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기대하지 않았던… - 2.
“총각이 대흥 시장이여?”
“예, 할머님.”
“음. 예의 차린다고 할머님이라고 하나 본디, 손자나 손녀가 할매라고 하는 건 몰라도 초면인 총각한테까지 할머님 소리 듣는 게 꼭 기분 좋은 건 아닌디?”
“... 그, 그러세요?”
“그려. 늙어도 여자는 여자니께.”
“... 하하.”
처음 만난 사람과의 대화 몇 마디 만에 당황하는 건 도훈에게 무척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 할머니의 직설적 화법은 도훈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할머니는 멋쩍은 표정이 된 도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혼자 온겨?”
“네.”
“시장이람서? 기사도 있고 비서도 있을 텐데 같이 안 왔어?”
“아직 업무시간도 아닌데 그럴 필요는 없죠. 만나자고 하신 건 저지, 제 기사나 비서는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할머니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른 도훈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뒷짐을 지고 걷던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도훈을 향해 말했다.
“안 가?”
“네?”
“아, 따라오라고.”
“아, 예.”
도훈이 할머니의 반 보 뒤에 따라붙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왜 여기서 보자고 했는지 일체의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시장을 활보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어이없긴 했지만, 이유가 있을 거라 도훈은 생각했다.
얼마간 걷던 할머니는 한 매대 앞에 멈춰 서더니 도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거 어뗘?”
“부추요?”
“어.”
“음. 어떤 음식을 만드시려고요?”
“김치.”
이 뜬금없는 상황에 도훈은 심히 어이가 없었지만, 가만히 부추를 살피고 답했다.
“너무 굵은 거 아닌가요? 좀 웃자란 것 같습니다.”
“다른 물건보다 가격이 싸잖어?”
“값이 싸면 좋긴 하지만, 김치에는 좀 덜 자란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부추가 다 거기서 거기 아녀? 왜 그렇게 생각하는디?”
“음식은 정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누가 먹게 되든, 만들 때부터 정성을 들이려면 꼭 싼 게 좋은 게 아니라 용도에 맞는 걸 고르는 게 맞겠죠. 이 부추는 다른 건 몰라도 김치에는 안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려?”
“네.”
고개를 끄덕거린 할머니가 물건은 사지도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이게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이지?’
얌전히 뒤를 따르면서도 도훈은 속으로 황당해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부추에 관해 물었을 때, 도훈은 아는 걸 답한 게 아니라 ‘추측’한 걸 말했을 뿐이었다.
요리사도 아닌 도훈이, 상대가 알려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어 도착한 뒤에야 만남 장소가 시장이라는 걸 안 도훈이 부추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런데 할머니는 도훈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굳이 언급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요리사 테스트를 받는 것도 아닌데···.’
“아, 뭐 혀? 얼른 따라와.”
“... 네.”
할머니의 채근에 몇 걸음 떨어졌던 도훈이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황당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이 무시는?”
“파는 어떤 게 좋은 것 같어?”
“마늘 좀 골라봐.”
할머니는 이 매대 저 매대를 돌아다니며 각종 식재료에 대한 품평을 요구했다.
“어, 너무 작지 않나요?”
“너무 커서 억셀 것 같은데요?”
“껍질 벗겨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됩니까? 아, 안돼요? 그럼 어떤 게 좋은 건지 좀 알려주세요.”
요리를 전혀 안 하는 게 아니니 도훈이 식재료에 대해 문외한은 아니었지만, 도훈의 식재료에 대한 지식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전혀 모르겠는 식재료에 관해서는 신선한 게 좋다느니 빛깔이 좋은 게 좋지 않겠냐는 ‘상식’적인 답을 했고 상식을 갖다 붙이기 힘든 식재료에 관해서는 차라리 매대의 상인에게 묻는 방법을 택했다.
- 인마, 차라리 나한테 물어봐. 빛깔 좋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니까?
‘... 아무래도 저 할머니가 정답을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럽니다.’
-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저분께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지켜보던 조상님이 답답해했지만, 도훈은 황당한 마음을 꾹 누르고 성의껏 할머니의 요구에 응했다.
할머니는 한 매대에 있는 여러 종류의 식재료에 관해 묻지 않고 이 매대 저 매대 돌아다니며 꼭 한 가지에 관해서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농산물에 한정되지 않고 수산물에 젓갈, 고기류에까지 이어졌다.
“고등어는 좀 아나?”
“새우젓 맛 좀 볼텨?”
“어떤 걸 삶아야 맛난 국물이 될 것 같어?”
밑도 끝도 없는 할머니의 행동에 응해주며 한 시간 가까이 시장을 휘젓고 다닌 결과 젊은 도훈은 적잖게 지쳤는데, 오히려 할머니는 쌩쌩했다.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기는 뭐가 힘들어. 맨날 하는 일인디.”
