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묻어가기 - 1.
- ... 아빠가 점점 더 웃음이 많아지고 있어요. 목소리 높이는 일도 확 줄었고요. 어제는 아빠 비번이었는데, 모처럼 외식했어요!
“그래? 경태 좋겠네? 정말 잘 됐다.”
- 네. 정말 좋아요.
전화기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에서 기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렇게 경태는 아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이나 늘어놓다가 옆에서 엄마가 참견하고서야 수다를 멈췄다.
- 아들, 시장님 바쁘셔. 이제 그만해.
- 아, 그런가? 미안, 아저씨. 이제 끊을게요.
들려오는 모자의 대화에 도훈이 웃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다음에, 또 돈가스 먹자.”
- 네, 아저씨. 아빠랑도 같이요.
“그래. 그러자.”
- 안녕, 아저씨! 또 전화할게요.
“... 그래. 경태도 잘 지내.”
비서실 소파에 앉은 도훈의 주변에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스피커 폰으로 통화했기에 통화 내용을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잘 풀리고 있나 봅니다.”
“네. 다행히도 말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표창장 수여 때 일이 어떤 ‘계기’가 되었는지, 경태 아빠 강철기 소방교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욱 정확히 얘기하면, 과거의 정상적인 모습을 회복하는 것일 터.
매사 긴장을 놓지 못하던 그가 출동한 현장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조금씩 여유를 회복해 간다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얘기는 굳이 도훈이 알아보고 다니지 않아도, 경태가 조금 전처럼 전화해 알려줬다.
“하하. 아무튼, 시장님께 열혈팬이 생겼습니다.”
“맞습니다. 유권자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두진과 영배의 말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말처럼, 경태는 도훈이 자리를 만들어 준 덕분에 아빠가 달라졌다고 여기는지 도훈에게 연락을 종종 하고 있었다.
주로 엄마 핸드폰을 빌려서 연락하는데, 아빠 엄마 얘기를 할 뿐 아니라 학교나 학원에 다니며 있었던 일들을 화제에 올렸다.
그때마다 녀석이 빠트리지 않는 말이 바로 이것.
- 내가요. 시장 아저씨가 무척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시장 아저씨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분명 잘 풀릴 거라고요. 그러니까 걔가 연락하면 전화 꼭 받아요.
경태 엄마에 따르면, 요즘 경태는 주변에서 누가 난처한 일이 생긴 것 같으면 무조건 도훈에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강추’하고 있단다.
다행스럽게도, 정말로 도와달라고 연락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다만, 녀석이 그렇게 도훈을 입에 올리고 다니니 경태 아빠가 아들과 도훈 사이의 인연을 알게 되어 비번 때 도훈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는 했다.
“여하튼, 이번 민원은 잘 처리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네. 다행이죠.”
“흐흐흐. 다행히 그 효과도 만점이고요.”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는 영배를 도훈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경태가 아빠에게 직접 만든 상을 수여하는 장면은 학부모 하나가 촬영해 온라인에 올렸다.
그 영상이 화제가 되며 가슴 뭉클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 짧은 영상에 도훈도 아주 잠깐 살짝 스치듯 등장하는데, 도훈을 알아보고 댓글을 다는 이가 있기도 했다.
게다가 안 그래도 도훈을 좋게 생각하던 대흥시 소방관들 사이에서 도훈에 대한 평가가 더 높아졌고, 시민들에게도 이 얘기가 흘러나가 예상 못 한 홍보 효과를 거둔 건 맞았다.
“그렇게 웃지 마요. 실없어 보입니다.”
“흐흐흐.”
“... 쯧. 하여간, 그놈의 홍보 얘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니···.”
“흐흐흐. 좋은 걸 어쩝니까.”
이번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영배의 탓이 아니었기에 도훈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도 소방본부장 면담 요청 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전화해서 거절하겠습니다.”
“그쪽은 꽤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요.”
“됐습니다. 우리 식구 우리가 챙긴 건데, 감사장은 남사스럽고··· 홍보대사는 더 유명한 사람이 하는 게 낫겠죠. 제가 뭐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잖아요. 아이가 아빠한테 자기 마음 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뿐이니까요.”
도훈이 서산 소방서 사람들과 연락하고 대흥시 소방서장과 상의해 경태 아빠를 도운 건 충청남도 소방본부에도 알려졌다.
도 소방본부장은 감사장을 주고 싶고 명예 소방관이자 소방 홍보대사에도 임명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는데, 도훈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다음 일정 가죠. 유서면 주민센터죠?”
