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어떤 민원인 - 4.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대피했고 대기하던 소방관들이 학교 건물에 진입해 교무실에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 것으로 훈련이 끝났다.
실제 불이 난 것이 아닌 화재 발생을 상정하고 한 훈련.
아이들이 화재 시 대피요령을 교육받고 실제 연습해보는 게 목적이었다.
- 화재가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대피훈련을 종료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 여러분! 박수!”
“수고하셨습니다.”
짝짝짝짝!
교사들의 말에 아이들이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에게 박수를 쳤다.
다행히 날씨가 춥지 않았고, 머리가 빨리 여문 고학년 몇 녀석들을 제외하면 훈련에 참여한 아이들도 ‘재밌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 시작할까요?”
“그러시죠.”
가만히 아이들 곁에서 바라보고만 있던 도훈과 교장이 움직인 건 바로 그때.
“팀장님, 죄송한데 잠깐 확성기 좀 빌려주실래요?”
“네? 아, 네.”
도훈이 소방관 한 명이 어깨에 메고 있던 확성기를 빌렸다.
학교 방송시설을 써도 되겠지만, 엄청난 인파가 모인 것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형식이 중요하긴 하지만 형식보다 더 중요한 건 내용이니까.
- 자, 학생 여러분. 그리고 소방관과 경찰관 여러분 잠깐 여기 주목해주세요.
도훈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졌고, 모두가 도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어느새 운동장 한쪽 조회대에 올라온 도훈과 교장.
- 얼마 전, 눈 왔을 때 이 학교 학생들이 화재를 발견하고 119에 신고하고 눈을 뭉쳐 불을 끄려고 했던 얘기 다들 알죠? 그 장하고 용감한 행동한 학생들을 표창하려고 합니다. 다들 이리로 모여주시겠습니까?
이미 학교 선생님들과 경찰관, 소방관들과는 이야기되어 있던 사항.
“자, 저쪽으로 가자.”
“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조회대 앞에 반원을 그리며 섰고, 경찰관과 소방관들이 그 뒤에 둘러섰다.
잠시 뒤 있을 아이들 점심 급식 봉사를 위해 학교에 온 학부모들도 함께했다.
-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다시 한 번 설명해 줄게요. 그러니까···.
도훈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교장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도훈은 곁으로 다가온 영배에게 표창장을 넘겨받았다.
- 자,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조회대로 올라오세요. 6학년 1반 조성민, 5학년 2반 김인준···.
차례로 조회대로 올라온 아이들은 열셋.
뿌듯하고도 쑥스러운 듯한 표정인 아이들을 빙긋이 웃으며 도훈이 바라보자 교장이 표창장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 표창장. 운계 초등학교 6학년 1반 조성민. 이 학생은 지난 3월 14일···.
행사 같지 않은, 딱딱하지 않고 즉흥적인 느낌이 나는 표창장 수여식.
교육장과 학교에서는 제대로 된 표창장 수여식을 하자고 했지만, 도훈이 반대했다.
아이들이 잘한 일을 칭찬하자는 건데, 굳이 아이들이 재미없어하는 ‘행사’ 형식이 될 필요가 있냐며.
- ... 하여, 이 용감한 선행을 표창합니다. 대흥시장 김도훈. 교육지원청장 나기훈.
“그 날 잘했어. 앞으로도 착하고 씩씩하고 용감하게 지내 다오.”
“네!”
표창장을 받아드는 아이의 씩씩한 답에 도훈이 다시 웃었다.
- 부상으로 5만 원 상당의 도서상품권을 수여합니다.
“와! 만세!”
“하하하!”
아이는 표창장보다 도서상품권에 더 기뻐했다.
조회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아이들도 표창장보다 상품권을 더 부러워하는 눈치.
지켜보던 어른들이 웃을 수밖에.
- ... 5학년 2반, 김인준. 이하 내용은 같습니다.
다음으로 표창장과 상품권을 받아든 아이.
격식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질 않아서 그런지, 아이가 속마음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시장님, 상품권으로 게임 아이템 사도 돼요?”
“... 글쎄. 엄마가 허락하시면?”
“시장님이 얘기 좀 해주세요.”
“음. 내가 시장이긴 하지만, 엄마보다 더 힘센 사람은 아닌데.”
“에이, 좋다 말았네.”
“하하하!”
다시 어른들이 웃었고, 아이에게 웃어준 도훈이 다른 아이들에게도 표창장과 상품권을 수여했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으니 어른들도 따라 했다.
