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아전인수 - 1.
11월이 되며 아침, 저녁 날씨가 급격히 쌀쌀해졌다.
- 날이 갑자기 추워졌어요. 감기 안 들게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출근하기 직전, 순심이를 데리고 집을 나서려던 도훈은 세경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빙긋.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도훈은 세경에게 ‘세경 씨도요.’ 라고 답문을 보내고 집을 나섰다.
“날이 춥긴 춥다, 그렇지 순심아?”
도훈이 말을 걸었지만, 순심이는 대꾸도 없이 도훈의 SUV 뒷좌석 문 앞에 가 앉아 꼬리를 쳤다.
“오냐. 얼른 가자.”
순심이를 태우고 차를 출발시킨 도훈은 그리 멀지 않은 영배의 집 앞에 차를 세웠고 기다리고 있던 영배가 얼른 조수석에 올랐다.
“어우, 춥다.”
“외투를 입지 그랬어?”
“낮에는 괜찮잖아. 잠깐 견디면 되니까 그냥 나왔지.”
도훈이 대꾸 없이 차를 운전해 두진의 집을 향했고, 곧 영배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날짜는 나왔냐?”
“... 날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직이야? 야, 결혼 준비의 본격적인 시작은 상견례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상견례를 해야 양가 어르신들 얘기도 듣고, 이런저런···.”
“아, 우리가 언제 당장 결혼한다고 했어?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추진한다고 했지?”
“너나 세경 씨가 결혼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 없다며? 그리고 추진한다는 게 결혼한다는 거 아니야? 그게 그거잖아.”
“어떻게 그게 그거야? 엄연히 다른 말인데.”
“하아···.”
도훈의 담담한 답에 영배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했다.
10월 마지막 일요일, ‘결혼’을 주제로 벌인 도훈과 세경의 토론 결과는 도훈도 세경도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서로를 결혼 상대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대로’라는 연애 기조를 좀 바꿔서 결혼에 대해 논의하고 추진해 보자는 것이었다.
“아이고, 보는 내가 답답해 속 터지겠다. 데드라인까지 정해 놓고는···.”
“그게 형이 듣기에나 데드라인이지 나랑 세경 씨한테는 아니라니까? 우린 진척이 느리면 반년 혹은 1년 늦춰도 상관없다고 의견을 모았다고.”
‘천천히 흘러가는 대로’라는 이전 기조와는 다른 새 연애 기조의 핵심은 방금 영배가 ‘데드라인’이라고 언급한 것.
내년 가을까지 1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일을 추진하자는 게 도훈과 세경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다만, 도훈과 세경 모두 업무 때문에 환경이 유동적인 사람들이니 내년 가을이라는 시한 안에 꼭 ‘결혼식’까지 올리자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또 달라서, 도훈과 세경이 내년 가을에 결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좀 있었다.
대표적인 게 영배였고, 좀 더 심각한 경우는 도훈의 아버지를 들 수 있을 터.
- 내년 가을? 뭘 그리 멀찍하게 시간을 둬? 그냥 당장 내년 봄에 해치워! 인마!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 못 들었어? 내년 봄이다, 내년 봄!
아버지의 성화를 잠재우느라 도훈은 진땀을 흘려야 했고, 세경도 그건 좀 비슷해서 당장 도훈을 만나고 싶다는 어머니를 진정시켜야 했단다.
‘당장은 어렵고 가능한 최대한 빠르게’ 도훈이 세경의 어머니께 인사를 가기로 한 건, 11월이 본격적인 예산안 시즌이기 때문이었다.
“회의자료는 다 숙지했어?”
“끄응. 할 말 없으니까 말 돌리는 거 봐라.”
“할 말이 없어서 말 돌리는 게 아니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려는 거지. 내 결혼에 대해 형이랑 토론이라도 해야 돼?”
“내가 토론하자고 했냐? 빨리 진척시키라고 했지?”
“오늘만 예산안 관련 회의가 오전 오후에 하나씩이고 예산안 통과될 때까지 시청이 비상인데, 이 판국에 뭘 어쩌라고?”
“... 쩝.”
영배가 입맛을 다셨고, 도훈이 정색하고 말했다.
“형이 나 걱정해서 하는 말인 줄은 아는데, 과유불급이라는 말 알지?”
“알지.”
“형이 지금 딱 그 짝이야.”
“... 그, 그러냐?”
“그래. 며칠 전에 전 부시장님까지 꼬드겨서 사람 곤란하게 만들더니··· 자꾸 그렇게 나 자극하면 형수한테 형 비상금 만들고 있다고 확 불어···.”