“네. 주민과의 대화가 2시부터 진행됩니다.”
“음, 자료 챙겨서 출발하죠.”
“참, 시장님. 오늘 대화에 차혜진 의원도 참석한답니다.”
“... 그래요?”
“네.”
“웬일이래요, 그분이?”
“글쎄요.”
작년 말, 예산 조정안 문제로 단단히 틀어진 차혜진.
그때 이후로는 도훈과 말도 한 번 섞지 않는 냉랭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녀는 그 이전에도 시장인 도훈이 주도하는 행사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기 선거구인 유서면이나 남가동 주민들과 대화하는 자리에도 초기 한두 번 얼굴을 비쳤을 뿐.
“안 의원님이랑 신 부의장님은 오신다고 했었죠?”
“네.”
“오늘은 오래간만에 그 선거구 의원이 다 모이겠네요.”
“그건 그런데, 전 왜 갑자기 차 의원이 참석한다는 건지 신경이 쓰입니다.”
“뭐, 가보면 알겠죠.”
담담히 답한 도훈이 일어서 자료를 챙기러 시장실로 들어갔고, 두진과 영배도 책상에서 자료를 챙겼다.
두 사람 모두 ‘아주 신경 쓰인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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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유서면 주민센터 대회의실.
도훈과 시의원들, 주민센터 및 시청 직원들이 주민과 마주 앉은 가운데, 도훈이 한 할아버지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봄마다 농업기술센터가 주도해서 농기계 정비, 점검 진행하고 있는 거 아시죠? 그때 확인받아 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알기야 아는데···. 아, 이놈의 경운기가 꿈쩍을 안 하는데 어떻게 가지고 가라고?”
할아버지의 말에 도훈 옆의 옆에 앉았던 농업기술센터소장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저희가 출장도 나갑니다.”
“그려? 그건 몰랐지. 언제부터 그랬어?”
“하하, 오래됐습니다. 주소랑 연락처 알려주시면, 시간 잡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았어. 내 문제는 해결됐네, 시장 양반.”
“네. 경운기 잘 고치세요. 참, 어르신은 보험 드셨어요?”
“보험? 무슨 보험?”
“농업인들 대상으로 보험이 있거든요. 어떤 거냐면···.”
도훈이 농업인 안전재해보험에 관해 설명했고 설명을 다 들은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나이 먹어서 농사일도 예전 같지 않아. 쉬기는 뭐해서 슬금슬금 시늉만 내는 건데, 보험까지 들 필요 있겠어?”
“그래도 모르죠. 그리고 보험이란 게 만약을 대비하는 거 아닙니까? 국가에서 보험료 지원도 하는 거니까 한 번 고민해 보세요.”
“흐음, 안내장 있으면 줘 봐.”
“네. 조금 이따가 모든 분께 드릴게요.”
시민들과 대화하는 ‘기술’도 하다 보니 는다고 할까?
예전에는 배석한 담당자들이 챙겨줘야 했던 세부적인 부분도 홀로 능숙하게 처리하는 도훈의 모습에 저만치 옆에 있던 두진이 담담히 미소를 흘리고는 영배에게 일렀다.
“조 비서관, 준비해온 안내장 복사해 오게. 한 50장 정도 하면 되겠네.”
“알겠습니다. 결국, 써먹는군요. 왜 이걸 만드나 싶었는데.”
중얼거린 영배가 회의실을 나갔고, 두진의 시선이 다시 도훈 쪽을 향했다.
그러다 도훈 바로 옆에 앉은 차혜진이 두진의 눈에 걸렸다.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메모하는 모습.
‘참 낯서네.’
정치인은 다 그렇겠지만, 차혜진 의원은 주목받길 남달리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같은 주민과의 대화를 대개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아닌 도훈이 그 자리를 주도한다는 것 때문.
다른 시의원들, 도훈과 관계가 나쁘기로는 차혜진 못지않은 민의당 소속 시의원들도 시민과의 대화 자리에 빼먹지 않고 참여했던 걸 보면 차혜진은 유별났다.
그녀가 꾸준히 독자적으로 마을회관이나 노인정 등을 방문하고 아파트 부녀자 모임, 주민 모임 등을 찾아다니긴 했다.
그렇게라도 시민과의 접점을 유지한다는 건 인정받을 부분이지만, 자신이 ‘주’가 되지 못하는 걸 거부하던 그녀가 별다른 발언도 없이 조용히 앉아 메모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의외였다.
그것도 그렇게 싫어하는 도훈 바로 옆에서.