“우리 아들, 장하다!”
“정우 멋있다!”
오늘 급식 봉사를 온 학부모 중에는 표창장을 받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있었다.
미리 연락해 아이가 상 받는 자리에 함께할 수 있도록 한 것.
부모의 칭찬에 어떤 녀석은 쑥스러운 표정을, 어떤 녀석은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어 보이며 웃었다.
표창장을 모두 나눠준 도훈이 교장에게서 확성기를 넘겨받고는 앞으로 나섰다.
- 그럼 시장님 말씀을 잠깐 듣겠습니다.
시장한테 한마디 듣자는 시간이었지만, 도훈은 자기 얘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 오늘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니까, 제 얘긴 넘어가죠. 자, 상도 받았으니 한마디씩 소감을 말해볼까요? 6학년 성민이부터.
예정에 없이 마이크를 들이밀자 잠깐 당혹스러워했지만, 이내 수줍게 말하는 아이.
- 어···. 개근상 말고 다른 상 탄 게 처음이라 낯설어요. 다음에도 개근상 말고 다른 상 탈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발 부탁이다! 이왕이면 학업 우수상 같은 것 좀 받아줘!”
“하하하!”
“와하하하!”
지켜보던 엄마의 한 마디에 운동장은 폭소의 도가니가 됐다.
그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 당연한 일을 한 건데 상까지 받아서 기분이 좋네요. 문상은 더 그렇고요.
- 그날, 산에 가서 미끄럼 타자고 한 게 저였어요. 이게 다 제 덕분이에요. 하하하!
- 엄마, 상품권으로 책도 사겠지만, 아이템도 좀 사게 해주세요. 만원만요. 네?
“하하하!”
“호호!”
“와하하하하!”
아이들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박수와 웃음이 이어졌다.
도훈은 저만치 소방관들과 함께 선 강철기 소방관의 얼굴을 흘끔 했다.
그의 얼굴에도 다른 이들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는 걸 확인하고 안심한 도훈이 이내 경태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 이게 다 아빠 때문이에요.
- 응? 아빠 때문이라니? 아빠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셨어?
- 네? 그, 그게 아니고 소방관인 아빠가 이것저것 알려줘서 불이 나는 걸 확인하고 신고했다고 말한 건데요.
- ... 그렇구나. 그럴 때는 아빠 때문이 아니고 아빠 덕분이라고 하는 거야.
- 아, 그래요? 다시 말할게요. 아빠 덕분이에요.
“하하하하!”
“하하하!”
다시 폭소가 터졌고, 경태가 말을 이었다.
- 그러니까 상품권은 아빠 줄 거예요.
- 그래? 왜?
- 아빠 때문···. 아니, 아빠 덕분에 받은 거니까요.
- 그렇구나.
- 그리고 저도 아빠한테 상 주고 싶어요.
- 상?
- 네. 우리가 불 끌 수 있었던 건 아빠가 제게 이것저것 불에 대해 알려줬기 때문이니까요.
경태의 말에 단상 위에 있던 아이들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경태 아니었으면 우리 그냥 놀러 갔을 거예요.”
“그때 경태가 하자는 대로 했던 거였어요.”
“경태는 불 박사나 다름없어요.”
아이들에 이어 경태가 말했다.
- 제가 친구들 도움받아서 아빠한테 줄 상을 만들었어요.
- 그랬어?
- 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경태는 오늘 표창장을 받을 거라는 것, 그 자리에서 경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가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도훈이 미리 이렇게 일렀기 때문.
-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 생각해뒀다가 그때 하렴. 아저씨가 자리 만들어줄 테니까.
그래서 경태가 아빠한테 할 말을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상장을 만들었다는 건 도훈도 몰랐다.
- 아빠한테 상 줘도 괜찮아요?
- ... 물론이지.
경태에게 답한 도훈이 강철기 소방교를 바라봤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집중됐다.
당황했는지 살짝 얼굴이 붉어진 그를 향해 도훈이 말했다.
- 경태 아빠, 강철기 소방교님. 잠깐 이리로 나오셔야겠는데요.
당황한 경태 아빠는 곁의 동료가 힘주어 등을 떠민 다음에야 걸음을 옮겼다.
“자, 박수!”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
경태의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분위기를 띄웠고, 경태는 반 친구에게 종이를 한 장 넘겨받았다.