“항! 복!”
영배가 손까지 들면서 항복했고, 때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도훈이 영배를 째려보고 말을 이었다.
“나한테는 결혼 서두르라고 난리 치는 사람이 형수한테 비상금 걸리는 건 그렇게 겁나냐?”
“... 네가 아직 결혼이란 걸 안 해봐서 그 다양한 매력을 몰라서 그런 소리 하는 거다.”
“형수도 그 생각에 동의한대? 한 번 물어봐 줘?”
“... 항, 복.”
다시, 영배가 항복을 선언했고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 도훈이 차를 몰았다.
영배가 비상금을 도훈에게 발각당한 건 석 달이 좀 안 됐다.
작년에 용돈 인상을 한 뒤 그 인상분을 고스란히 모아 몇십만 원 정도가 된 통장 내역을 핸드폰으로 확인하다 딱 걸렸던 것.
‘이 세상 모든 남편의 로망이 비상금’이네 어쩌네 하고 간청을 해서 그냥 넘겼고 지난달 동호회 돌아다니며 얄밉게 굴 때도 그 카드를 안 뽑아 들었는데 도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내가 아직도 그 날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알아?”
“......”
“충동질할 사람이 따로 있지. 하필이면 부시장님이냐?”
“... 하하, 미안하다고 했잖아.”
며칠 전, 도훈과 세경의 ‘토론’에 대해 전경완 부시장에게 고자질했던 영배.
천만다행으로 당시 전경완 부시장은 도훈이 차분히 설득하자 ‘토론 내용이 프라이버시’라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시장실을 나간 직후, 세경에게 연락해서 그녀를 통해 토론 내용과 결론을 알아냈다.
도훈과는 공적인 관계가 더 크지만, 세경과는 삼촌과 조카의 사이나 다름없으니까.
꼭 비밀로 하기로 했던 건 아니었으니, 도훈도 좀 뜸을 들이다 비서실 직원들에게 얘기를 해주긴 했다.
그 날 이후, 아침마다 도훈의 차에 타면서 영배는 ‘상견례 날짜 잡았냐?’고 묻는 게 버릇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추고 뒷좌석에 두진이 올라탔다.
“... 뭔 일 있나? 왜 이렇게 조용해, 요즘 자네답지 않게?”
뒷좌석에 앉아 순심이를 쓰다듬는 두진이 영배에게 물었지만, 영배는 딴청을 피웠다.
“잠이 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늦게까지 자료 읽느라고요.”
“그래?”
“네.”
두진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했지만, 도훈은 모른 척했다.
영배가 비상금을 모은다는 건 도훈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김 시장, 지금 분위기라면 이번에도 조정 요청이 제법 있을 것 같다고 의장이 그러더군.”
“네. 저도 들었습니다. 예산 얘기할 때마다 의원들이 좀 불만스러운 표정이더니···.”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하지.”
“뭐, 확정안 제출하기 전에 최대한 대화를 해봐야죠. 미리 조정하는 게 나중에 고치기보다 쉬우니까요.”
“그래야지. 그래서 말인데···.”
도훈과 두진이 의원들 분위기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영배는 끼어들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 네가 결혼이란 걸 해봐야 내 심정을 알지. 자식, 너도 얼마 안 남았다. 너라고 다를 줄 알지? 흥이다, 인마!’
도훈을 옆눈으로 흘끔거리며, 영배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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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시청 소회의실.
“송지은 의원이 꼭 반영해달라고 몇 번이고 전화했었습니다.”
“흠, 반영은 할 수 있는데 이 액수는 무리 아닙니까? 예산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액 반영하는 건 무립니다, 시장님. 그리고 상당 부분 겹치기도 합니다.”
“아, 그래요? 어디랑 겹친다는 말씀이시죠?”
“사회복지실 여성청소년 팀 예산을 보시면···.”
10시쯤 시작되어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회의는 전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예산과 관련한 회의다 보니,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반영 요구를 검토하면서 그와 관련된 각 부서의 입장도 들어야 했고 예산팀의 확인도 받는 과정이 몇 번이고 반복되고 있었다.
“시장님, 점심시간 다 되어가는데··· 어떻게 할까요?”
한 안건의 확인을 마치자 도훈 옆에 앉았던 두진이 속삭였고 도훈이 회의자료를 뒤적거렸다.
“... 이거 1/5 정도 남았는데, 아무래도 오래 걸리겠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점심 먹고 다시 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도시락 먹으면서 조바심낼 필요는 없겠죠.”
