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기대하지 않았던… - 1.
1월이 지나고 2월이 됐다.
여름에 그토록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다는 게 무색하게도 한반도에는 강추위가 이어졌다.
지난겨울보다 눈이 훨씬 더 많이 내리거나 하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연일 계속되는 한파에 피해를 보지 않도록 도훈과 시청 직원들은 분주했다.
2월 중순 이제 제발 좀 그쳤으면 하는 마음에도 여전히 춥던 어느 날, 도훈은 오래간만에 보건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보건소에서 또 한 번 큰일 하셨습니다.”
“큰일은요. 해야 할 일을 빠뜨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덕분에 사람 목숨을 구했잖습니까.”
“다행히도 말이죠.”
“여하튼, 정말 잘해주셨습니다.”
“허허. 제가 한 것 아닙니다. 절 칭찬하지 마시고, 당사자를 칭찬하셔야죠.”
“뭐, 당사자는 물론이고 보건소 분들 전부를 칭찬하는 게 맞겠죠.”
“거기에 저도 들어가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보건소장실에 앉아 훈훈한 대화를 이어가는 도훈과 소장 옆에는 두진, 영배 외에 보건소 직원 한 명이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힌 채 앉아 있었다.
도훈이 얼굴을 붉힌 여직원에게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어르신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요?”
“다행스럽게도 며칠 안정을 취하면 퇴원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오전에 어르신 며느리하고 통화했을 때 들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도훈이 웃으며 말했고 다들 비슷한 미소를 보이자 여직원의 얼굴이 더 붉게 변했다.
그녀는 엊그제 심혈관계 지병이 있는 어르신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전화를 하다가 연락이 닿지 않는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시청에서 관계기관의 협조까지 받아 혹서기에 농촌 지역 중심으로 ‘안전 순찰’을 하는 것처럼, 보건소는 전화로 독거 어르신들의 안부를 정기적으로 체크하는 일을 했다.
부여된 임무는 아니었지만, 노령층 인구가 많은 대흥시 사정을 고려해 보건소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날이 너무 덥거나 추우면 보건소를 찾는 이들이 줄게 마련이라 직원들에게 다행히 그 정도의 시간 여유는 있었다.
“노파심에서 다시 묻는 건데, 온종일 전화에만 매달려야 하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저희 나름의 여유가 있고 직원들끼리 나누어서 전화해도 업무에 지장이 없으니까 계속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계속하겠어요.”
“네. 다행입니다.”
추운 날씨는 심혈관계 질환이 있는 사람에게 위험한 환경.
그래서 겨울이 되면 보건소에서 심혈관계 질환이 있는 어르신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전화로 안부를 체크했다.
보건소 직원이 여러 번 전화를 걸었어도 상대가 받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민센터에 확인을 요청했고, 주민센터 복지팀 직원이 즉시 방문해 가슴을 부여잡고 끙끙대는 어르신을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증상이 심했다면 전화도, 방문 확인도 소용없었을 테니까.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 운도 보건소에서 노력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터.
“올겨울에도 전화요금 많이 나올 것 같은데요.”
“매번 말씀드리지만, 그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름이 됐든 겨울이 됐든 어르신들 안부 살피는 전화하는 것이고 이렇게 실제로 성과를 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책임집니다.”
“허허. 전화요금만요?”
“이번엔 회식비도 책임지죠.”
“감사합니다, 시장님.”
그렇게 훈훈한 자리가 마무리되는데, 보건소장이 화제를 돌렸다.
“참, 도시락 배달 사업은 어떻게 풀리고 있습니까? 듣자 하니, 그 도시락 공장 폐업신고까지 했다던데요. 맞습니까?”
“네. 폐업한 것 맞습니다.”
적발 당일부터 가동을 중단한 도시락 공장은, ‘저질’ 식재료를 써왔다는 게 뉴스에 나가며 기존의 모든 거래처로부터 계약해지를 당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계약과 다르게 질 떨어지는 도시락을 몰래 납품했다는 소송에도 휘말렸다.
대흥시에 있는 도시락 공장 외에 저질 식재료를 사용하다 적발된 다른 업체들도 사정이 비슷했지만, 공장 자체를 아예 폐업한 건 현재로써는 대흥시 공장이 유일했다.
사장과 공장장이 오랜 지인이었다는데, 이번 사건으로 사장이 큰 배신감을 느끼고 사업을 계속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며 폐업을 강행했다는 얘기를 도훈도 들었다.
“듣자 하니, 봉사단체에서 그 공장을 매입하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한다던데요?”
