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어떤 민원인 - 2.
도훈과 경태가 통화한 지 약 한 시간쯤 뒤, 운계면의 어느 식당 앞.
“들어가세요, 경태 어머님.”
“... 네. 오늘 일, 감사합니다, 시장님.”
“그런 말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일 하라고 월급 받는 사람입니다, 저.”
“그래도요.”
담담히 미소 지으며 경태 엄마와 인사한 도훈이 몸을 낮춰 경태와 눈높이를 맞췄다.
“경태도 잘 가.”
“네. 저기···.”
“저기 뭐?”
“오늘 일은 비밀로 해야 돼요. 특히 아빠한테는요.”
“물론이지. 이 아저씨가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약속?”
“약속.”
아이의 말에 답하며 도훈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경태가 웃으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더니 위아래로 힘차게 세 번 흔들었다.
“또 보자.”
“네, 아저씨.”
엄마와 함께 멀어져 가는 경태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훈은 아이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녀석 덕분에 저녁 맛있게 먹었네.”
“... 그러게.”
“에고. 갑자기 우리 애들 보고 싶다.”
“......”
두 아이의 아빠인 영배의 말에 도훈도 공감이 갔다.
자신도 아이가 있다면 바로 달려가 꼭 안아주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오늘은 먼저 들어갈래?”
도훈의 말에 영배가 피식 웃고는 답했다.
“나만 그럼 되냐? 지금 비상 걸려서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한 번쯤은 내가 봐줄 수도 있지.”
“됐어, 인마. 이런 건 안 봐줘도 돼. 그냥··· 담배나 한 대 내놔.”
“저리로 가자.”
“그래.”
구석진 자리로 걸음을 옮기며 도훈이 영배에게 담배를 건네고 자기도 한 가치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연기를 내뿜은 도훈이 경태의 말을 되새겼다.
- 아빠가 너무 힘들어해요. 뭔가에 깜짝깜짝 놀라고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아요. 사람이 잠 못 자면 건강에 안 좋다면서요? 몸만 그런 게 아니라 마음도 아플 수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예전보다 목소리도 커지고 화도 잘 내요. 그리고 그런 다음에 저한테 미안하다고 말해요.
경태는 도훈에게 아빠가 전과 달라졌고 많이 힘들어한다며 도와달라며 울먹였다.
그런 경태가 엄마까지 대동하고 도훈, 영배와 만난 이유는, 경태가 몰래 엄마 핸드폰으로 도훈과 통화하다 엄마에게 걸렸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통화하는 상대가 도훈이라는 걸 엄마가 놀라 사과했는데, 도훈은 경태와 저녁을 먹으며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제안해 경태네 집 인근의 이 돈가스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된 것이었다.
- ... 애 아빠가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건 맞아요. 본인도 자기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죠. 정말 걱정스럽긴 한데, 제가 보기엔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선임 소방관은 경태 아빠가 현장에 출동하면 너무 진지해져서 문제라고 했지만, 부인은 일상생활에서도 살짝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인도 인식하고 있고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니 다행이긴 했지만, 아이는 그런 아빠를 보는 게 안타까웠던 것.
- 우리 애가 아빠를 참 좋아해요. 애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고 녀석은 저 말고 아빠 등만 바라보는 것 같아요. 호호.
경태 아버지는 특전사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다 전역해 소방관이 됐다.
아빠가 군인일 때는 너무 어려 별다른 기억이 없는 경태지만, 그 시절 사진 속에서는 군복을 입었고 현실에서는 소방복을 입은 제복 차림의 아빠를 매우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한단다.
그러니까 경태에게 아빠는 자기만의 영웅인 셈.
그런 아빠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아이의 안타까운 마음이 이해가 됐다.
- 경태는 아빠 동료들도 참 좋아했어요. 아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다들 경태의 영웅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이사를 왔으니 경태가 아는 멋지고 능력 있는 어른들이 더는 곁에 없잖아요. 이사 오기 전이라면, 아마 아빠 동료들에게 아빠를 도와주라고 부탁했겠죠.
