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225화 (226/279)

225. 기대하지 않았던… - 3.

겉으로 내색은 안 했으나 도훈이 속으로 2월 내내 꽤 골치를 앓았던 도시락 공장 문제가 해결됐다.

봉사단체는 2월 말일 시범운영에 들어간 도시락 공장이 제시한 도시락 샘플에 무척 만족하고 도시락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양은 물론 맛도 훌륭했고 공개한 식재료의 질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까.

또한, 신임 공장장은 이런 제안을 해 여러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 아, 물건만 좋다면야 이 동네에서 나오는 식재료를 못 쓸 이유가 전혀 없지. 안 그래도 내가 장날 나가 보니께 좋은 물건들 많던디? 우리가 장날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살 수는 없지만, 누가 좋은 물건 모아서 가져다주면 좋지. 그러면 거의 직거래니까 업자들 여럿 거쳐서 구하는 것보다는 가격 면에서도 낫지 않겄어? 다만, 공급이 꾸준해야 혀. 품질? 그건 기본이지. 부실한 물건 납품하면 그날로 끝이여. 난 먹는 거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 사람으로 안 봐.

이미 도시락 공장에 각종 식재료를 납품하는 업체가 있지만, 대흥시에서 생산되는 식재료도 구매할 의사가 있다는 말에 농협 담당 부서에서 공장에 납품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장에야 그 성과가 미미할 테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었다.

아무튼, 공장이 운영을 시작하면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도시락 배달 사업은 아무런 문제 없이 계속될 수 있었다.

3월 2일, 새롭게 운영을 시작한 공장에서 도시락을 무사히 납품받아 배달까지 마쳤다는 연락을 받은 직후 도훈은 도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그때 도시락 공장 상황 물어본 거 네 선배가 시켜서 한 거지?”

- 시킨 게 아니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서 한 거야. 나도 이제 기자 짬밥이 얼만데, 선배가 하란다고 무조건 하겠어?

“네가 기자 짬밥을 얘기하는 날이 오다니, 세월이 무상하다.”

- 이거 왜 이러셔? 나 이제 후배도 있는 어엿한 선배 기자라고.

“됐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해봐.”

- 그러니까···.

도연의 설명에 따르면, 공가네 감자탕 회장님이 도시락 공장을 매입한 건 실제로 사업 다각화 고민의 일환이었지만, 손자인 최승범의 제안이 결정적이었단다.

거기에 조리 실장 할머니의 손녀가 대흥시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단다.

“그래?”

- 응, 몰랐어?

“전혀.”

- 승범 선배랑도 잘 알고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람이래. 지금도 종종 대전 본점에 밥 먹으러 간다는데? 선배 말로는 그 선생님이 자기 할머니나 회장 할머니에게 오빠 얘기를 꽤 많이 했을 거래. ‘시장이 사람이 좋다.’, ‘시장이 참 사려 깊다.’, ‘시장이 일을 잘한다.’ 이런 식으로.

“... 하하.”

- 오빠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학교 선생님들한테는 제법 인기가 많다던데? 얘기 잘 들어준다며?

“글쎄다. 이런저런 일로 젊은 선생님들하고 만날 일이 많기는 하지.”

도훈은 어떤 사업을 추진할 때, 그 사업의 혜택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치게 했다.

그래서 시에서 분야가 어찌 됐든 학생과 청소년이 대상이 되는 사업을 추진할 때는 학부모와 각급 학교 선생님들이 준비단계에서부터 참여하는 건 이제 관례가 됐다.

사안에 따라서는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 청취도 부지런히 하는 도훈이니, 적어도 ‘학교’라는 공간의 구성원 사이에서 도훈의 평가는 높은 편이었다.

“이번 일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도움이 컸네. 난 별로 한 일이 없는데.”

- 꼭 그렇게 생각할 건 아니지. 오빠가 평소에 해온 일의 영향이 다른 사람을 통해 이렇게 돌아온 거 아닐까?

“... 그건 너무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거고.”

- 어머? 오빠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오호? 우리 오빠가 이런 면도 있었어? 호호!

도연이 장난스럽게 웃자 도훈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끄러워, 인마. 용건 끝났으니까 이제 끊자.”

- 쳇. 누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아빠나 오빠나 맨날 전화하다 할 말 없으면 끊자고 해. 흥! 내가 먼저 끊을 거다.

뚝.

도연이 전화를 끊어버렸고, 도훈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담담히 미소 지었다.

최승범 기자가 자기 할머니인 회장님에게 실제로 뭐라고 얘기했는지 모르겠고 조리 실장 할머니의 손녀가 또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말이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낸 것은 사실.

도훈에게는 딱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 셈이었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일하는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생각을 정리한 도훈이 몸을 일으켰다.