“... 하하, 정정··· 아니, 건강하시네요.”
도훈이 좀 지친 표정으로 웃으며 답하자 할머니가 처음으로 마주 웃었다.
“배 안 고픈가?”
“고프죠.”
“그럼 아침 먹으러 가자고.”
“장 다 보셨어요? 물건 안 사세요?”
도훈이 묻자 할머니는 수더분하게 웃으며 답했다.
“장? 단골가게에서 다 알아서 최상품으로 갖다 줄 텐데 뭘.”
“... 하하.”
“가자고.”
“... 네.”
한 시간 가까이 ‘헛고생’을 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지쳐서 그런지 도훈은 허탈한 마음이 들뿐 화도 나지 않았다.
‘저분 도대체 뭐 하는 분이지···?’
식당이나 요식업을 할 것 같다는 추측이 들뿐, 아직 할머니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태.
‘... 그러고 보니 저분이 공장 인수한 당사자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할머니가 시장 앞에 도착한 도훈의 얼굴을 알아봤고, 먼저 말을 건 뒤 자기 페이스대로 이끌어갔다.
거기에 휘둘리다 보니, 도훈은 할머니가 도시락 공장을 인수한 사람이 맞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 나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냐.’
그렇게 자신에게 어이없어하며 얼마간 할머니의 뒤를 말없이 따르던 도훈이 왠지 눈에 들어오는 거리의 풍경이 낯이 익다고 느끼던 순간.
할머니는 불이 환하게 켜진 한 식당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여기는···?”
간판을 바라보고 선 채 도훈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열고 도훈에게 말했다.
“뭘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어? 왔으면 얼른 들어오지.”
“... 네.”
지금껏 따라온 할머니 말고 낯익은 다른 할머니의 재촉에 도훈이 멍청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 위에 있는 간판에 ‘공가네 감자탕 본점’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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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공가네 감자탕 안쪽의 구석진 곳에 자리한 테이블.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는 말에 감자탕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도훈 앞에 ‘공가네 감자탕’ 체인의 공 회장님이 앉아 있었다.
“저분이 여기 조리 실장님이라고요?”
“응. 주방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어.”
“... 그랬군요.”
공 할머니의 말에 도훈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음식을 잘 아는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전국에 체인을 가진 감자탕집 본점의 조리 실장일 줄이야.
“회장님이 도시락 공장 인수하신 겁니까?”
“응. 우연히 소식을 들었거든. 사업 다각화를 고민하고 있는데 도시락 사업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 마침, 대흥에 우리 감자탕 체인 공장도 있잖아.”
“... 그렇죠.”
“우리 조리 실장 다음 직장도 고민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고 매입했지.”
“... 다음 직장이라뇨?”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공 회장님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아, 조리 실장이 이번 달로 은퇴하거든.”
“... 은퇴요?”
“응. 나이 들었다고 내보내는 게 아니고, 무릎이 좀 안 좋아져서.”
“아, 네.”
“본인은 멀쩡하다고 박박 우기지만, 약 먹고 병원 다니는 걸 뻔히 아는데 온종일 서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주방일을 계속하게 놔둘 수는 없잖아.”
“... 그렇군요. 그런데 새 직장이라는 게···?”
“3월부터 조리 실장이 그 도시락 공장 공장장이야. 총책임자지.”
“......”
이어진 공 회장님의 설명은 이랬다.
오늘 도훈이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이 공가네 감자탕이 개업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회장님과 함께 일해온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분이란다.
현재 사장인 공 회장의 며느리조차 존대하고 음식에 관해서는 조리 실장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따를 만큼 실력과 권위를 인정받은 분이라나?
그런데 나이는 어쩔 수 없어 몇 달 전부터 무릎이 많이 안 좋아져 공 회장이 은퇴를 권했단다.
“일보다 쉬거나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내 앉지도 못하고 일해야 하는 주방이니까 문제지만, 공장장은 그렇게까지 음식에 매달리지는 않아도 되니까. 공장 음식 책임질 사람은 이미 따로 구해놨지. 슬렁슬렁 돌아다니면서 감독만 하면 돼.”
“그래도 무릎이라면···. 아, 혹시 계속 일을 하셔야 하는 형편인 겁니까?”
“아닌데? 우리 조리 실장 작기는 해도 어엿한 건물의 건물준데?”
“......”
공 회장님은 조리 실장에게 은퇴를 권했지만, 당사자는 극구 거부했단다.
그러다 공 회장님이 대흥시의 도시락 공장 얘기를 듣고 사업 다각화도 추진할 겸, 고집 센 조리 실장 은퇴도 시킬 겸 공장을 매입해 공장장으로 발령냈단다.
