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그의 진지한 눈빛 - 2.
“도훈 씨, 무슨 생각해요?”
“네? 아, 미안해요.”
세경의 말에 도훈이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은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점심 먹고 영화 보고 서점에 들렀다가 저녁 먹기 전 잠시 쉬는 중이랄까.
세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극장에서도 영화에 집중 못 하는 것 같던데···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설마 아버님 만난 것 때문에 그래요? 아버님이랑은 얘기 잘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그게···.”
아들에게 팩트 폭격을 시전한 도훈의 아버지는 다행히 세경을 만날 걸 고집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팩트 폭격에 아들이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멍해진 것으로 소기의 효과는 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오늘 도훈 씨 좀 이상해요. 오전에는 안 그랬는데, 아버님 만나고 나서부터는 자꾸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고···.”
“... 하하.”
세경은 도훈의 아버지와 만나는 걸 흔쾌히 좋다고 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일이 생겨 그냥 가셨다고 다음 기회를 보자고 말씀하셨다고 둘러댔더니 살짝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승낙을 받고도 도훈이 왠지 모를 불안함에 홀로 아버지를 만났던 것.
아버지가 일이 생겨 집에 그냥 가셨다고 둘러댔지만, 도훈은 오후 내내 데이트에 집중하다가도 종종 아버지의 말에 정신이 팔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해 봐요. 무슨 일 있었죠?”
“... 음.”
“설마 저 말고 다른 사람이랑 선이라도 보라고 하신 건가요?”
“에이, 그럴 리가요.”
“그럼 뭔데요?”
세경이 장난기가 섞였으면서도 차분한 눈으로 묻자, 도훈은 더는 혼자 생각을 정리해 나중에 세경과 얘기하겠다는 애초의 결정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게 말이죠. 일이 있었던 게 아니고 아버지가 하신 얘기가 계속 떠올라서 그래요.”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요?”
“그게···.”
도훈은 아버지가 폭격의 재료로 썼던 ‘팩트’들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담담한 표정으로 듣던 세경도 어떤 이야기에서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바로 이렇게.
“어머, 그러네요? 생각해보니까 아버님 말씀대로라면 우리 진짜 결혼해도 얼마간은 주말 부부로 살아야 하네요?”
“......”
“흐음, 정말 신혼집이나 살림살이 같은 거에 돈 들어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 걸요?”
“... 하하.”
도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세경의 모습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대로 되려면, 도훈은 시장에 재선되어야 하고 두 사람은 결혼해야 하는 두 개의 무척 어려운 전제가 있는데 세경은 그 전제가 현실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 듯했으니까.
‘장난인 거야, 아니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설마 장난은 아니겠지?’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세경이 말을 이었다.
“우린 그냥 자연스럽게 천천히 흘러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른들 생각을 들어보니까 그런 맹점이 있긴 있었네요.”
“... 네. 저도 아버지에게 한 마디도 반박을 못 했어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라서요.”
“호호. 이거 참···.”
도훈은 우선 세경이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진즉에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긴 했지만, ‘결혼’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닌가.
세경이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요즘 엄마가 자꾸 옆구리를 찌르고 있긴 해요.”
“그래요?”
“네. 원래도 도훈 씨가 좀 얼굴이 많이 팔린 편이기도 하지만, 요새 시민들이랑 이런저런 운동하는 것 화제가 되고 있잖아요. 엄마도 그걸 아셨나 봐요.”
“... 하하.”
“이렇게 쌩쌩한 남자가 왜 얼른 안 데려가는 거냐고, 저나 도훈 씨나 나이는 자꾸 먹어가는데 혹시 남모를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자꾸 물어보시더라고요.”
“흐음.”
도훈과 세경의 연애는 비밀이 아니었다.
‘그 아가씨’를 연발하던 도훈의 아버지도 ‘민세경’이라는 이름도 알고 사진도 봤으며 직장은 물론 개략적인 가족사항 등도 알고 있었다.
그건 세경의 어머니 쪽도 마찬가지.
도훈의 아버지는 ‘누가 됐든 네가 좋다면 나야 대만족’이라는 입장이고, 세경의 어머니는 ‘일단 긍정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단다.
