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반도의 흔한 어느… - 2.
도훈이 직원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고 며칠이 지난 수요일.
구내식당에서 영배, 영진과 점심을 먹고 돌아와 비서실 문을 여니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 ... 허~ 락~ 하~ 소~. 서~!
도훈의 미간이 자기도 모르게 찌푸려졌고, 뒤따라 들어온 영배와 영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아, 시장님.”
“... 지연 씨. 그거 계속 들어야 합니까?”
“좋아서 듣는 건데도 안 돼요?”
“... 점심시간에 잠깐 음악 듣는 거야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만, 왜 하필 그 영상을 틀어놓고 있냐는 거죠.”
“... 정말 좋아서 듣는 건데···.”
“... 휴우. 들으세요. 이젠 뭐라고 안 하겠습니다.”
지연의 시무룩한 말에 도훈은 한숨을 내쉬고 답하고는 한쪽에 있는 커피메이커로 가 커피를 잔에 따랐다.
도훈이 소파에 앉자 뒤이어 차를 타 온 영배가 웃으며 말했다.
“포기하세요, 시장님. 어제로 저 영상 본 사람 숫자가 30만이 넘었습니다.”
“... 자꾸 약···.”
“아, 조회수 아까 40만 넘었어요.”
“......”
“풉!”
‘약 올리지 말라.’고 하려던 도훈이 입을 닫았고, 영배가 웃음이 터져 나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두진과 영진도 빙긋이 웃고 있었고, 유일하게 도훈만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도훈이 지난 토요일 결혼식 때 축가를 부르는 것을 하객으로 참가했던 시민 하나가 촬영했다.
촬영만으로 그쳤다면 좋았을 텐데, 그 시민은 ‘반도의 흔한 어느 시장의 축가 실력’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인터넷에 올렸다.
신랑 신부가 모두 시청 직원이라서 시장이 축가를 불렀다던가, 평소에 시청 직원들은 도훈을 음치로 알고 있었다던가 하는 친절한 자막까지 곁들여서.
여하튼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희미한 실루엣과 도훈의 뒷모습만 보이는 그 영상은 지금 매우 빠르게 조회수가 올라가는 중이었다.
물론, 지금도 많이 달린 댓글도 빠르게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 와! 이 사람, 뭐냐? 아마추어 성악가임?
- 장님이냐? 자막에 대흥시 시장이라고 적혀 있잖아?
- 축가 치곤 고퀼 인정.
- 가수 스타일이 아니라 성악가처럼 불러서 더 있어 보인다.
- 이 시장, 소나 나르고 있었다던 그 시장 아닌감?
- 직원들은 음치라고 알고 있었다고? 축가 알바만 뛰어도 시장 월급보다 더 받겠는데?
- 이벤트 업체 직원입니다. 축가는 대개 지인들이 하고 업체에서 알바생 쓰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업체와 계약된 뮤지컬 배우들이 연기하듯 축가 하는 경우가 있긴 하죠. 그런데, 저 시장은 당장 계약해도 무리가 없겠네요.
- 노래 실력으로 시장 뽑는다면 재선은 확실하겠네.
- 노래로 뽑으면 시장에 머무를 그릇이 아닌 듯.
일부 비아냥거리거나 비난하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댓글 대부분은 놀랍다거나 실력이 훌륭하다는 등 호의적인 내용이었다.
“... 방금 댓글에 시장님 대학 동기라는 분 글 올라왔는데요?”
“대학 동기요?”
“네. 그다지 친한 건 아니었지만, 같이 학교 다닌 게 몇 년이고 어울려서 술 마신 적도 여러 번인데 노래 실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네요.”
“... 이름이 뭔가요?”
“이름은 안 나오죠. 아이디라면 몰라도.”
“... 아, 그렇죠.”
“아이디라도 알려드려요?”
“... 아뇨. 알아서 뭐하겠습니까.”
심드렁하게 답하는 도훈을 보고 지연이 웃었다.
영상이 올라가고 조회수가 쭉쭉 늘어가는 요 며칠 새, ‘영상’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도훈은 내내 저런 식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대학 때도 노래를 잘 안 부르셨어요?”
“그랬죠.”
“대학 때 술 마시면 대개 노래방도 가고 그러지 않나요?”
“... 노래방엔 가본 적이 거의 없어요. 졸업할 때까지 서너 번이나 갔을까 싶습니다.”
“... 시장님 설마 ‘아싸’ 셨어요?”
“......”
조심스러운 지연의 물음에 도훈이 말문을 잃었고, 영배가 킥킥거리며 답했다.
“큭큭! ‘아싸’까지는 아니고 비슷하긴 했습니다.”
