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컨설턴트 - 3.
“... 5월은 가정의 달이지. 예전에는 참 좋은 의미로만 들렸는데, 요즘 보면 무척 잔인한 말이기도 해.”
“...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데, 대도시는 아마 더하겠죠?”
“물론. 대가족제도는 진즉에 무너졌고, 핵가족이 어쩌네 했었지만, 노인이나 청년이나 각자도생하는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 좀 됐잖나. 생활환경 면에서나 인구 면에서나 대도시는 우리에 비할 바가 아닐 테지.”
5월 말로 들어선 어느 날 낮.
보건소 주차장 구석 천막 밑에서 잠깐 쉬며 두진과 영배가 대화하고 있었다.
보건소 건물 내부뿐 아니라 주차장에도 제법 많은 노인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을 안내하고 수발을 들기 위해 보건소 직원뿐 아니라 주민센터 직원에 시청에서도 사람들이 나왔다.
노인들은 주차장에 여럿 마련된 천막을 돌아다니며 의사들에게 상담 및 진료를 받고 있었다.
“어이, 총각. 여기 안과는 어디여?”
“아, 할머니.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가까이 다가와 묻자 영배가 얼른 일어나 할머니를 모시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대전의 한 대학병원에서 무료의료자원봉사를 나왔다.
시에서 운영하는 보건소와 보건지소가 있고, 대흥시 관내에 병원과 의원이 여럿 있으나 진료과목이 내과나 치과 등으로 편중되어 다른 의과의 진료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보호자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 부모들이 대전으로 데리고 가겠으나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 어르신들은 그러기 어려운 게 사실.
오늘은 대학병원의 거의 모든 의과가 출동해 진료를 보는 중이었고, 이 행사는 도훈이 보건소장과 협의해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여기도 성황이네요.”
“아, 시장님.”
어느새 도훈이 두진의 등 뒤에 와 있었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거기도 만원 대성황입니다.”
“하하, 그럴 만도 하죠. 소아과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라잖습니까.”
“네.”
이번 의료봉사에는 소아과도 함께 했다.
매우 아쉽게도 대흥시 관내에는 소아과 의원이 없었고, 대흥시에서 제일 가까운 대전의 소아과 의원에는 대전에 사는 환아보다 대흥시에 사는 환아가 더 많이 다니는 지경이었다.
소아과가 의료봉사에 나올 경우, 많은 부모가 찾을 것으로 예상해 아예 보건소 옆에 따로 장소를 마련했다.
그 예상은 적중해서, 소아과 진료를 위해 빈 매장을 빌려 임시로 꾸민 진료소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쩝. 병원 원장이 그 장면을 좀 봐야 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대흥시에 있는 병원에 소아과를 개설하게끔 하려는 노력은 도훈이 취임 초기부터 꾸준히 해왔다.
각종 행정적 지원은 물론이고 병원에 대한 세제 혜택이나 심지어 소아과 의료진의 급여를 지원하겠다는 제안까지 했었다.
하지만, 시나 보건소는 이렇게 적극적인데 정작 병원 원장이 시큰둥해서 진척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환아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병원에 과부하가 걸린다나 뭐라나.
“공들여 준비한 행사니 사람이 많이 찾는 게 좋긴 한데, 많은 걸 보고 있자니 또 한숨이 나오네요.”
“... 무슨 심정이신지 이해가 갑니다.”
도훈의 말에 두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아무리 의료환경을 개선하고 싶다고 해도, 시의 노력과 역량에는 한계가 있다.
대흥시의 자체 예산으로는 공립 병원은 꿈도 꾸기 어려운 게 현실.
하지만, 의료 분야에 국가나 도의 지원을 받는 것도 요원한 건 마찬가지였다.
광역시인 대전에 딱 붙은 대흥시 보다 더 환경이 열악한 곳이 많으니까.
공적인 힘으로 해결이 안 되면, 민간 분야의 진출을 유도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서도 상황은 쉽지 않다.
시에서 갖은 유도책을 고민하고 제시해도, 환자가 풍부한 대도시를 놔두고 굳이 위성도시인 대흥시에 개업하려는 의사가 많을 리가 없지 않은가.
“봉사활동 기간을 이틀로 잡은 게 정말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대흥시가 어디 산간벽지 오지도 아니고 대전에 딱 붙어있는 접근성이 좋은 곳이다 보니 대학병원에서는 처음에 봉사활동 제안을 받고 콧방귀도 뀌지 않았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서 스스로 병원을 찾지 못하는 노인 인구가 많다고 보건소장이 자료를 들고 적극적으로 설득한 다음에야 봉사활동을 승낙받았다.
처음에는 하루였던 그 기간은 도훈과 보건소장이 열심히 설득해 이틀이 됐다.