두진 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공무원들, 시의원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내 말이 없는 차혜진을 옆에 앉혀 놓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도훈 역시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네.’
도훈이 차헤진을 흘끔 하고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예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면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만, ‘떡’하고 옆에 앉아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도훈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메모에 집중하고 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녀가 도훈 옆에 앉길 고집했다는 것부터가 아주 의외였다.
“... 저기, 시장님?”
“아, 네. 죄송합니다. 계속 진행하죠.”
차혜진 반대편에 앉은 신길영 부의장의 말에 도훈이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또 하실 말씀 있으신 분···. 네, 저기 마이크 좀 갖다 드리세요.”
도훈이 대화를 다시 주재해 나가는데, 벽에 붙어선 누군가가 저만치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처음 보는 세련된 차림의 젊은 여성이었기에 잠시 도훈의 시선이 상대에게 머물렀고, 상대가 도훈을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도훈이 그녀에게 관심을 끊고 시민의 발언에 집중했다.
위치를 바꿔가며 사진을 찍는 여자가 도훈을 향해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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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유서면 주민과의 대화 행사를 마칩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짝짝짝짝짝!
1시간 반이 넘게 진행된 대화 자리가 끝났고, 도훈은 몸을 일으키는 주민들과 인사를 했다.
“아까 내가 말한 거 빨리 처리해줘야 돼.”
“물론입니다, 어르신. 제가 주민센터 담당자에게 신신당부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찰칵!
카메라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리니 아까 그 젊은 여자가 다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어르신과 인사하는 도훈 옆에 차혜진이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도훈이 의아해하는 사이, 다른 주민이 도훈의 손을 잡았다.
“시장 총각, 언제 우리 마을회관에 놀러 와. 와서 우리랑 얘기도 하고 막걸리도 한 잔 하자고.”
“예, 할머님. 초대해 주시는데 가야죠.”
“오늘은 내가 대표로 와서 이런저런 말을 하긴 했는데, 분명히 빼먹은 게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마을에 한 번 꼭 와.”
“알겠습니다. 일정 잡아보겠습니다.”
“약속이여?”
“네. 약속···.”
찰칵!
“...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차혜진이 옆에 찰싹 붙어있는 상황에서 다시 묘령의 여자가 사진을 찍었다.
한두 번 찍는 거라면 그렇겠거니 하겠지만, 이 정도면 누군지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도훈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영배가 나서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잠깐만요.”
“아, 네.”
영배가 앞을 막고 대화하는 사이 도훈은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다른 주민들과 계속 인사했다.
어느새 옆에 붙었던 차혜진도 멀어진 상황.
주민들이 다 나가고 직원들에게 수고했다 말한 도훈이 주민센터를 나와 차에 올랐고, 곧 영배도 차에 올랐다.
“나, 참.”
“왜 그래요?”
“아까 그 젊은 여자 말입니다.”
“그 사람이 왜요?”
“시장님을 찍은 게 아니고 차 의원을 찍은 거랍니다.”
“네?”
“그 사람, 차혜진 의원 새 보좌관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명함도 줬습니다.”
영배가 도훈에게 건넨 것은 명함.
- 차혜진 시의원 보좌관 이 영 은.
전의 보좌관이 작년 말로 그만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 보좌관을 들였다는 건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자네 지금 차 의원이 새 보좌관 들였다고 짜증내는 건가?”
“그게 아니고요. 그 보좌관이 찍은 사진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요.”
“그게 무슨 소린가?”
두진의 질문에 영배가 짜증을 넘어 살짝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 글쎄. 차 의원 찍었다는 사진에 꼭 시장님이 함께 찍혀 있지 않습니까.”
“...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계속 같이 있었으니···.”
“우연히 차 의원이랑 시장님을 같이 찍은 게 아니고 일부러 그런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뭐?”
“나오면서 들었는데, 차 의원 자리 배치를 꼭 시장님 옆자리로 해달라고 한 사람이 그 보좌관이랍니다.”
“......”
“그리고 제게 자기를 소개하길, 자칭 홍보전문가라던데요?”
영배의 말에 도훈이 오늘 차혜진의 행동을 되새겨봤다.
말없이 묵례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단 한 마디도 도훈과 대화하지 않은 그녀.
심지어 시선조차 마주하는 걸 거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도훈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여전히 매우 나쁘다는 뜻.
“... 홍보전문가가 일부러 차 의원과 시장님을 한 프레임에 놓고 사진을 몽땅 찍은 것 같단 말이죠.”
“......”
“이거··· 찜찜하지 않으세요?”
“......”
영배의 말에 아무도 답을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