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33화 (234/279)

233. 컨설턴트 - 1.

도훈은 차혜진의 보좌관을 통해 들어온 신임 대자당 충남도당위원장과의 식사 요청을 선선히 수락했다.

그래서 5월의 첫 금요일 점심을 도당위원장과 함께했고 당연히 이 자리에 차혜진도 참석했다.

“반갑습니다, 시장님. 백민식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도훈입니다.”

처음 ‘인사’하는 자리였지만, 백민식이 국회의원을 두 번 지낸 경력 있는 정치인인지라 사람을 대하는 게 아주 능수능란했다.

“하하. 이미 듣긴 했지만, 젊은 분답지 않게 무척 진중하시네요.”

“별말씀을요. 그냥 부모님께 물려받은 성격이 이런 겁니다.”

“좋은 부모님이시겠어요.”

“그건 그렇지요.”

인사하는 자리였기에 백민식은 의견이 갈릴 수 있는 화제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올봄은 그래도 예년보다 덜 가물어서 다행이에요. 작년, 재작년엔 심했잖습니까?”

“그랬죠. 올해는 산불도 많이 줄었잖습니까.”

“맞습니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내내 대화를 주도하던 백민식이 말이 없는 차혜진에게 한마디 했다.

“차 의원님도 말씀 좀 하세요. 아, 평소에 충분히 대화하시니 딱히 할 말이 없으신 겁니까?”

“... 뭐, 그렇지요.”

“하하. 시장과 시의원이 평소에 충분히 소통하는 건 당연한 거죠.”

“... 네.”

애써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 차혜진.

‘... 알고 저러는 것 같은데···.’

도훈은 아무래도 백민식이 자신과 차혜진의 냉랭한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차혜진을 찔러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예산팀 직원들에게 사과하면 마음을 풀겠다는 얘기를 들은 뒤에도 차혜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위원장과의 식사가 아닌 차혜진과의 식사라면 도훈은 응하지 않았을 터.

하지만 아무리 차 의원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이런 자리에서까지 대놓고 티를 낼 도훈이 아니었다.

“공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의사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차 의원님뿐만 아니고 모든 의원님들과 말이죠.”

“익히 들었습니다. 시장님이 의원이나 시민들과 소통하는 것에 공을 많이 들이신다고요.”

“단체장이면 당연한 거겠죠.”

“하하, 그 당연한 걸 잘 못 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러니까 시장님에 대한 세평이 좋은 거 아니겠어요?”

“과찬이십니다.”

도훈이 나섰기 때문인지 아니면 백민식이 눈치 빠르게 넘어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차혜진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 두어 번 더 있었지만, 도훈이 적절히 나서고 백민식이 이에 반응하며 식사 자리는 무사히 끝났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식당 앞에서 도훈과 인사를 나눈 백민식이 먼저 차를 타고 자리를 떴다.

도훈이 차혜진에게 말없이 묵례하고 돌아서려는데, 차혜진이 도훈을 불렀다.

“잠깐만요, 시장님.”

도훈이 돌아서 복잡한 표정을 한 차혜진과 마주했다.

위원장과의 식사 자리에는 없었지만, 밖에서 따로 식사하며 기다리고 있던 영배와 이영은이 몇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자리.

“왜 티를 안 냈어요?”

“......”

“나 망신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잖아요? 마침 상대도 우리 당 도당위원장님이니까, 복수할 기회 아니었어요?”

절로 실소가 나오는 질문이었지만, 도훈은 담담히 답했다.

“오늘 전 차 의원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새 위원장님과 인사하러 나온 겁니다.”

“......”

“초면인 사람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그런 일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거든요.”

“......”

“답이 됐습니까?”

“......”

차혜진은 말없이 볼을 실룩거렸고, 잠시 물끄러미 그런 차혜진을 바라보던 도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차혜진이 멀어지는 도훈을 부르려다 끝내 입을 떼지 못하는 순간.