“진료 꼭 받으셔야 하는 어르신들 체크는 하고 있나요?”
“그건 보건소 직원들이 확인해서 연락하기로 했습니다, 시장님. 오늘 진료 못 받으시더라도 내일은 받으시게 해야죠.”
“... 네.”
“아, 그리고 또···.”
소아과 진료소 쪽을 둘러보고 온 도훈에게 두진이 이런저런 사항을 보고하고 있는데, 도훈의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이잉!
“김도훈입니다.”
- 저 원지연입니다, 시장님.
“아, 지연 씨.”
시청 비서실을 지키고 있는 지연의 전화였다.
- 시장님을 뵙고 싶다는 분에게서 연락이 와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를요? 누가요?”
- 지난주에 그 보고서 주고 갔던 이영은 씨 있잖아요. 그 사람이 다니는 한우리 기획 사장님이라는데요.
“... 한우리 기획 사장이요?”
- 네. 시장님이 괜찮으신 시간에 찾아오신다고 꼭 만나 뵙고 싶다네요.
“용건은 밝히지 않던가요?”
- 용건을 특정하진 않았고요. 다만, 컨설팅과 관련한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 흐음.”
컨설팅 업체 사장이 만나자고 하는데 용건은 컨설팅이 아니다?
목적이 짐작되지 않았기에 만남이 그다지 끌리지 않은 도훈이었다.
“오늘 당장 만나자는 건 아니겠죠?”
- 네. 오늘 말고 다음 주까지면 아무 때나 괜찮답니다.
“... 그럼, 여기서 말고 이따가 시청에 복귀해서 생각해보죠. 바로 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까요.”
-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궁금한 눈빛을 한 두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 컨설팅 업체 사장이 컨설팅 외에 다른 목적으로 만남을 청한다? 좀 이상하네요.”
“그렇죠? 그래서 그런지 별로 안 끌리네요.”
도훈이 두진과 두런두런 대화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영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장님. 봉사단 단장님이 잠깐 뵙자고 하시는데요.”
“그래요? 어디 계십니까?”
“가시죠. 이쪽입니다.”
도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두진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기분이 괜히 찜찜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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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의료봉사단 활동을 끝마치고 의료진을 배웅하고 시청에 돌아온 도훈.
퇴근 시각이 가까웠고 마침 금요일이었던지라 차에서 내리며 도훈이 두진에게 말했다.
“다들 고생 많았는데, 오늘은 회식이나 할까요?”
“하하. 어제도 의료진들이랑 식사하면서 술 드셨잖습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어제야 가볍게 마셨고요. 이번 달은 물론 지난달도 비서실 회식을 못 했잖습니까.”
“나쁘지 않죠. 제가 직원들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주···.”
“회식 좋네요. 이왕이면 저도 끼워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캬아, 여기는 뭐가 맛있으려나?”
도훈과 두진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든 건 창문이 열린 옆 차 운전석에서 내린 4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도훈이 담담히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두서없이 끼어들었네요.”
“......”
“저 오늘 다섯 시에 시장님 만나 뵙기로 한 한우리 기획 대표이사 정경민이라고 합니다.”
“아, 예.”
남자의 자기소개에 도훈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조금 놀랐다.
정치 컨설팅 업체 대표라기에 세련된 이미지의 스마트한 외모를 가진 남자를 예상했는데, 눈앞의 남자는 그런 예상과는 무척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배가 꽤 나온 ‘곰돌이 푸’ 같은 몸매에 갈색 면바지에 하늘색 티를 입고 가방을 든 남자.
외모도 ‘세련’보다는 ‘터프’나 ‘우락부락’에 가까웠다.
가지런히 빗은 머리를 좀 흐트러뜨리고 수염만 좀 기르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산적 배역에 딱 어울린다고 할 정도로.
“하하, 제 차림이 예상 밖이신가 보죠?”
“조금은 그렇군요. 좀 일찍 오셨습니다?”
이제 네 시를 갓 넘긴 때여서 다섯 시까지는 간격이 좀 있었고, 도훈은 그 전에 짧게나마 시청 내부에서 일정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기다리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흠. 바로 뵀으면 좋겠지만, 제가 참석할 회의가 있어서요. 어떻게, 약속 시각까지 비서실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뇨. 잠깐 이 앞에서 여유 좀 즐기겠습니다. 회사에서는 저도 나름 바빠서요. 이렇게 시간이 나는 건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 네.”
“저는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업무 보십시오. 이따가 뵙겠습니다.”
도훈이 뭐라 답하기 전에 수더분하게 웃으며 말한 정경민이 몸을 돌렸다.
휘파람까지 불며 가방을 앞뒤로 흔들며 걷는 게 정말 기분이 좋은 듯한 모습이었다.