짐을 챙겨 시장실 문을 열고 비서실로 나간 도훈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자, 다음 일정 가시죠.”

기운차게 움직이는 도훈의 등 뒤에서 조상님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래. 자뻑은 절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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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만물이 파릇파릇 새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시기··· 여야 하는데, 올해는 사정이 좀 달랐다.

3월의 첫 금요일 오후, 한반도에 이상 한파가 몰아치더니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척 많이.

“... 이거 쉽게 그칠 눈이 아닐 것 같죠?”

“네. 기상 특보를 보니까 주말 내내 눈이 올 것 같습니다.”

“흐음.”

비서실 창가에 선 도훈과 두진의 대화.

창밖 펑펑 눈이 쏟아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두 사람 모두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남은 제설제로 감당될까요?”

“다음 주에도 이렇게 눈이 내리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주말까지라면 괜찮을 겁니다. 작년 가을에 제설제를 많이 사 놔서 겨울에 쓰고도 제법 남았으니까요.”

지난겨울을 앞두고, 춥기도 할 테지만 눈도 많이 올 거라는 기상청의 발표가 있었다.

예보가 잘 안 맞기로 악명 높은 한국 기상청의 발표였지만, 도훈은 ‘혹시나’하는 마음에 평소보다 많은 양의 제설제를 주문할 것을 지시했었다.

모자라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보다는 쓰고 남은 걸 어찌 처리할까 고민하는 게 나으니까.

결과적으로, 눈이 자주 왔고 적설량도 많아서 도훈의 지시는 선견지명이 됐다.

올해 초, 거듭된 제설제 사용으로 인해 여러 지자체에서 제설제를 구하느라 난리가 났을 때 대흥시는 제설제가 부족해 문제를 겪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제설제 뿌리는 건 시작했을 테고, 직원들 비상대기 지시는 내려졌죠?”

“네. 시청 소속 전 직원에게 주말에 시 관내에 머무르라고 했습니다.”

큰 도로야 제설제를 뿌려서 눈을 녹인다지만,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야 하는 곳도 많았다.

대흥시청 직원 같은 지방직 공무원들은 그런 일이 생길 때 제일 먼저 동원되는 인력에 속했다.

“... 의용소방대에 연락해 음식 준비 좀 해달라고 전해주세요.”

“아, 그걸 깜빡했네요. 알겠습니다.”

“주말 내내 눈이 온다면, 평소보다 양을 넉넉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얘기도 하겠습니다.”

제설이 됐든 화재진압이 됐든 방역이 됐든, 어떤 상황이 발생해 시청 직원들이 동원되면 식사는커녕 간식조차 제대로 먹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대흥시의 의용소방대는 그런 상황에 부닥친 경찰관, 소방관, 시청 직원들이 배라도 든든히 채운 상태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하는 아주 귀중한 존재였다.

의용소방대 대원들도 자신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알아, 이런 일이 갑자기 발생해도 순식간에 모여들어 사람들의 민생고를 해결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띠리리리.

“대흥시장 비서실입니다. 아, 과장님. 시장님요? 네, 잠시만요.”

유선 전화를 받는 지연의 말에 도훈이 고개를 돌렸다.

“시장님. 안전총괄과장인데요. 급한 일로 통화하고 싶답니다.”

도훈이 걸음을 옮겨 유선 전화를 받았다.

“시장입니다.”

- 안전총괄과장입니다.

“말씀하세요.”

- 대전지방국도관리청에서 제설제 지원을 요청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 국도관리청에서요? 거기서 관리하는 도로가 엄청나게 많을 텐데 우리가 가진 게 얼마나 된다고요.”

- 급한 대로 여기저기 연락을 하는 모양입니다. 고사리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라더군요.

“우리한테는 얼마나 달라는 거죠?”

-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합니다.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당장 쓸 것도 없다는 겁니까?”

- 그건 아닌데 정말 주말 내내 눈이 온다면, 제설제가 부족하기에 십상이라고 했습니다.

“... 흐음. 우리도 풍족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인데···.”

- 제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상대가 거듭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일단 시장님께 말씀은 드려보겠다고 했습니다. 지원해준다는 확답은 하지 않았고요.

“쯧.”

도훈이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시청도 그렇지만, 국도관리청이라면 겨울철 제설제를 충분히 확보하는 기본 중의 기본일 터.

그런 관공서에서 제설제가 부족해 작은 지자체에까지 지원을 요청하는 게 마뜩잖았다.

‘... 눈이 예상보다···. 아니지. 기상청 예상대로 많이 오긴 했지.’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이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량을 남기고 나머지는 보내준다고 하세요.”