“의원님. 시장님과 화해하기에 지금보다 더 좋은 때가 있겠습니까?”

“......”

“사과의 말 한마디면 되는 일입니다. 왜 그걸 이리 주저하세요?”

“......”

얼른 다가선 이영은의 속삭임에 차혜진은 이를 악물고 도훈의 등을 바라만 봤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끝내 달라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모양새.

그런 차혜진의 모습에 이영은이 한숨을 내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 시장이 저렇게 나와도 이 모양인데, 직원들에게 사과? 하하···. 글렀어, 이 사람은.’

보좌관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어떤지 짐작도 못 하고 있을 차혜진은 도훈의 등만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우리도 사무실로 돌아가죠.”

“... 잠시만요, 의원님.”

차혜진을 불러 세운 이영은이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뭐에요, 이게?”

“제 사직서입니다.”

“... 뭐요?”

“사직서요.”

“... 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차혜진에게 이영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만둔다고요, 저.”

“......”

“안녕히 계세요.”

“... 저, 저···.”

놀라 말문을 잃은 차혜진이 ‘헤’ 입을 벌린 체로 굳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후련하다는 표정의 이영은이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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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식, 차혜진과의 점심 후 외부 일정을 계속 소화한 도훈이 시청으로 돌아온 것은 퇴근이 가까운 시간.

비서실을 지나쳐 시장실로 들어가려던 도훈은 지연이 건넨 의외의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가 면담을 요청해요?”

“이영은 씨라고 하던데요.”

“... 이영은? 그 사람이 누군데요?”

전혀 모르겠다는 도훈에게 영배가 일렀다.

“혹시 그 사람 아닙니까? 차혜진 의원 보좌관.”

“그런가요?”

“네. 그 보좌관 이름이 이영은이었던 것 같은데요.”

“......”

몇 번 스치듯 얼굴을 본 적이 있었고 오늘 낮에도 봤지만, 그녀와 대화 한마디 나눈 적 없는 도훈이었다.

그건 도훈과 외부 일정을 함께 소화하는 두진이나 영배도 마찬가지여서 영배가 주민과의 대화 때 잠깐 문답을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요? 차 의원 심부름이라도 온 겁니까?”

“그건 아니고요. 자기 개인적인 용건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용건이요?”

“네. 차 의원이나 대자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용건이라던데요.”

“... 흐음. 퇴근 시간 다 됐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10분이면 된다던데요?”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던 도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 연락 올 때까지 청사 안에서 기다린다고 했어요.”

“... 바로 오라고 하세요.”

그렇게 도훈과 이영은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얼마 뒤.

“처음 뵙겠습니다. 이영은이라고 합니다.”

“네. 김도훈입니다.”

시장실이 아닌 비서실 소파에서의 면담.

‘ㄷ’ 자 형태로 도훈의 양옆에 앉은 두진과 영배가 흥미롭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고, 자기 책상에 있는 지연도 귀를 쫑긋 세운 상황.

웬만하면 도훈과의 독대를 요청할 만도 한데, 이영은은 비서실 직원들이 보고 있는 걸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용건이 있으시다고요?”

“네. 이걸 전해드리려고요.”

이영은이 ‘용건’이라며 내놓은 건 문서.

십여 장 정도 되는 문서의 첫 장에는 ‘김도훈 시장의 강약 정리’라고 적혀 있었다.

“... 이게 뭡니까?”

“보시면 아실 텐데요.”

“아무래도 제 강점과 약점을 분석한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이걸 제게 왜 보여주는 거죠?”

“시장님께 도움이 되길 바라니까요.”

“......”

도훈은 문서에 시선도 안 주고 이영은을 바라봤다.

담담한 표정인 그녀에게서 어떤 사특한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 탐욕스럽다고 할 정도는 아닌가? 욕심이 좀 많은 것 같긴 하군.’

도훈이 이영은에게서 시선을 돌려 두진과 영배를 바라봤다.