“그게 좋겠습니다.”
두진의 동의를 받은 도훈이 회의를 잠시 중단했다가 점심 후 재개할 뜻을 밝혔다.
“1시에 칼같이 시작해야 하니까 12시 55분까지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이따가 다시 수고하셔야 하겠습니다만.”
“하하, 네. 고생하셨습니다.”
“얼른 가서 식사하시고 잠깐이라도 쉬었다가 오세요.”
다른 간부들을 먼저 내보낸 도훈이 회의자료를 정리하는데 저만치 앉았던 전경완 부시장이 다가왔다.
“어째 작년보다 반영 요구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네. 실제로 더 많습니다. 아무래도 의원들이 제 스타일에 적응한 모양입니다.”
누군들 안 그러겠나만 도훈은 예산안이 완성되기 전에 미리 이러이러한 걸 반영해달라고 요구하는 걸 선호했다.
아무리 시 집행부에서 예산안을 마련해 의회에 제출하는 방식이라지만, 전에도 예산 수립 과정에 의원들과 논의를 거쳤다.
그런 건 전국 어느 자치단체든 마찬가지일 터.
그런데 버젓이 함께 논의해 완성된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한 뒤에 고치자고 하는 건 사전 협의를 뒤집는 것이나 마찬가지.
첫해, 조정요구안 폭탄을 던졌다가 도훈에게 된통 당했던 의원들은 예산안 확정 전에 미리 반영 요구를 열심히 하는 게 도훈과 대화하기 더 쉽다는 걸 작년에 깨달았다.
분명 그 때문인지 올해 의원들의 반영 요구안 리스트는 작년보다 훨씬 길었다.
“차혜진 의원이 오늘 아침에 저한테 전화했다는 거 아십니까?”
“부시장님께요?”
“네. 예산에 꼭 반영시켜야 하는 게 있는데 시장님이 자기만 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신다고, 저보고 꼭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 쌍심지라···. 하하, 그 반대인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딱 잘라서 거절은 못 하겠더군요. 말은 해보겠지만, 큰 기대는 마시라고 답했습니다. 하하.”
웃으며 말하는 전경완 부시장에게 도훈도 담담히 웃었다.
도훈은 상대가 누가 됐든, 그의 주장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면 절대 선선히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그건 차혜진이든 아니든 그 누구를 상대할 때도 변함없는 태도여서 민의당 시의원들도 그런 부분에서는 스스로 조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의원 개인에게 아무 이유 없이 유감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으니, 반대라면 몰라도 도훈이 차혜진만 보면 쌍심지를 켠다는 게 사실이 아님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터였다.
“논의를 아직 안 한 건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아직 논의 전입니다.”
“어떤 건입니까?”
“남가동 주민센터 부속시설 설치 건입니다.”
“아, 그거요.”
전경완의 말에 도훈이 자기 앞 종이 뭉치를 뒤적여 해당 서류를 찾아냈다.
“... 흐음.”
서류 첫 면만 보고도 도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료와 조정요구안을 전부 읽고 각 자료의 첫 페이지에 자기 생각을 적어놓은 게 있었는데, 눈에 들어온 글귀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
- 배보다 배꼽이 크다.
“솔직히 저도 공감합니다.”
도훈이 말이 없는데, 전경완이 서류에 적힌 도훈의 글을 확인하고 먼저 말했다.
차혜진의 요구는 남가동 주민센터 부속시설로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현재의 주민센터에는 여유 공간이 없으니, 인근에 공간을 마련해 어린이 도서관으로 사용하자는 그런 제안이었다.
문제는 남가동이 시청 주변이고 주민센터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이 인근의 임대료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었다.
“임대료도 문제지만 공간만 마련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죠. 기자재나 책,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니 안전을 위해 추가적인 시공도 해야 할 겁니다.”
“그렇죠. 차 의원이 여기 2억을 적어놨는데, 제 생각에 이걸로는 제대로 된 어린이 도서관을 만드는 건 어려울 겁니다.”
전경완의 말에 도훈이 공감하는데, 두진이 끼어들었다.
“그냥 거절하는 건 답이 아닐 것 같습니다. 남가동에 어린이 도서관 하나 정도 필요할 것 같긴 하니까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만나서 얘기해볼까요?”
“차 의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필요성이 인정된다면, 당장 내년은 아니더라도 생각은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차 의원에게 연락해서 시간 잡아보세요, 실장님.”
“알겠습니다.”
이 일로 겪을 황당한 상황을 아직 도훈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