엄마의 추측대로라면, 경태의 눈에는 아빠를 도울 수 있는 사람으로 녀석이 아직 친해지지 못한 이곳 소방대원보다 도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는 얘기였다.
“... 아홉 살짜리 눈에는 시장이 제일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이야.”
“크게 틀린 건 아니잖아. 시장이 아무런 힘이 없다고는 말 못 하지.”
중얼거리는 도훈에게 영배가 답했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민원을 받았으니 당연히 처리해야지.”
“민원? 하하. 그래 민원이 맞긴 하다. 그러고 보니, 너 시장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태 만한 민원인 만났었지, 아마?”
“그랬지. 준수 친구였지.”
“그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재민이. 오재민.”
“아, 맞다. 아무튼, 민원은 몰래 잘 해결한 것 같던데, 이번에도 그럴 거냐?”
재민이네 아빠가 야식을 배달했던 공가네 감자탕 식재료 공장 공장장의 갑질을 해결했던 게 임기 초의 일.
다만, 도훈도 도훈과 함께 새벽에 감자탕 먹으러 갔던 영진도 다른 직원들에게 이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 알고 있었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 네가 그런 걸 그냥 넘길 놈이냐? 어떻게든 했을 거로 생각했다.”
“......”
때로는 눈치가 없고 필요 이상으로 수다스러운 것 같지만, 영배는 그래도 되는 사안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사안을 확실히 구분하는 남자.
괜히 도훈의 친구이자 비서관인 게 아니었다.
“아무튼, 그래서 민원 처리를 어떤 식으로 하려고?”
“일단, 사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지. 조심스럽게.”
“어떻게?”
“우리 소방서장님이나 대원들한테도 얘기를 듣고, 서천이랬지? 거기 소방서장님이나 경태 아빠 전 동료들 얘기도 들어보는 게 맞지 않겠어?”
“그래야지. 아무래도 사정을 제일 잘 알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담배를 피우며 도훈과 영배가 ‘민원 처리’에 대해 상의하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뭔가가 두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 젠장.”
“... 썩을···.”
동시에 투덜거린 두 사람이 말을 이었다.
“민원도 민원인데···, 일단 시청으로 돌아가자, 형.”
“그래야지. 낮에 기껏 치워놨더니 밤 되니 또 쏟아지네. 허, 타이밍도 잘 맞춰, 진짜. 이거 야밤에 사람들 불러낼 정도로 내리면 안 되는데···.”
“... 가자.”
“응.”
도훈과 영배가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서두르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다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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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오다가 그쳤다 오다가 그쳤다를 반복하다가 월요일 오전에 비로 바뀌었다.
주말 내내 전국적으로 눈이 내렸지만, 경기-충청 지역에 제일 많은 눈이 내렸다.
날씨가 풀려 눈이 아닌 비로 바뀐 것도 다행이었지만, 양이 많지 않은 가느다란 보슬비가 내린다는 것도 반가웠다.
한겨울을 방불케 하듯 추웠다가 갑자기 확 풀려버린 날씨.
‘미쳤다’는 표현이 딱 맞는 날씨의 변화였지만, 따뜻한 기온과 비에 녹아 사라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고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밤 되기 전에 비가 눈을 싹 다 녹여주면 더 좋겠습니다.”
청사 현관 처마 밑에 선 도훈과 두진이 대화하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내린 눈의 적설량은 놀랍게도 모두 합해 30cm를 넘었다.
도훈이 시청 직원들을 번갈아 제설작업에 동원했고 오늘 새벽에도 골목까지 마지막 제설작업을 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눈에 푹 파묻혀 있었을 터.
“들어가서 좀 쉬시라니까요.”
“아닙니다. 저는 상황실만 지켰을 뿐인데요.”
“부시장님도 쉬러 가셨는데, 실장님은 부시장님보다···.”
“하하, 몇 살 많지요. 하지만, 부시장님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시는 통에 저는 앉아있는 것 말고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주말 내내 직원들이 제설작업이나 기타 여러 일에 나서는 동안, 전경완 부시장과 두진도 때로는 함께 때로는 번갈아 쉬기도 하며 계속 상황실을 지켰다.
