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한 번 해보자는 소리 - 1.
시청과 시의회가 예산안 논의로 분주하고 시청 실무자들과 교육지원청의 교육장 이하 담당자들이 차분히 K 유치원 매입을 위해 노력하던 11월의 어느 날.
직원식당으로 먼저 점심을 먹으러 지연, 영진과 내려갔던 영배가 헐레벌떡 비서실로 돌아와 말을 꺼냈다.
“드디어 터졌단다!”
“터져? 뭐가 터져?”
“차혜은 원장.”
“... 설마···?”
“응, 또 쳐들어갔단다.”
“......”
차혜진 의원과 차혜은 원장의 1차전이 벌어진 지 2주가 좀 안 되는 시점.
동생이 언니의 사무실에 다시 쳐들어간 건 언니 쪽이 부정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도서관 설립’ 서명운동을 계속 진행한 탓이었다.
- 현재도 대형 사립유치원을 운영 중인 동생이 몸집을 불리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언니는 다들 공립유치원이 더 급하다고 하는 데도 ‘어린이 도서관’을 고집하며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자매가 ‘쌍’으로 시민들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행동만 한다.
- 백번 양보해 동생은 자영업자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시의원인 언니가 시민들 목소리를 저렇게까지 외면하는 건 큰 문제 아닌가?
- 여하튼, 의원인 언니나 원장이라는 동생이나 자기 생각만 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는가.
차혜진이 고집스럽게 서명운동을 강행하자, 자매 모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부정적인 여론에도 물러서지 않고, 심지어 K 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는 부모들이 찾아가 서명운동을 중단해달라는 요구를 했음에도 차혜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 차혜진에 대한 ‘오래간만에 시의원다운 일을 했다’던 그나마 호의적인 평가는 쏙 사라져버렸고 자매 모두가 ‘제 생각만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치솟았다.
졸지에 언니 덕분에 ‘이기적인 자매’로 묶여 욕을 먹게 된 차혜은 원장.
그나마 욕만 먹었다면 참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녀의 인내심을 다시 바닥나게 하는 일이 생겼다.
차혜은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들이 집단적으로 유치원 확장 시도에 항의하고 중단하지 않으면 유치원을 옮기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
“... 터질 게 터졌네.”
두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유치원 학부모들이 차혜은 원장에게 집단적으로 항의한 건 그제의 일.
그 정보를 듣고 ‘조만간 뭔가 사고가 터지겠다’는 예상을 가장 먼저 한 게 다름 아닌 두진이었다.
“이번엔 어느 정도래?”
“글쎄요. 조금 전에 순찰차‘들’이 출동했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 또? 가만, 순찰차‘들’이라고?”
“네. 이번엔 혼자 쳐들어간 게 아니라던데요?”
“혼자가 아니라고? 그럼 떼로 몰려갔단 말이야?”
“그랬답니다. 정확히 누구고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요.”
“... 하하.”
“쯧쯧.”
두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고 도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식당 앞에서 들은 얘기를 좀 더 떠들던 영배는 지연에게 ‘밥 안 먹을 거냐’고 독촉전화를 받은 뒤 식당으로 다시 내려갔고, 비서실에 도훈과 두진이 남겨졌다.
“어째 불안하더라니··· 기어코 사달이 나고 마는군.”
“저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차 의원이 자초한 겁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한 두진이 말을 이었다.
“차 의원이 보통 이상으로 똑똑한 것 같긴 한데, 정무적인 감각이 참···.”
“감각보다는 성격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볼 수도 있지. 남의 말을 잘 안 들으니까. 독불장군도 그런 독불장군이 없어. 다른 건 몰라도 시의원으로서는 좋은 태도가 아니지.”
큰 학원을 잘 운영하고 있고 당내 경쟁자를 제치고 후보가 되고 시의원에 당선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평소 대화를 해보면 차혜진이 평균 이상의 지적 능력을 보유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그녀는 그런 지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시의원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보수정당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이나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걸 논외로 한다면, 그녀에 관한 ‘낮은 평가’의 이유는 종종 저지르는 실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개 그 실수는 이번처럼 자기주장을 고집하다가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려나?”
“글쎄요. 지금도 시간이 제법 지난 것 아닙니까?”
“하긴, 임기의 반이 넘었지.”
의원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경험이 부족한 상황이라면 그나마 ‘뭘 잘 모르니까 그렇겠지’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만 2년 이상의 경험을 쌓은 상태.