그 ‘일단 긍정적’이라는 반응을 보인 데는 당사자인 세경보다 세경 어머니의 친언니 아들인 강정문의 영향이 컸다는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던 도훈이었다.
‘... 지금인가?’
도훈은 가만히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 결혼하겠다는 마음은 없지만, 세경과는 그냥 연애로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아니, 끝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진즉부터 있었다.
통화는 일상적으로 해도, 얼굴 보는 걸 자주 못 해서인지 일이나 생활 등 여러 주제로 수다는 많이 떨었지만, 진지한 주제로 대화한 적은 많지 않았다.
이를테면···.
‘... 결혼 같은 거 말이지.’
생각을 정리한 도훈이 세경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
아무래도 세경도 도훈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인 게 틀림없었다.
도훈은 세경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가 생각을 마치길 기다렸다.
얼마 뒤, 세경이 고개를 들다 도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리 빤히 바라보고 있어요?”
“그냥요.”
“왠지 쑥스럽네요, 호호.”
발그레 뺨을 물들인 그녀를 바라보는 도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사라졌다.
진지한 표정을 한 도훈이 말을 이었다.
“세경 씨.”
“네.”
“우리 지금까지 이런 얘기한 적 없었는데, 이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네.”
도훈이 무슨 얘길 꺼낼지 짐작하는지 세경이 담담히 웃고는 도훈처럼 진지한 표정을 했다.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도훈의 질문을 받는 세경이 새벽하늘 샛별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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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조회를 앞둔 대흥시청 비서실.
시장실에서 나온 도훈이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지연의 책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이거 어제 검토 다 마쳤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온라인으로 사인까지 다 했어요.”
“알겠습니다. 주말에 고생하셨네요.”
“지연 씨말대로 토요일은 좀 힘들었어요. 야구공이 하필이면 저 있는 쪽으로 많이 날아오는 바람에요.”
“호호, 안 그래도 누가 올린 시장님 야구 하는 영상 봤어요. 잘하시는 것 같던데요?”
웃으며 묻는 지연에게 도훈이 담담히 되물었다.
“그거 혹시 뛰어가서 공 받고 던지는 것만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 같네요. 왜요?”
“야구가 던지기만 잘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거든요. 타석에 두 번 섰는데, 공 한 번 맞춰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요?”
“하하. 아무래도 영상 올린 사람이 보기에도 민망했나 보죠. 그러니까 뺐겠죠.”
“호호호!”
지연이 큰소리로 웃었고 머쓱하게 마주 웃은 도훈이 소파에 가 앉았다.
“오늘은 저녁 일정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습니까?”
“네. 대신 내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계속 있습니다.”
“휴우,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푹 자야겠습니다.”
“글쎄요. 퇴근 전까지 새 일정이 안 생긴다면 그러실 수 있겠죠.”
“......”
영배의 답에 도훈이 그를 째려봤고 영배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던 두진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어제 데이트는 잘하셨습니까?”
“네. 오전부터 만나서 점심 먹고 영화 보고 서점 갔다가 차 마시다가 저녁 먹고··· 수다도 많이 떨었습니다.”
“하하, 피곤하지 않으세요?”
“전혀요.”
“하하하. 역시 연애가 청춘사업이 맞긴 맞나 봅니다. 그렇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해도 피곤하질 않다는 걸 보면요.”
“그러게 말입니다.”
도훈과 영배가 담담히 대화하는데 영배가 끼어들었다.
“참, 어제 시장님 아버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세경 씨 만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뭐, 별일 없었습니다. 저 혼자 잠깐 만나 뵈었거든요.”
“그래요? 무슨 말씀하셨는데요?”
“뭐가 그리 궁금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건데요?”
“아니, 시장님 아버님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다짜고짜 들이대··· 커험! 다짜고짜 만나자고 하시는 거요.”
“... 뭐, 아버지께는 중요한 문제였거든요.”
“아버님께 만요?”
“... 저한테도 조금은요.”
“흐음, 도대체 그게 뭘까요?”
영배가 얄미운 표정으로 바라봤고, 도훈이 담담히 째려봤다.