두진은 담담히 이영은을 관찰하고 있었고, 영배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테이블 위의 서류를 바라보다 도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영배가 손을 뻗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영배가 신중한 표정으로 서류를 읽어내려가는 걸 본 도훈이 다시 이영은에게 시선을 주고 입을 열었다.

“... 대자당 소속 시의원 보좌관이 왜 이런 걸 만들어 보여주는 겁니까?”

“아, 그 말씀을 안 드렸네요. 저 이제 차혜진 의원 보좌관 아닙니다.”

“네?”

“낮에 시장님과 헤어진 직후에 사직서 냈거든요.”

“......”

“진짭니다.”

“......”

이 말은 너무 의외여서 도훈은 물론 두진, 영배뿐만 아니라 저만치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지연도 이영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중 먼저 입을 연 건 두진.

“그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나요?”

“네. 말귀도 안 통하고 아는 걸 행동으로 옮기질 못하시더라고요, 그분이.”

“... 흐음.”

“원래 오래 근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 오래 근무할 생각이 아니었다고요?”

“네.”

듣고 있던 도훈이 끼어들어 던진 질문에 담담히 답한 이영은.

“애초에 제가 아니, 저희가 관심을 둔 건 차 의원이 아니라 김도훈 시장님이거든요.”

“... 저요?”

“네.”

“... 그리고 방금 저희라고 한 것 같은데, 이영은 씨 말고 또 누가 있는 겁니까?”

“네. 정식으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배시시 웃으며 답한 이영은이 품에서 명함지갑을 꺼내더니 명함 한 장을 뽑아 도훈 앞 테이블에 내려놨다.

“... 이게 뭡니까?”

“그게 제 진짜 직업이에요.”

도훈은 이영은과 시선을 맞춘 그대로 미동도 없었고 두진이 명함을 집어 들어 소리 내어 읽었다.

“... 한우리 기획 컨설턴트 이영은?”

‘진짜’ 직업이라는 말에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린 도훈은 물론, 비서실 직원 전원이 이영은을 향해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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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영배의 집 앞.

“... 이거 정말 안 읽어볼 거야?”

“안 읽어보겠다는 게 아니고 형이 먼저 읽어보라는 거잖아. 그다음에 실장님, 지연 씨, 홍 주무관에게도 읽게 하라고. 난 그다음에 볼게.”

“흐음, 이건 당사자인 너부터 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내가 이걸 정독한 건 아니고 훑어본 정도지만, 일리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

“......”

영배가 손에 들고 흔드는 건 이영은이 작성했다는 도훈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한 문서.

“... 흐음. 혹시, 자기에 대한 평가를 접하기가 겁나는 거냐?”

영배가 놀리듯 묻자 도훈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안 내려? 오래간만에 일찍 퇴근했는데 집에 가기 싫어? 다시 시청으로 가서 야근이라도···.”

“아니다, 인마. 내린다, 내려.”

턱!

얼른 차에서 내린 영배가 문을 닫았고 도훈이 차를 출발시켰다.

“... 하여튼, 까칠하기는.”

멀어져가는 도훈의 차를 향해 투덜거린 영배가 돌아섰다.

그리고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시에 퇴근해 아이들 얼굴을 보는 게 반가웠으리라.

그리 오래지 않아 도훈도 집 앞에 도착해 차를 주차한 뒤 순심이를 안고 내렸다.

집안으로 들어서 순심이를 내려놓자, 순심이가 도훈의 발치를 맴돌며 짖었다.

왈왈! 왈왈왈!

“밥 달라고? 조금 기다려. 옷부터 갈아입자.”

왈!

알아들었다는 듯 자기 전용석에 몸을 눕히는 순심이를 보고 피식 웃은 도훈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그러던 중 상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툭.

“... 컨설턴트라···.”

바닥에 떨어진 이영은의 명함을 집어 든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명함에 시선을 준 도훈의 표정이 찌푸려진 채 오랫동안 펴지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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