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36화 (237/279)
  • 236. 급한 건 따로 있다 - 1.

    ‘한우리 기획’ 대표이사 정경민과 만난 다음 날인 토요일 늦은 오후 진주네 집.

    아이들은 순심이와 어울려 자기들끼리 노는 가운데, 집주인인 진주, 영배와 선아 부부, 도훈에 세경, 그리고 두진까지 소파에 모여 있었다.

    진주, 선아, 세경이 어떤 문서를 돌려 읽는 가운데, 문서를 이미 읽은 남자 셋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원 주무관, 홍 주무관이 서운한 눈치더라고. 아마 지금쯤 고 주무관도 알고 있을지 몰라. 그 친구, 원 주무관이랑 친하고 자네 일에 관심이 여전히 많으니까 말이야.”

    “두 사람의 서운한 마음도 고맙고 정임 씨 관심도 고마운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실장님. 안 그렇습니까?”

    “누가 아니라나? 그 친구들 서운해하는 건 알고 있으라고 한 말이야.”

    두진의 말에 도훈이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영배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야, 전에 네 강점과 약점 분석한 문서는 지연 씨랑 홍 주무관님도 봤잖아. 그런데 왜 이건 안 된다는 거야?”

    “그건 강약 분석에 중점을 둔 거지. 선거 때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목적이 분명한 게 아니었잖아.”

    “그랬지.”

    “하지만, 이건 내 취약점을 선거에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공략할까를 연구한 거야. 선거에 중점이 맞춰진 거잖아. 당연히 직원들하고 함께 논의하면 안 되지.”

    “그렇게까지 명확한가? 난 좀 모호하게 느꼈는데.”

    “모호해도 안 돼.”

    영배가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진주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질문을 던졌다.

    “업무시간에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도훈이 정색하고 답했다.

    “중립 의무라는 걸 그렇게 좁게 해석하면 안 되지. 그건 업무시간이든 아니든 어기면 안 되는 거야. 업무시간 아니라고 공무원이 아르바이트하는 게 허용 안 되는 것처럼 말이야.”

    “쩝. 깐깐하기는.”

    “이건 그렇게 얘기할 문제가 아니야.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거 하고 적극적으로 선거에 끼어드는 거는 전혀 달라. 그 사람들 시장 비서실 직원이지 시장 후보 직원이 아니야.”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진주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고, 도훈은 가만히 커피를 마셨다.

    갑자기 태클이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야, 그나저나 상견례는 언제로 할 거야?”

    영배의 질문에 도훈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고 세경은 놀라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 가까스로 ‘참사’를 막아낸 도훈이 커피를 삼키고 물었다.

    “크흠.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당연한 순서니까 묻지. 내일 세경 씨랑 아버지 뵈러 가는 거 아니야?”

    “...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네가 이번 주에 주말 근무 안 한다고 했을 때 눈치로 때려잡았다.”

    “......”

    “내가 너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그 정도야 훤하지. 넌 인마, 내 손바닥 위 손오공이야.”

    영배가 으스대며 하는 말에 도훈이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회의에 집중하자고.”

    “난 지금 집중할 게 없잖아. 저거 다 읽었는데.”

    “다른 사람 차분히 읽게 조용히 좀 하지?”

    “하하! 그딴 말로 날 조···.”

    “오빠, 시끄러.”

    “... 옙.”

    부인 선아의 말에 영배가 조용히 찌그러졌다.

    오늘의 회의 주제는 도훈을 대상으로 한 문건에 대한 평가 및 대책 마련.

    - 이 문서를 정확히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문서를 만들게 한 건 오정민 의원이 맞습니다.

    오정민은 지난 총선에서 3선에 성공했다.

    그가 속한 계파는 여당 내 세력 확장이나 영향력 확대에 실패했지만, 그 계파 소속 현역 의원들은 대다수 재선에 성공했다.

    계파에 속한 현역 의원 숫자가 많지 않은 가운데 3선에 성공한 오정민의 계파 내 영향력은 당연히 향상됐고, 심지어 그런 배경에 기대어 다음 여당 원내대표 선거에 나설 거란 이야기도 있었다.

    - 지난 총선 때 오정민 의원이 속한 계파 자체는 장사를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정민 개인의 영향력이 세졌죠. 차라리 낙선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정경민은 오정민의 첫 선거 때 컨설팅을 했었단다.

    그때는 ‘한우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기도 전이었고, 한우리 설립의 핵심 멤버들이 함께 했었단다.

    - 외부적으로 드러난 그의 개혁적 이미지를 너무 의심 없이 믿어 버렸죠. 준 재벌가 출신이면서도 재벌 개혁과 부자 증세를 외치고 다니던 그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회한이 어린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던 정경민.

    - 저나 제 동료들이나 어리고 어리석었습니다.