도훈이 물끄러미 그런 정경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영배가 중얼거렸다.
“... 여유가 생겨서 정말 좋은 모양입니다.”
“... 그러게요.”
도훈이 피식 웃으며 맞장구를 쳤고, 두진이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서둘러 올라가시죠. 회의시간 다 됐습니다.”
“아, 네.”
정경민을 흘끔 하던 도훈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멀어지는 도훈의 등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정경민이 담담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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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은 다섯 시 5분 전에 비서실에 나타났고, 곧 시장실 소파에 도훈과 마주 앉았다.
두진이 배석한 가운데 정경민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도훈.
지연이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컨설팅 업체 사장님께서 컨설팅 이외의 용건이라 하셔서 좀 궁금했습니다.”
“하하. 찜찜하셨던 건 아니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러기도 했고요.”
“하하!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닙니까? 당사자가 앞에 있는데요.”
여전히 유쾌하기만 한 정경민이었지만, 도훈은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정치판 전문가’를 상대하는 건 꺼림칙한 걸 넘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기에.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등은 업무상 외면할 수 없는 이들이지만, 컨설턴트는 아무리 정치 전문가라고 해도 도훈은 굳이 만나고 싶은 이들이 아니기도 했고.
“용건이 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네. 그러죠.”
도훈의 질문에 답한 정경민이 가방을 열어 서류 하나를 꺼냈다.
원본이 아닌 복사본인 게 확연히 티가 나는 문서.
“... 이게 뭡니까?”
“한우리에서 만든 게 아니고 제가 우연히 손에 넣은 문서입니다.”
“......”
- OOO의 약점과 공략 포인트 연구.
문서 제목에 대상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탓에 도훈은 문서의 성격을 한눈에 짐작하지 못했다.
“원래는 거기 OOO 대신 김도훈이라고 적는 게 맞습니다. 남들의 눈을 의식해 그렇게 표기한 겁니다.”
“... 이것도 저에 대한 문서라고요?”
“네.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난번에 이영은 부팀장에게 받은 문서와는 성격이 정반대죠.”
“......”
도훈이 말없이 정경민을 바라보다 두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좀 당혹한 표정의 두진이 도훈과 눈빛을 마주하더니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 서류를 끌어당겼다.
서둘러 서류를 훑은 두진이 인상을 쓰고 입을 열었다.
“시장님 이름은 OOO, 대흥시는 D 시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이런저런 내용은 시장님과 대흥시를 언급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내용은···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두진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지만, 도훈의 시선은 문서가 아닌 정경민을 향했다.
입가의 미소는 사라졌지만, 전혀 긴장하지 않은 담담한 표정의 정경민.
“우연히 입수하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 문서를 입수하신 건 우연이겠지만, 대흥시에 이영은 씨를 보내고 제게 컨설팅 제안을 하신 건 우연이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죠. 저는 진지한 마음으로 권한 겁니다. 시장님께서 단번에 승낙하실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 문서는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
- 진심이야.
‘... 네.’
조상님이 판별해주지 않아도 도훈은 정경민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강하게 느꼈다.
선거까지 1년 가까이 남았는데 벌써 이런 진지한 문서를 만든 게 누구인지도 궁금했지만, 정경민이 왜 이걸 도훈에게 보여주는지 왜 일면식도 없는 도훈에게 호의를 베푸는 지가 더 궁금했다.
“이걸 제게 보여주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 그게 좀 복잡하기도 하고, 간단하기도 한 얘기입니다.”
“이야기 들을 시간은 충분합니다. 대표님과 면담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니까요.”
“그리고 그다음에 회식하러 가시는 겁니까?”
“글쎄요. 아직 직원들 의견을 다 듣지 못해서요.”
도훈의 말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정경민이 말을 이었다.
“오늘은 아니지만, 나중에 비서실 회식에 절 끼워주신다고 약속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글쎄요. 약속하기 어려운데요? 비서실 직원들은 저와 심금을 터놓고 지내지만, 대표님과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습니까? 그럴 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고요.”
“하하. 그러니까 나중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지내다 보면 저 괜찮은 놈인 줄 아실 거로 믿으니까요.”
“......”
“제가 괜찮은 놈이라는 건 앞으로 저 스스로 증명하도록 하죠. 그런 조건이면 어떻습니까?”
“......”
도훈은 즉답하지 않고 정경민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의 고갯짓에 정경민이 담담히 웃고는 이내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저는 이걸 누가 만들게 했는지 압니다.”
“......”
“그 사람은 지금 여당 소속 현직 국회의원이죠. 시장님도 아시는 분입니다. 이 동네 분은 아니고요.”
고개를 갸웃하던 도훈의 뇌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 설마?”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
“제가 그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었습니다.”
“......”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말하는 정경민.
그에게 고정된 도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