“그런 얘기가 있긴 있죠.”
저질 도시락 납품에 협조한 회원 둘을 제명한 후, 봉사단체의 운영진과 회원 전원이 경찰 조사를 받고 관련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운영진과 회원들은 결백을 입증받은 뒤에도 ‘도덕적 책임’이 없는 건 아니라며 시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한 뒤 도시락 배달 사업에 더욱 매진하고 있었다.
학교 급식실에서 조리한 음식을 일일이 포장해 배달하고 회수한 도시락 용기를 설거지하는 일이 다 그들 몫이었다.
“들어보니 회원들이 고생 많이 한다던데.”
“네. 전에는 배달하고 수거만 하면 됐는데, 지금은 100개에 가까운 도시락을 일일이 설거지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라도 해서 사업이 중단되지 않으니 다행이긴 한데요.”
“...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죠.”
일이 늘어나긴 했어도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큰 문제 없이 도시락 배달을 계속하는 상황.
하지만, 3월에 학교가 개학하게 되면 급식실을 더 이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즉, 근본적으로 안정적인 도시락 공급처를 확보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
“봉사단체 회장님과 운영진은 그런 취지에서 도시락 공장 매입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개인이 책임지는 게 아니고 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어서 투명하게 운영하도록 관리하자는 겁니다.”
“흠, 나쁜 생각은 아니네요. 공장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니까요. 문제는···.”
“... 네. 언제나 그렇듯 돈이 문제죠.”
폐업한 도시락 공장은 규모가 크지 않았다.
한 끼니에 맞춰 최대로 주문받을 수 있는 식사량이 250인분 정도.
하지만, 규모가 작은 공장이라고 해도 매입은 전혀 다른 문제.
- 제가 그 공장 사장을 만나 의향을 물었는데 팔 의사가 있긴 있답니다. 그런데 요구하는 액수가 7억 원입니다.
봉사단체 회장이 조심스럽게 그 얘기를 했을 때, 도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에 7억 원 전부를 지원해달라는 요구를 한 게 아니었지만, 공장 운영을 어떤 형태로 하든 시에서 공장 매입 대금의 상당액을 지원받아야 하는 건 다르지 않을 터.
“개학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시장님 고민 많으시겠습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하하.”
“잘 됐으면 좋겠네요.”
“노력해야죠.”
쓰게 웃으며 답한 도훈이 몸을 일으켰다.
보건소를 나와 시청으로 복귀하는 내내 도훈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고,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요즘 도시락 배달 사업 때문에 도훈이 골치 아파하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도훈의 상념을 깬 건 사람이 아닌 그의 업무용 전화기.
위이이잉!
액정을 확인한 도훈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웬일이십니까, 김도연 기자님?”
- 웬일은요? 업무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김도훈 시장님?
“업무와 관련한 거면 비서실을 통하셔야죠?”
- ... 나한테까지 그렇게 꼬박꼬박 절차를 거치라고 말하고 싶어? 동생이면 한 가지 정도는 봐줘도 되는 거 아니야?
대번에 도연이 쌍심지를 켰고, 도훈이 피식 웃었다.
“용건을 들어보고 그래도 될 일이면 그러자.”
- 휴우, 오빠가 시장이면 뭐해? 남보다 못한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용건이 뭐야?”
- 도시락 공장 적발된 거 요즘 상황이 어떤가 취재하려고.
“... 취재는 기자가 직접 와서 현장을 돌면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
- 맞는 말인데, 그럴 상황인지 아닌지를 보려는 거야. 기사가 되겠다 싶으면 가려고.
“... 잔머리는.”
도훈이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현재 상황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을 했다.
공장은 폐업했고, 도시락 배달 사업을 계속해야 하는 시와 봉사단체는 새로운 업체를 선정하지 못해 난감한 상황이라는 얘기였다.
- 그냥 대전의 다른 도시락 공장에서 납품받으면 안 되는 거야?
“단가를 높게 불러서 우리 쪽 예산이랑 안 맞는 것도 있고, 외지라 관리가 어려운 것도 있고···. 가급적이면 시 내부에서 해결했으면 싶은데···. 휴우, 요즘 그것 때문에 머리 아프다.”
통화하는 사이, 승합차가 시청 주차장에 도착했다.
“상황 이해 다 됐지? 나 전화 끊어야 돼.”
- 한 가지만 더. 시에서 예산 투입하기 어려운 거야?