    도훈이나 조상님이 동시에 ‘진심’이라고 판단한 정경민의 얘기.

    국회의원이 되면 안 될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는 후회였다.

    - 뭘 보고 오정민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면 안 될 사람이라는 겁니까?

    -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사연이 좀 있습니다. 저 개인이 아니라 저와 한우리 동료들에게요. 그것까지 말씀드리기는 좀 그러네요.

    사연은 밝히지 않았지만, 도훈은 정경민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 시장님이 오정민과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시장님을 경계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장님께 관심을 두게 됐고요.

    정경민은 이 문서를 어렵게 입수한 뒤 오정민이 도훈을 경계한다는 얘기가 진짜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건 ‘유망주를 경계’하는 행동이 아닌 개인적 이유가 있을 거로 추측했다.

    과거 오정민과 도훈이 시민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서울 지역구의 3선 의원인 오정민이 지방 작은 도시 시장인 도훈을 경계할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에 근거해서.

    - 시장님과 오정민 사이의 사연을 알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오정민이 시장님을 노리고 있다는 걸 경고해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뒤이어 잡다한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누긴 했지만, 오정민과 관련된 정경민의 이야기는 그게 다였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관계자 대책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오정민과의 ‘악연’도 두루뭉술하게 참가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적인 사연을 세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다들 사안의 심각성을 알아채고는 이렇게 모이게 된 터였다.

    “다 읽었어.”

    진주를 필두로 곧 선아와 세경도 서류 읽기를 끝마쳤다.

    “소감이 어때?”

    도훈이 묻자 진주가 심각함과 심드렁함이 반쯤 혼재된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당 국회의원, 그것도 3선 의원이 이걸 만들라고 했다는 게 많이 걱정되긴 하는데···.”

    “... 그런데?”

    “문서 내용은 그렇게까지 걱정되지 않더라. 시의원들이 협력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시청 내에 반 시장세력을 키워야 한다, 실수를 부추겨야 한다, 뭐 이런 것들은 네가 알아서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선거 때 조직력이 약할 거라는 분석도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그건 무소속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시청 외부에 네가 널 지지하는 조직을 만들어 운영할 것도 아니고.”

    “절대 아니지.”

    “그러니까. 난 네가 좀 주의만 하면 문서에 적힌 공격방식에는 무리 없이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아.”

    진주의 말에 도훈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문제는 문서에 적히지 않은 공격방식이겠지.”

    다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보다 훨씬 격하게.

    “음해나 공작, 혹은 모략이 걱정되는 건 맞는데···. 그 부분은 어떻게 딱히 대비하기가 그렇잖아.”

    공략 방안 문서에는 정치권에서 자주 사용하는 온갖 공격방식이 다 적혀 있었지만, 도훈이 국회의원도 아니고 서울을 근간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도훈이 지방 소도시 시장이고 그가 상대하는 시의원들과의 관계가 크게 나쁘지 않다 보니, 시도할 수 없는 공격방식도 많았다.

    그리고 나머지 공격도 어떤 ‘근본적인 타격’을 노린다기보다는 평판을 떨어뜨리는 효과 이상은 얻지 못할 것들.

    다만, 문제는 그런 고전적인 공격 말고 ‘치졸한’ 혹은 ‘야비한’ 짓을 할 경우였다.

    “저도 공감해요. 업무와 관련해서는 도훈 씨가 좀 더 주의할 필요는 있겠지만,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시청 밖에서 일을 꾸미는 것까지 단속할 수는 없잖아요. 조심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거고요.”

    영배 부인 선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세경이 말을 이어받았다.

    “그나마 좀 걱정이 덜한 건, 이런 의도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는 거예요.”

    “... 맞아.”

    “그리고 이런 위험을 미리 경고해 준 사람이 정치 분야 전문가라는 거고, 그 사람을 도훈 씨가 믿을 수 있겠다고 말한 거고요.”

    “엥? 너 그런 얘기 했었어?”

    “했었던 것 같은데, 형한테는 안 했나?”

    “안 했는데.”

    “나도 못 들었는데.”

    “저도 금시초문인데요?”

    “... 나도 그렇다네.”

    세경을 제외한 모두가 처음 들었다고 반응했고, 도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 말한 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닌가 보죠, 뭐.”

    “야, 인마.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중요하긴 뭐가 중요해. 당장 그 사람이랑 뭘 함께 할 것도 아닌데.”

    “... 그런가?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지. 넘어가, 넘어가.”

    도훈이 심드렁하게 손을 휘저으며 대꾸하자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고, 세경이 피식 웃었다.

    어제, 오늘의 모임에 와줬으면 한다고 통화할 때 도훈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정경민을 ‘믿어도 될 것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오직 세경만 그 얘기를 들었던 모양이니까.

