따라 들어선 두진도 미간에 함박웃음을 머금었다가 얼른 표정을 푸는 걸 도훈은 놓치지 않았다.
“강 뭐요?”
“네?”
“방금 강 뭐라고 했잖아요. 강 뭐요?”
“하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 지사’라고 하려다 ‘강’에서 멈추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영배가 얼버무렸다.
하지만, 도훈이 어떤 위인인가.
“... 아침부터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네? 하하! 뭐, 그렇죠.”
움찔하는 영배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
수상쩍은 영배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저도 좀 같이 알죠. 그 좋은 일이 도대체 뭔지?”
“그, 그게···.”
영배가 도훈의 질문에 답할 말을 궁리하며 필사적으로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어제, 강정문과 도훈 모르게 만나 오정민과 도훈의 옛 악연을 설명하고 오정민이 작성하게 한 것으로 추측되는 문서를 보여준 뒤, 사태 예방을 위해 혹은 만약의 일이 터지면 도와줄 수 있겠냐는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강정문 본인도 오정민을 제어하기 위해 섣불리 나서기보다는 주의 깊게 지켜보겠다는 얘기를 한 뒤 도훈이나 세경에게 비밀로 하는 데 동의했다.
- 나도 오 의원을 볼 때 좀 찜찜한 구석이 있긴 했습니다만, 이런 사정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당연히 협력해야죠. 김 시장이 다른 데 일절 눈 돌리지 않는 바르고 훌륭한 시장이라는 것도 있지만, 일이 지금처럼 잘 풀리면 곧 김 시장은 나와 더는 남남이 아니게 돼요. 조 비서관이 김용진 의원 말고 내게 사실을 털어놓고 만약의 경우 도와달라 말한 건 아주 잘한 결정입니다. 김 시장은 모르는 게 낫겠어요. 나도 비밀 지키겠습니다. 나 혼자만 알고 있도록 하지요.
미리 사태를 예방하거나, 혹여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민의당 내 유력 인사 중 도훈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놓고 도훈 몰래 진주, 두진과 상의한 영배.
셋은 만장일치로 강정문을 선택했다.
안준식이 도훈과 아주 잘 협력하는 데다가 차기 시장으로 자기 당 소속도 아닌 무소속인 도훈을 지지할 정도이지만, 시의원인 그의 힘과 영향력은 한계가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인 김용진은 스스로 청렴하고 개혁적인 데다가 도훈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이제 재선의원이라 3선인 오정민에게 선수에서부터 밀린다.
다선 국회의원 출신 현직 도지사에 때가 덜 묻고 올곧은 사람이라 평가받는 데다가 도훈에게 사심 없는 호의가 깊은 강정문이 적격이었다.
더구나 그는 세경과 외사촌 사이이질 않은가.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담담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도훈의 시선에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영배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 하하! 다, 다른 게 있겠습니까? 어제 시장님 아버님과 민 과장님의 만남이 아주 잘 됐다는 거죠.”
“... 그래요?”
“네!”
“... 잘 된 걸 어떻게 압니까? 아직 제가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에, 에이. 척하면 착이죠. 제가 아는 시장님 아버님이면 민 과장님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랑한다고 하실 분입니다. 잘됐죠? 그렇죠?”
“... 흐음.”
“......”
심드렁한 도훈의 반응에 영배는 물론 두진도 긴장했다.
- 이 사실은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됩니다.
다짐에 또 다짐을 넘어 협박에 가까운 신신당부를 했던 도훈이 아닌가.
대책회의가 끝나고 도훈과 세경이 먼저 자리를 뜨자마자, 그 당부를 어길 작당 모의를 했고 그걸 이미 실행까지 했다는 걸 들키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다.
‘... 아, 꼭 이럴 때만 눈치가 빨라서는···.’
잔뜩 긴장한 영배가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도훈이 말을 이었다.
“... 뭐, 그렇다고 치죠.”
도훈은 영배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았지만, 다른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왜 그런지 뭘 숨기는지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영배와 비슷한 심정으로 순간 마음을 졸였던 두진이 얼른 끼어들었다.
“자, 조회 준비하시죠.”
“네!”
“... 그러시죠.”
두진의 ‘도움’에 반색한 영배가 씩씩하게 답했고, 도훈도 시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 수상한데···. 그것도 몹시 수상해···.’
‘... 아이고, 조심해야겠다.’
도훈과 영배가 그렇게 동시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 ... 풋! 애쓴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상님이 미소 띤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