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한 번 해보자는 소리 - 3.
차혜진 의원의 사무실에 시장실에서 보낸 한 뭉텅이의 답변서가 도착한 것은 의회에 예산안 제출예정일인 수요일보다 빠른 월요일 늦은 오후.
“... 이게 뭔가요?”
“저희 답변서입니다. 보내신 요청안 마지막에 입장을 기술해 붙여놨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문서를 들고 온 영배의 말에 차혜진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고, 곁에 있던 보좌관이 그런 차혜진의 눈치를 보다 서류 뭉치 보따리를 끌어당겼다.
“면담 대신, 답변서로 대체하시겠다는 게 시장님 판단입니다.”
“... 누구 마음대로요?”
“시장님이 결정하신 겁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도 따로 적어 보내신 것으로 압니다. 아마 맨 윗부분에···.”
“... 이거 말하는 겁니까?”
보좌관이 서류 뭉텅이 맨 위에서 세 장짜리 문서를 들어 보이며 물었고, 영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시장님이 직접 작성하신 겁니다.”
보좌관이 서류를 내밀었지만, 차혜진은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의원이 조정 요청을 했으면 성의있게 논의해야지,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에요!”
‘성의’라는 말에 기가 막힌 영배였지만, 그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 제가 결정한 게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서류를 전달하러 왔을 분입니다.”
“아니,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다른 의원들하곤 전부 최종 개별 면담을 했다면서요!”
“......”
“이거 지금 나 무시하는 거 맞죠? 시의원을 도대체 뭐로 보고···!”
얼굴이 벌겋게 변해서 연신 소리를 지르는 차혜진을 아무 대꾸도 없이 공손하게 서서 딱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영배.
‘... 성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게 지금 당신이 할 말이라고 생각해?’
매번 면담에 항상 배석하지는 않았지만, 영배는 도훈과 예산팀장, 두진이 따로 혹은 함께 차혜진과 조정 요청 건으로 ‘협의’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차혜진이 작년에는 거듭 퇴짜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관철하겠다는 고집을 보이기라도 했지만, 올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잘 알았다.
조목조목 조곤조곤 ‘왜 안 되는가’를 설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는 게 마치 TV로 드라마라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달까?
‘도훈이 대신 내가 오길 잘했네.’
도훈은 자기가 이 답변서를 전해주고 오겠다고 했지만, 비서실 직원들이 다 말렸다.
시장이 할 일이 아닌 데다가 차 의원과 직접 대면한다면 자칫 그녀를 더 자극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도훈 대신 자기가 가야 격이 그나마 맞겠다고 두진이 나섰지만, 영배와 지연, 영진이 만류했다.
어차피 좋은 소리 못 들을 게 뻔한데 굳이 상대 눈치 볼 필요 없지 않냐고.
그렇게 도훈과 두진을 만류하고 영배가 총대를 멨다.
설마 때리지는 않을 테고, 잠깐 히스테리 부리는 걸 감당하면 되지 않겠냐고.
그 예상은 그대로 적중해 지금 영배의 앞에서 차혜진이 버럭버럭 고함을 치는 중이었다.
“아니,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나 시의원이에요. 현직 대흥시 시의원이라고요! 시장이라고 시의원 무시해도 되는 줄 알아요!”
“......”
“... 도대체 이따위로 일을 처리하면 어떻게···.”
“......”
폭풍같이 말을 쏟아내던 차혜진이 말을 끊고 이를 악물었다.
영배가 공손한 표정으로 듣고 있긴 했지만, 그는 시장이 아닌 시장 비서관에 불과하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으니까.
결정을 시장이 했다는데, 비서관에게 화를 내봤자 자신만 헛되게 힘을 쓴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빠드득.
극도로 분노한 차혜진이 이를 갈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런 그녀를 보좌관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차혜진이 꼭 예산에 반영시키겠다는 의지도 없으면서 퇴짜맞은 요청안의 내용을 살짝만 바꿔 다시 뭉텅이로 계속 들이미는 걸 반대했었다.
괜히 감정만 나빠진다면서.
어차피 시장이 요청안 수용을 거부하면 요청안 반영이 불가능함은 물론, 다른 의원들의 협력이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
‘시장을 압박할 수단도, 동료 의원들의 협력을 끌어낼 힘도 없는 상태인데···.’
요청안을 직접 작성한 보좌관이 보기에도 그 사안들은 급하거나 절박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차혜진이 보좌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듭 요청안을 들이밀라 지시했기에 그냥 따랐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요청안을 들이밀 때마다 시장과 비서실장, 예산팀장이 직접 차혜진과 면담해 일일이 설명한 것만으로 그쪽은 ‘성의’를 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면담에 나서지 않고 그냥 ‘수용 못 한다. 이유는 저번에 다 설명했었다’고 대꾸해도 솔직히 이쪽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시장은 세 번이나 면담하며 차혜진의 ‘장난질’에 성실히 응했다.