- 쉬엄쉬엄 일하면서 맛난 음식 만들어서 좋은 일도 좀 한다고 생각해. 그 공장에서 만든 밥을 대흥시의 가난한 집 애들이나 노인들이 매일 먹는다니까.
이 얘기에 조리 실장이 흥미가 돋았는지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단다.
만나서 얘기해보고 좋은 일을 ‘제대로’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한 번 해보겠다고.
“저질 식재료를 쓴 건 공장 사람들의 잘못이지만,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시장한테도 책임이 있다는 거야.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놈이 철저히 확인했다면, 어떻게 음식 갖고 그딴 장난을 치겠냐면서.”
“... 틀린 말씀은 아니네요.”
“내가 자네 진국이라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거듭 얘기했는데 직접 확인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어. 새벽에 시장에서 만나자는 것도 조리 실장 생각이야.”
“... 하하.”
“오늘 새벽에 자네 만나러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반반이었을 거야. 그런데 조금 전에 쑥 들어오더니 나한테 그러더라고. 공장장 하겠다고.”
“... 하하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그, 글쎄요.”
“아, 자세히 얘기를 해봐.”
“... 그게···.”
도훈은 조리 실장 할머니와 시장을 활보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도훈이 그다지 오래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공 회장님은 왜 조리 실장이 공장장을 맡겠다고 했는지 이해한 눈치였다.
그게 도훈을 더 영문모르게 하고 있는데, 주방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던 조리 실장이 모습을 보였다.
웃고 있는 공 회장을 본 조리 실장이 투덜거렸다.
“나 은퇴한다니까 그렇게 좋아요?”
“좋지. 이젠 힘든 일 안 해도 되잖아?”
“어떻게 알어요? 내가 다 할지? 공장에서는 공장장이 왕인디.”
“거기도 조리 실장 있거든? 내가 걔한테 단단히 일렀어. 공장장이 감독 이상의 역할을 했다가는 조리 실장 월급 반으로 줄일 거라고.”
“쳇!”
회장과 조리 실장이 툭탁거리는 걸 말없이 바라보던 도훈이 입을 연 건 실장 할머니가 뒤돌아서던 순간.
“저기, 실장님.”
“왜?”
“... 도대체 오늘 제게서 뭘 보신 건가요? 중요한 얘기는 전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혀?”
“네.”
궁금해 죽겠다는 도훈의 표정을 본 조리 실장 할머니가 피식 웃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새벽 6시에 밑도 끝도 없이 오라는 데도 왔지. 그것도 기사 딸린 차 타고 온 게 아니고 혼자서 왔잖여?”
“... 그랬죠.”
“괜한 권위 세우려는 사람이면 안 왔을겨. 그리고 업무시간 아니니께 기사 안 부르고 혼자 왔다는 건 아랫사람이라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거지.”
“... 그렇습니까?”
“내 생각엔 그려. 그리고 초면의 할매가 밑도 끝도 없이 시장을 델꼬 다니는 걸 군말 없이 따른 걸 보면 참을성도 상당할 테고.”
“......”
“식재료에 관해 물어볼 때마다 총각은 꼭 먹는 사람 입장을 생각하고 이야기혔어. 가격 같은 거 안 따지고 말여.”
“... 제가 그랬나요?”
“내 보기엔 그렸어. 물론, 총각이 식재료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한 도훈에게 실장 할머니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회장님이 웬만혀도 사람 칭찬 잘 안 하거든? 그런데 총각 칭찬은 거하게 허드라고.”
“......”
“그리고 승범이 놈도 자네 괜찮은 사람이라는 얘길 한 적이 있었거든. 시장질은 잘하는지 모르겠는데, 오늘 시장 돌면서 사람 대하는 기본 태도는 됐다고 생각혔지.”
“... 하하.”
“음식 만드는 최고 보람이 뭔 줄 알어? 돈 많이 버는 것도 보람 중 하난디, 내가 만든 음식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게 제일이여.”
“......”
“총각은 왠지 그런 마음으로 그 봉사활동인지 사업인지를 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어.”
“......”
“됐남?”
“... 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도훈에게 실장 할머니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음식은 좀 혀. 도시락 맛있게 만들 테니께 많이 가져다 좋은 일 혀.”
“... 고맙습니다.”
“고맙긴, 자네한테만 줄 거 아니여 공짜로 줄 것도 아니고. 어찌 됐든 사업이잖여? 내 목표가 도시락 잘 팔아서 도시락 체인 만드는 거여.”
“... 하하, 네.”
머쓱하게 웃는 도훈에게 실장 할머니가 물었다.
“그나저나 감자탕은 맛있었어?”
“네. 정말 맛있었습니다.”
도훈이 거리낌 없이 환하게 웃으며 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