엊그제 좀 심하게 갈궜더니 그 반작용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가서 커피나 타 가지고 오세요. 조회 시작하게.”
“흐음. 그냥 얼렁뚱땅 질문을 넘기시는 겁니까? 더 궁금하게?”
“다른 사람한테는 다 얘기해줘도 왠지 지금의 조 비서관한테는 얘기해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왜요?”
“얄미워서요.”
“... 흐음.”
영배가 살짝 도훈을 째려보다가 커피를 타러 갔고, 두진이 끼어들었다.
“시장님 결혼 얘기하셨겠군요.”
“네, 맞습니다.”
“빨리하라는 그런 말씀이신가요?”
“비슷합니다.”
“하하, 사귀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말씀도 하시는 거겠죠.”
“그러니까요. 안 그래도 아버님 때문에 어제 세경 씨하고 ‘결혼’이란 것에 관해 진지하게 대화했습니다.”
“그래요?”
“네. 거의 토론에 가까운 것이었죠.”
“어머, 결혼에 관한 토론이라고요?”
도훈의 말에 어느새 차를 들고 와 도훈 옆에 앉은 지연에 두진, 조용히 듣고 있던 영진 까지 관심을 보였다.
영배 역시 커피잔을 들고 와 앉으며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냈고.
“사실, 아버지께서 이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도훈이 아버지가 했던 말을 축약해 옮겼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네. 반박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반박하고 말고 할 내용이 아닌데요? 시장님 그 말씀 듣다가 굉장히 찔리셨겠어요. 아니면 뜨끔하셨거나.”
“하하, 네. 좀 그랬습니다.”
도훈의 ‘결혼’에 관한 얘기라서 그런지 다들 아주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비서실 직원들은 세경과도 제법 친분이 있었으니 더 그런 모양이었다.
그중 제일 궁금하다는 표정인 지연이 물었다.
“민 과장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하더군요. 마침, 세경 씨 어머님도 요즘 결혼하라는 얘기를 좀 자주 하신답니다.”
“오호! 이거?”
“음!”
“어어?”
다들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자 도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다들 갑자기 입을 다무십니까?”
“그다음이 궁금하니까 그렇죠.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영배가 묻자 도훈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짓궂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자, 이제 조회 시작하죠.”
“아우! 시장님!”
“에이, 반칙이에요, 시장님!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그러시면 안 되죠!”
“하하. 제 일이니까 얘기하고 안 하고는 제 마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 에이!”
“실장님, 이제 조회 시작하시죠.”
“... 하하, 네.”
두진도 무척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조회를 시작했다.
두진을 제외하고 다들 조금 불만이라는 표정이었지만, 도훈은 모른 척 조회에 집중했다.
그리고 금세 조회가 끝났다.
“이상으로 오늘 조회를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희는 바로 주민센터에 가죠.”
“네, 시장님.”
조회가 끝나자마자 도훈이 첫 일정을 시작하러 곧바로 시장실을 나섰다.
여느 때처럼 지연이 사무실에 남았고 다른 일이 있던 영배도 사무실에 남았다.
영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궁금해 죽겠네.”
“뭐가 그리 궁금한 건데요?”
“아, 부시장님.”
영배가 고개를 돌리니 전경완 부시장이 서 있었다.
“시장님은 주민센터로 출발하셨어요?”
“네. 방금 나가셨습니다.”
“이런, 이따가 다녀오면 봬야겠네요.”
“음, 시장님 복귀하시면 부시장실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줘요. 아, 근데 뭐가 그렇게 궁금해 죽겠어요?”
별생각 없이 답하려던 영배의 뇌리를 뭔가가 스쳤다.
전경완 부시장과 세경은 아주 오랫동안 친삼촌과 조카처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씨익.
“그게 말이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린 영배가 두진에게 뭐라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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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 제가 들어도 상관없는 거라면 꼭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
“그래서 어제 토론의 결론은 뭐였습니까?”
“......”
시청으로 돌아오자마자 찾아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어제 세경과의 ‘토론’의 결론을 묻는 전경완 부시장의 모습에 도훈이 말문을 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