비록 자기가 모시는 사람이지만, ‘성의’가 없다거나 ‘배려’를 하지 않는다고 따질 사람은 차혜진이 아님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 어쩐지 저번에 서류 건네줄 때 예산팀장 표정이 장난이 아니더라니···.’
그간 시의원 보좌관으로 시청 직원들을 자주 상대하며 예산팀장의 별명이 뭔지도 잘 아는 보좌관.
예산팀장이 별명답지 않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힐 때, 오늘 같은 상황을 예견하기도 했었다.
‘이게 다 자업자득이지. 내일이면 또 시청과 시의회에 이 일에 관한 소문이 쫙 돌겠군. 휴우.’
보좌관이 그렇게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씩씩거리며 영배를 노려보던 차혜진이 입을 열었다.
“가봐요. 그리고 내가 오늘의 수모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씩씩거리던 차혜진의 말에 영배가 얼른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돌아섰다.
쿵.
빠드득.
“나를 무시해? 감히?”
영배가 문을 닫고 나가자 다시 이를 가는 차혜진.
자기가 세 번 면담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시장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유리한 상황이어서가 아님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쿵.
촤르륵.
“어디 두고 보자고. 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절대로!”
높이 쌓인 서류를 밀어버린 차혜진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그게 무서웠으면, 아니 당신이 무서웠으면 시장이 이렇게 나왔을 리가 없잖아. 어휴! 이 사람, 처음에는 안 그러더니 왜 이렇게 아집만 커지는 거지?’
성질을 내는 차혜진의 뒤에서 보좌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이거 자칫하면 나한테까지 똥물 튀겠는데···. 다른 직장을 알아봐야 하나? 쩝.’
-----
도훈이 차혜진과 최종 면담을 안 하고 ‘서면 답변’으로 대신한 일은 곧바로 소문이 났다.
그 소문이 시청과 시의회에 도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기획감사실 예산팀 직원들이었다.
“시장님이 알아서 한다고 하실 때 감이 왔어요. 어휴, 속이 다 후련하네요, 저는.”
“뭐 겨우 그것 가지고 속이 후련해. 난 시장님이 그 서류 내던져버리고 차 의원한테 화라도 내주셨으면 했는데.”
“에이, 그건 아니죠. 아무리 우리 시장님이 좀 단호한 분이고 차 의원이 잘못했다지만, 시장이 시의원한테 그렇게까지 하기는 쉽지 않죠.”
“맞아요.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신 게 어디에요? 저는 차 의원이 그 답변서 받고 펄쩍펄쩍 뛰면서 화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우리가 무슨 자기 하인도 아니고, 건성으로 대충 서류 수정해서 다시 들이밀 때마다 일일이 다 설명하라고 하는 건 갑질이에요, 갑질.”
“그럼!”
“맞는 말이야.”
차혜진의 ‘만행’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예산팀 직원들인 터라 반응이 뜨거웠다.
그래서인지, 이 소문은 곧 시청과 시의회를 넘어 대흥시 공무원 사회 전체와 시민들에게까지 퍼졌다.
그냥 단순히 면담을 거절당했다는 게 아닌 시작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요청안을 냈다가 조곤조곤 수용할 수 없는 이유를 들었으며 거절당한 요청안을 살짝만 고쳐 다시 들이밀고 또 면담했던 과정 전체까지.
“시장이 화낼만하네.”
“그러게.”
“그게 뭔 짓이래? 안 그래도 예산안 논의라 다들 바쁘다는 것 같던데. 여러 사람 헛고생시키고 시간 낭비하게 했던 거잖아.”
“누가 아니래.”
여하튼, 이 소문이 돌면서 차혜진은 안 그래도 최근에 구겨질 대로 구겨진 체면을 다시 한 번 구겼다.
시 집행부에서 제출한 예산안을 표결하는 시의회 본회의 자리에 참석도 하질 못할 정도로.
“... 예산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심남진이 의사봉을 두들기자 뒤에서 지켜보던 영배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도훈과 비서실 직원들의 톡방에 글을 올렸다.
“점심을 위해 정회합니다. 오후 2시에 본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땅, 땅, 땅!
본회의가 정회되자 영배는 얼른 일어나 본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아이고, 드디어 끝났네.”