경태가 반으로 접힌 도화지를 펴니, 삐뚤삐뚤한 글씨가 적혀 있고 크레용으로 테두리를 정성껏 치장한 ‘상장’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빨갛게 변한 강철기 소방교가 머쓱한 표정으로 조회대 앞에 섰고, 도훈이 다시 마이크를 경태 입 앞에 내밀었다.
- 상장! 강경태 아빠 강철기 소방관.
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위 사람은 아들 강경태에게 화재에 관해 이것저것 자세히 알려줘서 강경태를 아빠 못지않은 ‘불 박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고물상 화재가 커지기 전에 신고도 하고 눈을 뭉쳐 불이 번지는 걸 막았던 건 다 아빠가 알려준 대로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빠의 공이 제일 큽니다.
아들이 아빠에게 줄 상장의 내용을 읽는 장면을 보는 모든 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아빠는 군인이었을 때도 멋졌고, 소방관인 지금도 멋집니다. 우리 아빠는 최고예요.
“에이! 그건 아니지!”
“야, 우리 아빠도 멋져!”
“맞아. 우리 아빠도 끝내줘!”
“우리 아빠도 술만 좀 덜 마시면 최고가 될 수 있어!”
단상 아래에서 몇몇 아이들이 ‘항의’하자, 경태가 당황했다.
- 어, 어. 그게 그러니까···.
도훈이 당황한 경태의 귓가에 얼른 뭐라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경태가 살짝 빨개진 얼굴로 다시 말했다.
- 고칠게요. 여러분 아빠처럼 우리 아빠도 최고예요. 아빠는 다 최고예요.
“하하하하하!”
갑작스러운 ‘최고’ 경쟁에 어른들이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아이들의 항의가 잦아들었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경태가 말을 이었다.
- 우리 아빠가 최고이긴 해도 무적은 아니에요. 작년에 사고를 당해 좀 다쳤었거든요. 하지만 작년 사고 이후에 좀 힘들어하긴 해도, 아빠가 최고인 건 똑같아요. 힘들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고 스스로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거 나도 알거든요.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금방 나아서 퇴원했던 것처럼요. 엄마가 그랬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전보다 훨씬 용감하고 멋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요.
경태의 말이 의외였기에 어른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 나도 아빠를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모르는 게 많아서 그런지 아직 어려서 그런지, 그냥 지켜만 봐도 된대요. 아빠한테 필요한 건 약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경태 아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가운데, 경태의 말이 이어졌다.
- 그 말을 믿어요. 하지만, 내가 아빠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응원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거잖아요?
“맞다!”
“아들 잘 키웠네!”
“영락없이 강철기 아들이네!”
뒤편의 소방관들이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조회대 앞에 선 강철기 소방교가 감정이 북받친 듯 눈시울이 붉어진 가운데 이를 악물고 있었다.
- 우리 아빠한테 힘내라고 응원의 박수 한번 쳐주세요.
“와아아아!”
“힘내라!”
“파이팅!”
짝짝짝짝짝!
함성과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아마, 동료 소방관들을 제외하면 경태 아빠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아는 건 몇 되지 않을 터.
하지만, 힘들어하는 아빠를 응원하고 싶으니 박수 한 번 쳐달라는 아이의 말은 더는 설명이 필요가 없질 않은가.
짝짝짝짝짝!
경태는 상장을 잠시 도훈에게 맡기고 제일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런 아들의 모습을 당장에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의 강철기 소방교가 빤히 바라봤다.
한참 이어지던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도훈이 다시 경태에게 상장을 돌려주고 마이크를 입 앞에 가져다 댔다.
- 아, 참. 상장 드려야죠. 이런 이유로 강경태 아빠 강철기 소방관에게 상장을 수여합니다.
읽기를 마친 경태가 몇 걸음 앞으로 나가 아빠에게 상장을 내밀었다.
“아빠, 받으세요.”
“... 그래. 고맙다.”
강철기 소방교가 도화지를 받아들자, 다시 박수가 터졌다.
짝짝짝짝짝!
다시 제일 열심히 박수 치는 경태를 따라 모두가 박수를 쳤다.
상장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던 경태 아빠가 두어 걸음 계단을 올라가 자세를 낮추더니 아들을 덥석 끌어안았다.
“와아아!”
짝짝짝짝짝!
“아빠가 약속할게. 아빠,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응! 아빠 믿어요!”
큰 박수 소리 속에서 아들을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아빠와 아들의 작은 속삭임을 도훈은 놓치지 않았다.
짝짝짝짝짝!
담담히 미소 지은 도훈도 모두가 그런 것처럼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