처음엔 좀 버벅거리던 다른 초선 의원들도 이제는 의젓해졌고, 나름 관록이라는 게 붙었다.
아니, 관록이라는 게 붙기 전에도 시민의 비판이 있으면, 이를 듣고 고민하는 모습이라도 보였다.
어떤 경우에도 고집을 꺾지 않는 차혜진을 향한 시민의 눈초리가 싸늘할 수밖에 없질 않은가.
“게다가···.”
두진이 도훈을 바라보고 말을 하다 멈췄고, 도훈이 물었다.
“게다가 뭡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두진이 하려던 말은 ‘게다가 도훈처럼 성과를 내고 호평을 받는 젊은 초선 시장과 비교가 될 테니’였다.
당사자를 앞에 놓고 말하기가 좀 쑥스러워 중간에 멈춘 것.
아무리 도훈이 목표를 직시한 채 딴 데 정신이 팔리지 않는 스타일이라지만, 칭찬도 적당히 해야지 과할 필요는 없으니까.
‘재선에 도전할 시장에게 비서실장이 할 말은 그런 게 아니니까. 뭐, 굳이 내가 충고할 필요조차 없기도 하지만···.’
두진이 속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하는데, 식사를 마친 직원들이 돌아왔다.
“식사하러 가시죠, 실장님. 참, 지연 씨 오늘 메뉴는 뭡니까?”
“콩나물 해장국이요. 맛있던데요.”
“오! 반갑네요.”
천진난만하게 웃는 도훈의 모습에 두진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평소에는 아주 냉정하고 흔들림이 거의 없는 시장이지만, 어떨 때는 아이처럼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도훈.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은퇴 후 무료한 생활에서 탈출해 현직의 짜릿함을 다시 즐기고 있는 두진.
“실장님, 차혜진 의원 사무실에 마침 예산안 논의하느라고 여러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 사람들 봉변을 당했다는데요. 들어보니까···.”
영배가 식당에서 들은 얘기를 빠르게 전했고 두진이 경청했다.
‘... 저 친구와 일한다는 게 천만다행이지.’
차혜진은 물론, 오랜 공직생활 동안 경험한 숱한 시장, 군수, 국회의원, 시의원들의 얼굴을 되새기며 두진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
- 시장님, 조정 요청이 또 들어왔습니다.
“... 휴우, 이번엔 어떤 겁니까?”
- 금선면 조향리 안골 마을 진입로 정비 건입니다.
“... 진입로 정비요?”
- 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불편하다고 그걸 정비해달라는 내용입니다.
“... 머릿속에 그림이 잘 안 그려집니다. 혹시 관련 자료가 있나요?”
- 네.
“제게 메일로 보내주세요.”
- 알겠습니다.
퇴근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지만, 시청 각 부서에서 심심치 않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 전화의 대부분이 의원들이 새롭게 들이민 예산안 반영 요구안과 관련한 것들이었다.
완성된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하기로 한 게 닷새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미 시의원 전원은 물론 각 의원과도 수차례에 걸쳐 논의한 뒤인데도 시의원들은 무척 끈질겼다.
“이번엔 누구랍니까?”
“... 그걸 안 물어봤네요. 뭐, 금선면이면 어차피 의장님 아니면 장민호 의원일 테죠.”
영배의 질문에 도훈이 푸념하듯 답했고 두진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오늘이 마감일이라 그럴 겁니다.”
“... 그렇겠죠. 그래도 이건 좀 심하네요. 작년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도훈은 시의회와 협의해 올해부터 예산에 관한 시의원들의 요구나 제안에 시한을 두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까지 시달릴 것을 걱정해서였다.
시한이 마감되기 전에 열흘 정도 시간을 줬으니 마감에 시달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예산안 통과될 때까지 야근에 주말 출근은 각오하고 있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올시다 싶어서 말이죠.”
“괜히 예산안이 아니니까요.”
“휴우.”
조정 요구가 시작되며 ‘반영 요청’을 뭉텅이로 하지 않은 의원은 없었다.
심지어 작년까지 한 건 혹은 서너 건의 반영 요청을 했던 안준식마저 다른 의원들보다 숫자는 훨씬 적어도 제법 큰 금액이 들어가는 요청안을 냈다.
자기 선거구에 국한된 것이긴 해도 타당성이나 긴급성을 인정할 수 있는 것들이라 그걸 조정하느라 정말 골치 아팠을 정도.