-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쩌겠습니까? 당장 눈이 쌓여 길이 막히면 그 피해를 볼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 알겠습니다, 시장님.

통화를 마친 도훈이 전화를 내려놓고 돌아서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두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휴우, 이번에도 기상청 예보가 맞길 바라야겠군요.”

“네.”

“그나마 눈 많이 온다는 시기가 주말이라서 다행입니다.”

“맞습니다. 평일이라면···. 어휴, 생각도 하기 싫네요.”

“여기가 강원도가 아니라는 것도 다행이죠.”

“그것도 그렇고요. 제가 군 생활을 강원도에서 했다는 거 아닙니까? 거기서는 겨울에 오는 눈은···.”

“눈이 아니라 쓰레기인가요?”

“그 정도면 다행이죠. 심할 때는 쓰레기가 아니라 그냥 재해에요. 사람이 감당 못 하는 자연재해요.”

“하하. 이번에는 그 정도가 아니어야 할 텐데요.”

“그러니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마치 지금이 한겨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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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점심 무렵, 대흥시 운계면 주민센터 주차장.

골목길 제설작업을 마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점심을 배식받고 있었다.

“자자, 드시고 또 드세요. 국수고 멸치육수고 많이 해놨습니다.”

배식하는 의용소방대 부녀회원들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에게 국수를 나눠주며 연신 소리쳤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멸치국수 한 그릇에 단무지와 김치뿐인 반찬이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소집되어 쌓이는 눈을 치우고 또 치우느라 지치고 허기진 이들에게는 절대 소박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직원들과 함께 제설작업을 한 도훈과 영배도 마찬가지였다.

후루루룩!

“어우! 좋다.”

거하게 국물을 들이마신 영배가 감탄하는데, 두진과 통화를 마친 도훈이 자리에 앉았다.

“다른 덴 별일 없답니까?”

“비슷비슷한 모양이에요. 눈 치우느라 바쁘고 정신없긴 하지만, 다행히 큰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제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중간중간 잠깐씩 그치긴 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멈출 기미가 아니었다.

오늘 아침까지 대흥시에 내린 눈의 적설량이 15cm가 넘어서 일부 인원은 밤새 제설작업을 하다 새벽에 귀가했고, 아침에 동원된 인원이 시 전역의 주택가에서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동원 가능한 장비와 인력이 모두 동원된 상황.

도훈은 상황실을 전경완 부시장과 두진에게 맡기고 현장에 나와 제설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틈틈이 상황실과 연락하고 있는데, 눈 치우는 일이 고된 것 말고 다른 상황은 다행히 발생하지 않았다.

“국물 한 번 드셔 보세요, 시장님. 죽입니다.”

후루루룩.

“그러네요. 맛도 맛이지만, 뜨뜻한 게 들어가니 속이 확 풀리는 기분입니다.”

“네. 땀을 왕창 흘려서 그런지 맛도 기가 막힙니다. 하하하.”

영배의 너스레에 주변 사람이 웃었고 도훈도 피식 웃고는 이내 국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배고픈 장정이 푸짐한 국수 한 그릇을 해치우는데 걸린 시간은 순식간.

식기를 반납하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도훈이 담배에 불을 붙였고, 영배가 부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가까이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도훈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 한 대 줘?”

“유혹하지 마. 안간힘을 써서 참는 중이니까.”

“쯧. 그럼 그렇게 간절한 눈으로 보질 말던가.”

“흥! 인마, 너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세경 씨가 아무리 관대해도 담배에까지 관대할 것 같냐? 분명 조만간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할걸?”

“... 글쎄.”

2월 중순 주말에 도훈은 시간을 내어 세경의 어머니께 인사를 다녀왔다.

잔뜩 긴장한 채 찾아갔지만, 세경의 어머니가 너무나도 반갑게 맞이해줘서 아주 훈훈한 대화가 오갔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결혼을 서두르자’는 이야기를 하셨던 걸 제외하면, 무척 만족스러운 그런 시간이었다.

조만간 세경이 도훈의 아버지와 정식으로 인사하기로 했는데, 당사자인 도훈과 세경보다 더 기대하고 있는 게 바로 비서실 직원들이었다.

양쪽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면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추워도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 작업이 덜 고생스러워 다행이네.”

“말 돌리기는.”

쯔으읍.

도훈이 투덜거리는 영배를 의식해 더욱 맛있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빨아들이던 그 순간.

웅성웅성.

저만치 준비된 뜨거운 물에 일회용 커피를 타서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직원들이 웅성거리더니 누군가 도훈에게 소리쳤다.

“시장님!”

움찔.

“큰일 났습니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라 손에 든 담배를 떨어뜨렸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도훈이 직원을 향해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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