“어머, 그랬어요? 의외네요. 시장님, 인기 많으셨을 것 같은데···.”
“음, 은근히 여학생들에게 인기는 좀 있었죠. 다만, 그때는 곁을 잘 안 내주는 사람이었거든요.”
“곁을 잘 안 내주셨다고요? 지금은 전혀 안 그러신데요?”
“시장 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흥시에 시장님과 친분 있는 사람 많지 않았습니다.”
“하긴, 선거 나오셨을 때 시장님 알아본 사람 많지 않았죠.”
영배와 지연의 대화에 듣고 있던 도훈이 끼어들었다.
“저 다 듣고 있거든요? 제 뒷말하려거든, 어디 안 들리는 곳에 가셔서 하세요.”
도훈의 심드렁한 말에 영배와 지연은 입을 다물었고, 이번에는 두진이 물었다.
“그 노래, 최근에 부르기 시작하신 건 아니죠?”
“네. 오래됐습니다.”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었습니까?”
“음, 특별한 계기는 아니고요. 저랑 제 친구 진주랑 그리고 제 대학 때 여자친구랑 셋이서 뮤지컬 보러 갔다가 노래에 꽂혔었죠.”
“아, 그랬군요.”
“그 뒤에 여러 사람이 그 노래 부르는 것을 찾아보고 따라 하고 하다 보니 제법 부르게 된 것 같습니다.”
“하하, 네.”
두진이 웃는데, 영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장님이 저 노래를 저렇게 잘하시는 줄은 진주 말고는 아무도 몰랐어요. 저도 진주 결혼식 때 시장님이 축가 부르실 때 처음 들었거든요.”
원래의 도훈이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여럿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참가해도 노래로 분위기를 띄우거나 하는 일은 잘 하지 않았기에 의도치 않게 그렇게 됐다.
“그럼 그 친구분은 어떻게 알고 축가를 부탁하신 건가요?”
지연이 묻자 도훈이 푹 한숨을 쉬며 답했다.
“... 휴우, 술이 원수죠.”
군 시절, 휴가를 나와 여럿이 어울려 술 마시다가 마지막까지 남은 진주와 그녀의 자췻집 앞 공원에서 ‘막잔’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도훈은 술김에 늦은 밤 공원에서 노래를 불렀다.
진주는 그때 알게 된 도훈의 노래 실력을 잊지 않고 있다가 자기 결혼식 때 써먹었던 것.
진주 남편이 군인인 터라 결혼식장도 새카만 남자들이 잔뜩 있었는데, 다행히 도훈의 축가는 분위기를 한결 풀어지게 하는 데 제법 도움이 됐었다.
물론, 그때에도 진주를 제외한 대학 친구들에게 ‘왜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냐’고 타박을 듣기도 했었다.
“시장님, 이 곡 말고 좋아하는 다른 노래 또 있으시죠?”
“... 왜요?”
“그, 그냥 묻는 건데요?”
“... 지금 지연 씨 눈빛만 보면 절대 그냥 묻는 게 아닌데요?”
“... 호호.”
도훈이 정색하고 답하자 지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지난 토요일 이후 도훈은 ‘노래’라는 단어만 들어도 저렇게 정색을 하고 있었으니까.
주말에 ‘또 노래 들려달라’는 세경에게 도훈이 제법 시달렸다는 걸 지연이 도대체 어떻게 알겠는가.
띠리리리.
“시장 비서실입니다.”
때마침 걸려온 일반전화를 받은 지연.
“... 어디라고요? 아, 네. 무슨 일로···? 네?”
통화하던 지연이 좀 황당한 표정을 하고는 도훈에게 말을 걸었다.
“저, 시장님.”
“... 네.”
“방송국 작가라는 분한테서 전화가 왔는데요.”
“... 네.”
“시장님을 꼭 출연시키고 싶다는데···.”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가면 가수왕’이라는데요?”
“......”
‘가면 가수왕’은 출연자가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노래대결을 하는 모 공중파 방송국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수년 동안 방송이 이어지고 있을 만큼 탄탄한 인기를 가진 프로그램인 건 사실이었다.
“... 일없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도훈이 정색하고 말하고는 시장실로 들어갔다.
지연이 전화로 거절의 말을 하는 가운데, 영배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드디어 방송국 사람들도 영상을 본 모양이네요.”
“그렇겠지.”
“하하, 이거 ‘가면 가수왕’ 말고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섭외 전화 오는 거 아닙니까?”
“... 흠, 설마 그렇게 까···.”
띠리리리리!
지연이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다시 울리는 일반전화기.
“시장 비서실입니다.”
“... 설마?”
“... 혹시?”
“... 진짜?”