어쨌든, 그렇게 뭉텅이로 제출된 요청 중 사업 타당성이 낮고 긴급하지도 않은 것들은 대부분 예산팀이나 도훈을 통해 걸러졌다.
지금은, 그때 걸러진 것들을 살짝 이름만 바꾸거나 다른 논리를 적용해 다시 들이미는 중이랄까?
시한이 마감된 후 요청안을 들이밀면 도훈이 훨씬 강경한 태도를 보일 것을 뻔히 아는 시의원들이니 꼼수를 쓴다고 할 수밖에.
“오늘 저녁은 뭐로 할까요?”
지연이 화제 전환을 겸해 묻자 영배가 답했다.
“저도 갑자기 속에 열불이 나는데 냉면이나 먹을까요?”
“오늘 날씨, 엄청 추운데요?”
“날씨로는 속이 안 다스려질 것 같아서요.”
“... 호호. 조 비서관님, 이해는 가는데 진정하세요. 벌써 세 번째로 겪는 일이잖아요.”
“그렇죠. 그래도 적응이 안 됩니다.”
“호호.”
“그리고 이번 예산을 끝내도 내년에 또 비슷한 일을 겪을 거라는 사실이 암울하기까지 하네요.”
영배의 투덜거림에 모두가 쓰게 웃던 그 순간.
띠리리리.
“시장 비서실입니다. 아, 네. 잠시만요.”
지연이 도훈을 향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시장님. 예산팀장님이신데요.”
“... 또요?”
“네. 근데 이번엔 목소리가 좀 화가 나신 것 같은데요.”
“... 에휴.”
기획감사실 예산팀 팀장의 별명은 ‘부처님’.
그의 성이 안 씨라 ‘안 부처’, 혹은 ‘안 부처님’이라고 불렸다.
예산과 관련된 일로 시의원은 물론 온갖 사람을 상대하면서, 이 사람 앞에서도 웃고 저 사람 앞에서도 웃으며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거지 같지도 않은 황당한 요구’를 하는 이에게조차 담담히 응해야 하는 환경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다.
특히, 이런 예산 시즌에 그의 별명은 더 빛을 발했는데 아예 접대성 미소를 얼굴에 달고 살기 때문이었다.
그런 예산팀장의 목소리에서 노기가 묻어날 정도라면?
‘... 도대체 어떤 수준이길래···.’
속으로 투덜거린 도훈이 전화를 받았다.
“시장입니다, 팀장님.”
- 또 연락 드려서 죄송합니다, 시장님.
“아니에요. 팀장님 때문이 아니잖습니까.”
- 그래도요.
예산팀장의 딱딱한 목소리를 통해 그가 정말 화났다는 걸 도훈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번엔 뭡니까?”
- ...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 많아요?”
- 아주 많습니다.
빠직.
도훈의 이마에 일순 핏줄이 솟아났다.
마감시한이 다 되어서 ‘아주 많은’ 반영 요구를 한다는 게 어떤 뻔뻔한 작자인지 절로 화가 났으니까.
“... 후우, 누굽니까?”
- 차혜진 의원입니다.
“... 후우.”
도훈이 심호흡하며 화를 삭였다.
서명운동 때문에 비난을 받고 동생과 감정적, 물리적 싸움을 하면서도, 차혜진은 가장 많은 반영 요청안을 제출했고 가장 높은 비율로 ‘거절’을 당했었다.
심지어, 제일 먼저 요청안을 냈었기 때문에 거절도 ‘재’요청과 ‘재’거절도 빨랐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재재’요청과 ‘재재’거절도 있었다.
‘고장 난 레코드판을 또 마주해야 돼?’
잔뜩 인상을 쓴 도훈이 속으로 불평하는데, 예산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 제가 보기에는 처음 리스트를 그대로 다 가져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 그리고 또 뭡니까?”
- 어린이 도서관 건립 제안서는 좀 달라졌는데요.
“... 그런데요?”
- 금액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늘어요?”
- 네.
“......”
도훈이 말문을 잃었다.
어린이 도서관 건립을 주장하느라 홍역을 앓고 있음에도 그걸 금액까지 올려 다시 들이밀다니.
“... 얼만데 그러십니까?”
- 20억입니다.
“... 얼마요?”
- 20억, 첫 요청 때의 10배입니다.
“......”
첫 반영 요청 때 차혜진이 요구한 예산은 2억.
그 10배를 제시했다는 예산팀장의 말에 도훈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