“당연하지. 계획에 없던 돈을, 1, 2천도 아니고 몇억을 어떻게 써? 그리고 그 돈을 들여 매입한다고 쳐도 시에서 그 돈을 회수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운영이 제대로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 흐음, 일단 알았어.
“끊자, 수고해라.”
- 응. 오빠도.
통화를 마친 도훈이 차에서 내려 시청 청사로 걷다가 뒤늦게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 사건 후일담이라지만 이런 것도 뉴스거리가 되나? 얘가 지금 기자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훈이 이내 푹 한숨을 내쉬고 다시 혼잣말했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지.”
도훈과 일행의 모습이 청사 안으로 사라졌다.
편치 않은 도훈의 마음처럼 하늘이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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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나흘밖에 남지 않은 마지막 주 목요일.
시청에 출근한 도훈은 뜻밖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 정말입니까?”
“네. 어제 계약이 됐다는데요.”
“계속 도시랑 공장을 운영한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공장 설비까지 모두 매입했다는 걸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을까요?”
폐업한 도시락 공장이 누군가에게 팔렸단다.
시청은 일절 나서지 않았지만, 몸이 단 봉사단체 사람들이 대전이나 인근의 도시락 업체들과 협의를 하면서도 공장 사장과 접촉을 간간이 해왔는데, 어제 연락했다가 팔렸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이전 업체가 저지른 그 어떤 일에 대한 책임도 떠넘기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는 조건으로 매매 가격도 7억에서 크게 할인하지 않았다나?
“... 혹시 그런 얘기···.”
“저는 물론이고 김 회장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흐음.”
“김 회장도 무척 얼떨떨해하는 것 같았으니까요. 다만···.”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할 기회를 날린 건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능력이 안 되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 네.”
협동조합을 만들어 공장을 인수해 운영하자는 주장에는 조리시설이 부실한 학교의 급식을 그곳에서 책임지게 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일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도시락 공장의 규모가 작아 책임질 수 있는 식사량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매일 학생들의 식사를 나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터.
더군다나 학생 급식을 맡기는 것은 ‘자활’과는 거리가 먼 전적으로 공적인 목적에 공장이 이용되는 것을 뜻했다.
‘그럴 거면 굳이 협동조합을 만들 필요가 없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한 도훈이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좋은 마음을 가진 분이 좋은 의도로 공장을 다시 운영하길 바랄 수밖에요.”
“그게 제일 좋은 그림이긴 하죠. 누가 공장을 인수했는지 확인해 볼까요?”
“좀 기다리죠. 정말 운영할 마음을 먹었다면, 기존 거래처에 그쪽에서 먼저 연락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하루만 기다려보고 연락이 없으면 그때 접촉을 시도하죠. 어차피 새 공장주와는 거래 관계 이상이 될 수가 없잖습니까.”
“알겠습니다. 김 회장에게도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속에 하루가 금세 지나갔지만, 공장을 인수한 사람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도훈은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봉사단체 회장에게 공장 인수자에게 연락을 넣게 했다.
만약 공장을 다시 운영할 거라면 저소득층 주민복지 사업의 하나로 배달하는 도시락을 그쪽으로부터 납품받고 싶다고.
그리고 의외의 답이 들려왔다.
“절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고요?”
- 네. 공장을 운영할 것인지 아닌지도 밝히지 않고, 제가 아니라 시장님과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고 고집하더라고요.
“... 흐음. 혹시 회장님께서는 새 공장 주인을 직접 만나셨습니까?”
- 아뇨. 저도 만나지 못하고 전화로만 얘기했습니다. 혹시 계약 때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글쎄요.”
도시락 공장 새 주인이 도시락 납품 계약을 좀 더 유리한 조건으로 하길 원하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시청이 계약 상대가 아닌데 시장을 직접 만나자고 하는 건 좀 지나치거나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만나자는 시간과 장소도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뭐가 말씀입니까?”
- 내일 새벽 6시까지 대전으로 오라더군요.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주면서, 내일 출발 전에 연락하면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하더라고요.
“... 새벽 6시까지요?”
- 네.
다짜고짜 새벽에 대전까지 오라는 건 더 이상했다.
이쪽이 며칠 안에 안정적인 도시락 공급처를 확보해야 한다는 건 맞다.
하지만, 어찌 됐든 상대는 상품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고 이쪽은 사겠다는 사람이 아닌가.
이런 요구는 비상식적이라고 할 수밖에.
아니, 비상식을 넘어 무례하다고 해도 크게 들린 말이 아닐 터였다.
- 어쩌시겠습니까, 시장님?
“......”
조심스럽게 묻는 봉사단체 회장에게 도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