전화를 받는 지연을 보며 두진, 영배, 영진 세 사람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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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우.”
“호호, 한숨 그만 쉬어요. 땅 꺼지겠어요.”
“... 쩝.”
금요일 저녁, 도훈의 집.
- 노래 실력이 빼어나기도 하지만, 하객들이 더 놀란 것은 축가를 부르는 사람의 정체 때문이었는데요.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이 결혼식이 열리는 도시의 현직 시장입니다. 화제의 영상 속 주인공은 충청남도 대흥시의 김도훈 시장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도훈의 등에 초점이 맞춰진 영상과 앵커의 멘트.
- 저희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무척 의외였던 것은 시청 직원은 물론, 영상 속 김도훈 시장과 가까운 사람 중에서도 그에게 이런 빼어난 노래 실력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겁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시장의 노래 실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자랑한 적이 없다는 얘기가 되죠.
“... 이제는 전 국민이 다 알게 됐네.”
“에이, 전 국민은 오버고요.”
“... 네.”
영상이 이어지고 도훈의 축가가 끝났다.
- 와아아아아!
- 짝짝짝짝짝!
박수, 함성과 여기저기서 도훈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도훈이 손을 흔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키고 말했다.
- 오늘같이 좋은 날, 분위기를 망치지 않은 것 같아서 천만다행입니다. 두 분 다시 한 번 결혼 축하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도훈이 황급히 뒤돌아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장면에서 영상이 멈췄다.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훈의 얼굴이 영상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붉게 상기되고 머쓱해 죽겠다는 듯한 도훈의 표정이 점점 확대되더니 화면을 가득 채웠다.
“... 돌겠네.”
“호호호!”
- ... 수준급인 노래 실력도 노래 실력이었지만, 저희 제작진이 이 영상을 보고 눈길이 간 건 바로 이 정말로 겸연쩍어하고 부끄러워하는 듯한 시장의 얼굴이었습니다.
“... 쥐구멍을 찾고 싶었지.”
“호호호호!”
- 시장, 군수, 도지사,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도 방향이나 종류는 다르지만, 연예인처럼 대중의 관심을 갈구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환호하는 지지자들에 둘러싸인 정치인들이 어딘가 뿌듯한 듯한 표정으로 능숙하게 행동하는 모습,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상이나 표정에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죠. 익숙하기는커녕 서투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십니까? 자신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얼굴을 한 정치인을 여러분은 얼마나 보셨습니까? 대중의 관심과 박수에 익숙한 셀럽이나 유명 정치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서투른 인간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 그런가?”
“흠,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진짜요?”
“네.”
- 박수받기 충분한 노래 실력을 숨기고 있다가 직원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받은 박수와 환호에 머쓱해 하는 이 표정.
“......”
“흐음.”
- 이 영상을 본 70만에 가까운 사람 중 일부는 저희 제작진처럼 이 평범하고도 서투른 인간미가 느껴지는 이 표정에 주목했고,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 표정을 김도훈 시장의 얼굴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마음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이상, 오늘의 화제의 영상이었습니다.
도훈이 TV를 끄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어휴, 정말 땅 꺼지겠어요.”
“... 네. 이제 그만할게요.”
“호호. 시사 프로그램인 건 맞지만, 뉴스는 아니었잖아요. 예능도 아니고요.”
“예능 얘기는 하지도 말아요.”
‘가면 가수왕’부터 시작해 공중파와 케이블, 종편의 비슷한 컨셉의 프로그램 관계자들이 시장 비서실로 연락을 해왔다.
물론 출연 제안이었고 전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렇게, 방송을 탈 일은 없겠거니 했는데 갑자기 시사 프로그램의 ‘화제의 영상’ 코너에 등장하게 된 도훈이었다.
“영배 씨는 입이 찢어졌겠네요?”
“... 말해 뭐하겠습니까? 저 프로 PD가 연락했을 때, 저는 무조건 안 된다고 하려고 했는데 영배 형이 그런 답을 하려거든 자기를 자른 다음에 하라고 하더라고요.”
“호호호!”
“그 인간,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얼마나 얄밉게 굴던지···.”
도훈이 투덜거렸고 세경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렇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걸요?”
“그랬어요?”
“네. 영상이 올라가기만 한다면 사람들이 많이 볼 거로 생각했어요.”
“... 하하. 어쨌든, 이게 끝이면 좋겠습니다.”
“흐음, 글쎄요?”
세경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도훈이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 안 그럴 것 같아요?”
“네.”
“... 얼마나 안 그럴 것 같은데요?”
“... 상당히?”
“......”
“호호호!”
도훈이 울상이 되자 세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경의 예측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