예산안 완성 전에 각 시의원과 충분히 협의한 때문인지 완성되어 제출된 예산안 검토와 통과에는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차혜진이 몇 번 ‘도발’을 감행했으나 도훈은 그때마다 담담히 논리적으로 대응했고, 다른 시의원들의 도움이나 지원을 얻지 못한 차혜진은 결국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이미 돌던 소문에 추가되며, 그녀에 대한 ‘악평’만 드높아졌을 뿐.
그녀가 사무실에서 도훈을 욕하며 ‘두고 보자’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최소한 시청에는 그걸 딱하게 여기는 사람도 그런 그녀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벌컥.
“예산 통과됐습니다!”
비서실로 들어서며 영배가 소리쳤지만, 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도훈을 비롯한 모두가 비서실 소파에 모여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웬 종이쪽지를 보고 있을 뿐.
“뭐 하십니까? 드디어 예산안 통과됐다니까요?”
“아, 그럴 거로 예상했잖아요. 그 고생을 했는데 당연히 통과돼야죠.”
“... 하하. 그런데 뭐 하십니까, 다들?”
시선을 준 지연은 물론, 다들 묘한 표정이어서 영배가 다가가며 물었다.
“응? 청첩장이네요.”
“네. 아까, 지역경제과 양민기 주무관이 왔다 갔거든요.”
“아, 양 주무관 드디어 날 잡았답니까?”
“그러니까 청첩장을 주고 갔겠죠.”
“하하, 좀 서두르지. 날 추워지는데.”
양민기라는 직원은 운계면 주민센터에 근무하는 직원과 전부터 사귀고 있었고, 조만간 결혼할 거라는 얘기가 있었다.
“청첩장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설마 신부가 다른 사람이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청첩장이 문제가 아니라 양 주무관이 부탁한 것 때문에 그래요.”
“엥? 부탁이라뇨?”
영배가 의아해했고, 두진이 답했다.
“양 주무관이 시장님께 주례를 서달라고 했거든.”
“주례요?”
“응.”
“... 하하.”
시장이 되고 이런저런 경조사에 참석해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도훈.
도훈은 웬만한 경조사에는 참석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다.
한 번 경조사를 챙기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때문.
다만, 시청 직원과 관련된 경우는 예외였는데 이번은 예비 신랑과 신부가 모두 시청 직원이니 챙기는 게 맞았다.
하지만, 주례라니···.
“당사자인 신랑, 신부는 물론이고 양가 부모님들도 좋다고 하셨다고 하더라고.”
“... 하하, 우리 시장님 아직 미혼인데···.”
“그러게 말일세. 하하.”
시장이 된 뒤, 이런저런 자리에서 발표나 연설을 숱하게 해온 도훈이지만 ‘주례’ 요청은 생전 처음이었다.
아직 40도 안 된 미혼 남자에게 주례를 요청하는 게 일반적인 일은 절대 아니니까.
“그냥 거절하시지 그랬어요?”
영배가 도훈에게 묻자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히 했죠. 그런데 양민기 주무관이 그러더라고요. 신부인 임 주무관이 절 주례로 섭외 못 하면 결혼 다시 생각해본다고 했다고요.”
“에이, 설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양 주무관이 그렇게 말하며 통사정을 하는데 단칼에 자를 수가 없었습니다.”
“... 하하.”
영배를 필두로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결혼식에 참석해서 축하해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아무래도 주례는 좀···.”
“... 그렇죠?”
“당사자가 원하는데 하시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것도 그러네요.”
도훈은 말이 없는데, 직원들이 어찌할까를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
“...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 뭐, 당사자들이 원하는 거니까···.”
“... 젊은 미혼 남자는 주례 서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직원들의 의견이 ‘하자’로 모여졌지만, 도훈은 인상을 쓰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제가 부담된다니까요.”
정말 싫다는 도훈의 반응에 모두가 말문을 잃은 순간, 영배가 갑자기 손바닥을 쳤다.
짝!
“그럼 그거 하면 되겠네!”
“... 그거라니?”
“너··· 아니, 시장님 잘하시는 거 있잖아요.”
씨익.
영배가 진득한 미소를 흘리는 순간.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도 안 되긴 뭐가 안 됩니까?”
“나 그것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에이, 그건 한 번 해본 적 있잖아요. 그때 엄청난 호평을 받았으면서?”
“아, 그것도 싫다고!”
“그럼 주례를 서시던지요?”
“아, 진짜!”
도훈과 영배가 옥신각신하는데 지연이 가만히 손을 들었다.
“왜요, 지연 씨?”
“... 그게 도대체 뭔데요?”
“......”
다들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답을 못하는 걸 바라보는 영배의 미소가 점점 더 진득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