    “자, 됐고! 다들 대처방안을 얘기해 봅시다.”

    도훈의 말에 제일 먼저 두진이 입을 열었다.

    “지금껏 해오던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다만, 거기에 더 주의를 기울여 직원들 관리하고, 업무를 투명히 처리하도록 해야지.”

    “시의원들과의 관계도 좋게 유지해야죠.”

    “거기에다가 보안 관련한 조치를 해야 돼요. CCTV나 차량 블랙박스는 기본일 거고요.”

    “또 뭐가 있을까요? 아, 집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흐음. 뭐 그럴 필···.”

    “넌 가만히 있어.”

    “... 요가···.”

    도훈이 뭐라 말하려다 진주의 제지에 입을 다물었고, 당사자를 제외한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아주 진지한 논의를 이어갔다.

    “경호원을 두는 건···.”

    “그건 좀 오버고요. 아, 이런 건 어떨까요?”

    “음, 그건 좀 문제가 있어 보이네. 시민들 시선도 고려해야 하지 않나?”

    “그러려나요? 음, 시장 몸에 감시 카메라를 다는 게 좋으려나?”

    “아, 그거 왜 경찰관이나 소방관들이 몸에 착용하고 다니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들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어 끼어들지 못한 도훈.

    ‘... 하하. 이, 이런 논의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난감한 표정이 된 도훈이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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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오전.

    도훈의 고향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아버님께 한 번 상의를 드리는 건 어떨까요? 아버님, 능력 있는 경찰관이셨다면서요.”

    “... 글쎄요. 걱정하실 것 같아서 좀 그런데···. 아, 경찰관에게 상의할 거면 더 나은 분이 있어요. 아버지 후밴데 아직 현직이고 대전에 근무하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그쪽이 더 낫겠네요.”

    어제의 회의에서 딱히 ‘이거다’ 싶은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도훈은 애초에 ‘대책’보다는 이런 상황을 ‘내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과 공유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충분히 만족했다.

    두런두런 대화하는 사이 집이 가까워졌고, 도훈이 세경에게 물었다.

    “세경 씨 긴장 안 돼요?”

    “별로요. 왜요?”

    “저는 지난번에 어머님 뵈러 갈 때 엄청 긴장했었는데···.”

    “호호. 글쎄요. 도훈 씨가 아버님께서 제 이야기를 대충 이야기만 듣고도 너무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크게 긴장은 안 되네요.”

    “와, 우리 세경 씨 대담한 여자였네요.”

    “호호! 제가 좀 그런 편이죠.”

    어느새 도훈의 차가 집 앞에 멈췄다.

    내리자마자 들려오는 셰퍼드들의 짖는 소리.

    “시끄러, 인마들아.”

    “어머! 얘들이 바우하고 누리인가요?”

    “맞아요.”

    “덩치가 많이 차이 나는데, 순심이 내려줘도 돼요?”

    “괜찮아요. 쟤들 덩치만 컸지, 순심이한테 꼼짝도 못 해요.”

    순심이를 내려놓자 세 녀석이 신나게 뒤엉켜 뛰어놀기 시작했다.

    도훈과 세경이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도훈의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해? 얼른 들어와.”

    “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세경 옆에서 도훈이 답했고, 곧 두 사람은 거실 테이블에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잘 왔어요. 나 도훈이 아비 김인식이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민세경입니다.”

    이미 도훈이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세경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기에 굳이 그걸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인사를 나누고 도훈의 아버지가 가만히 세경을 관찰하길 얼마.

    짝.

    도훈의 아버지가 살짝 무릎을 치고는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됐어. 난 무조건 이 결혼 찬성이다.”

    “... 네?”

    “내 아들이지만, 모자란 구석이 많은 놈이 어떻게 이런 참한 아가씨를 만났을까? 하하하!”

    “... 아버지, 갑자기 결혼이라뇨? 오늘은 그게···.”

    “아, 너는 이미 좋아하는 상태고 나도 마음에 든다는데 뭐가 문제야? 안 그래요?”

    “아, 예. 그, 그렇죠.”

    아버지의 질문에 어색하게 웃으며 답하는 세경.

    세경의 답에 힘을 얻은 아버지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날 잡자. 아, 상견례가 먼전가? 상견례 날부터 잡자. 나, 다음 주말에 한가하다. 다다음 주 주말도 한가하다. 아니면 당장 내일도 괜찮아!”

    “... 아, 아버지.”

    “시끄럽고, 사부인께 전화해 봐라. 아, 얼른!”

    “......”

    정색하고 독촉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말문을 잃은 도훈.

    ‘... 정작 급한 건 문건에 대한 대책이 아니었네.’

    흥분한 아버지를 어떻게 말릴 것인지, 도훈이 암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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