눈을 치운 것보다는 덜했겠지만, 집에도 못 가고 상황실을 지켰다는 걸 증명하듯 두진은 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앞으로 며칠은 직원들 전부 정시퇴근하라고 해야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네요.”
“좋은 생각은요. 생각 같아선 전부 조퇴시키고 싶습니다. 근데 그건 또 안 되잖습니까.”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게 아니니까 부서장들이 알아서 잘 조절할 겁니다.”
“... 쩝.”
제설작업의 여파를 시청 직원들의 표정이나 얼굴빛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기에 도훈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혀를 차는데 영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장님. 시장님과 통화하고 싶다는 분한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저하고요? 누가요?”
“서천 소방서 분인데, 경태 아빠 상관으로 이쪽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함께 근무했던 분이랍니다.”
“흐음.”
“어제 시장님이 거기 소방대장님과 통화했다는 얘기를 듣고 따로 하실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어제, 도훈은 대흥시 소방서장을 통해 서천군 소방서장에게 연락했다.
경태 아빠와 관련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는데, 대흥시 소방서장과 어떻게 경태 아빠를 도울 수 있을지 상의한 다음이었다.
아무리 아들에게 아빠를 도와달라는 민원을 받았더라도, 엄연한 조직체계라는 게 있으니 도훈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 아이가 시장님께 전화를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강철기 소방교는 저도 눈여겨보고 있는 대원입니다. 시장님이 도와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슬프게도, 경태 아빠 강철기 소방교와 같은 상황을 겪은 대원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대원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운 경험도 도훈보다는 소방조직의 사람에게 훨씬 많을 터.
도훈은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자신이 백지상태에서 나서는 게 경태나 아빠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모두가 위험으로부터 멀어질 때 오히려 그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는 사람.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때로는 하나뿐인 목숨마저 바치는 사람, 소방관.
그런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존경하고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예전부터 컸지만, 국가가 그들에게 제대로 관심과 예산을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창피하게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현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소방관의 국가직 전환조차, 갖은 이유를 들어 반대하던 야당이 21대 총선을 앞두고 ‘생색내듯’ 동의해 관련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소방관들을 대우해야 한다는 건 국민 절대다수가 공감하는 일.
‘... 대통령은 전국의 소방관을, 나는 우리 동네 소방관을 챙겨야지.’
그렇게 중얼거린 도훈은 시장실로 복귀해 연락을 기다린다는 서천의 소방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고필영 소방위님. 저는 대흥시 시장 김도훈입니다.”
- 아, 시장님. 안녕하십니까.
“통화 괜찮으십니까? 비상이 해제됐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거기도 주말 내내 눈이 많이 와서 비상근무하시느라 피곤하신 거 아닙니까?”
-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이골이 났죠. 그리고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내륙에도 눈이 많이 왔던데요. 시장님도 주말 내내 비상 근무하셨다는 얘기 아까 비서님에게 들었습니다.
서해에 인접한 서천군은 대흥시보다 눈이 더 많이 왔다.
당연히 그만큼 더 힘들었을 텐데, 이골이 났다는 말로 웃어넘기며 상대를 챙기는 베테랑의 말에 도훈은 새삼 ‘소방관들 대단하다’는 마음이 다시 들었다.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도훈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철기 대원 관련해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 네. 그렇습니다. 이제 시장님 휘하에 있으니 제가 괜한 참견을 해서 결례를 저지르는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결례라뇨? 뭐가 됐든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도훈의 말에 고필영 소방위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 ... 죄는 제가 지었는데 강 소방교가 자책하고 고통받는 것 같아서 죄스럽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말 그대로입니다. 작년 가을 대원의 목숨을 잃게 한 책임은 제게 있거든요.
“......”
- 제가 아니었으면 신입 대원이 생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철기가 다치지도 않았을 테고요.
“......”
죄책감 가득한 고 소방위의 말에 도훈은 말문을 잃었고, 상대도 얼마간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도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좀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도훈과 고 소방위의 무거운 통화가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