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그의 진지한 눈빛 - 1.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하, 네. 오늘 재미있었습니다, 시장님. 고생 많으셨어요.”
“... 그러셨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같이 게임 하죠.”
“네. 감사합니다.”
음식점 앞에서 야구동호회 회원들과 인사한 도훈이 돌아섰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경기에 참여했다가 뒤풀이인 점심까지 먹고 헤어진 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도훈이 피곤한 표정을 했고, 나란히 걷던 영배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고생했다.”
“... 아닌 게 아니라··· 지친다.”
“그럴 만도 했지. 왜 그렇게 공이 너한테만 날아갔다니? 설마, 일부러 그런 건가?”
“... 일부러 그게 되면 저 사람들이 프로가 아니라 동호회 활동하고 있겠어?”
“... 하긴.”
오늘 도훈은 야구동호회 경기에 참여했다.
경기규칙도 알고 어렸을 때 친구들과 경기한 적도 있었지만, 초심자 중의 초심자인 도훈은 선발이 아닌 후보로 경기를 지켜보다가 우익수로 후반 3이닝을 뛰었다.
단 3이닝이었지만, 유달리 외야 우측으로 공이 많이 오는 바람에 수비할 때는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경기는 졌지만, 회원들 칭찬받았으니 나쁘지 않았다.”
“... 무척 보람 있네.”
어깨가 튼튼한 덕분에 도훈은 강한 송구를 뿌리며 실점을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
타석에서는 공을 제대로 맞히지도 못했지만, 그 송구 능력 덕분에 동호회 회원들의 호평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집에 들렀다가 가야지?”
“... 그래야지. 일단 좀 씻어야 하니까.”
운전대를 잡은 영배의 말에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시간 빠르네. 벌써 10월 마지막 주야.”
“... 그러게.”
“주말마다 운동해서 그런가? 이번 달은 더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다.”
“... 누구 덕분에 말이지.”
“하하.”
“주말마다 단 하루도 안 쉬고 운동을 하고 있단 말이야. 피곤한 건 둘째치고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 쩝, 그건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 다 돌았잖아.”
“... 휴우.”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고 영배가 머쓱하게 웃었다.
축구, 당구, 배드민턴, 볼링, 족구에 이어 오늘 야구까지.
동호회의 특성상 평일이 아닌 주말에 모임이 열려 이번 달에 도훈은 푹 쉰 주말이 단 한 주도 없었다.
초청을 받았으나 도훈이 할 줄을 몰라 정중히 사양한 테니스 동호회, 있는 줄도 몰랐다가 가입 권유를 받았던 국궁 동호회까지 합치면 대흥시에 있는 스포츠 동호회란 동호회는 거의 전부 거친 것 같았다.
“효과는 좋잖아? 그게 다 선거 때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다.”
“... 왜 난 그게 내 피, 내 살이 아니라 형 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 하하하. 뭔 소리야, 인마. 내가 출마할 것도 아닌데.”
“... 나는 심드렁한데 형이 너무 좋아하니까 그런 가봐.”
“하하···.”
“얄미워 죽겠어.”
“... 하.”
몸치가 아니고 운동감각이 좀 있으니, 어떤 운동을 해도 도훈의 실력은 욕먹지 않을 정도는 됐다.
프로들의 경기라면 다를 테지만, 일반인들의 동호회 활동에서 웃는 얼굴로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당사자인 도훈이야 그러기 위해 보이지 않게 안간힘을 써야 했지만, 참가했던 동호회 활동에서 다 좋은 얘기를 들었으니 ‘홍보’ 책임자인 영배의 입이 찢어질 수밖에.
거기서 끝인 게 아니라 회원들이 도훈과 함께 운동하는 모습을 촬영해 공유하거나 인터넷에 올리고 해서 요즘 도훈은 시민들 사이에서 ‘만능 운동인’, 혹은 ‘바람돌이 시장’이라 불리며 화제가 되고 있었다.
영배도 도훈을 수행하느라 주말도 없이 동호회를 찾아다니는 건 마찬가지고 이런 일이 선거 때 좋은 효과를 볼 거라는 말도 수긍이 되는데, 데이트도 못 하고 피로를 쌓아가는 자신을 보고 너무 좋아하기만 하는 것 같아 얄밉기는 정말 얄미웠다.
“다 돌았으니까 이제는 주말에 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일은 데이트할 수 있잖아.”
“... 내가 죽어도 못한다고 한 덕분에 말이지.”
“... 하하.”
내일 일요일에도 동호회 모임에 초청을 받았었다.
도훈이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테니스 동호회 모임이었다.
영배는 어차피 테니스도 탁구처럼 라켓 휘두르는 거 아니냐며 잠깐 배우는 느낌으로 가보자고 했지만, 도훈이 절대 못 한다고 버텼다.
그래서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10월의 첫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됐고.
“세경 씨가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내일 데이트 전심전력으로 해야 하는 거 알지?”
“알지. 형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이것저것 정보를 물어온 거 아니야?”
“쩝. 찔리지. 그것도 많이 찔리지.”
주말마다 동호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세경이 선선히 이해해 줬기에 가능했다.
도훈은 세경에게 미안하면서도 동호회 활동의 효과가 즉시 나타나 영배의 성화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영배는 도훈의 데이트가 결정되자, 도훈이 가보지 못한 맛집이나 데이트 코스 등을 검색해 두툼한 자료를 만들어 건네줬다.
그래서 도훈은 만나서 헤어지는 순간까지, 완벽하게 세경이 만족할 수 있는 ‘거창한’ 데이트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분명 안 그럴 테지만, 혹시라도 세경 씨가 원망하면 그건 내가 감당할게.”
“하하, 고맙다.”
“그러니까 형은 내 원망만 감당해.”
“... 휴우, 고맙다.”
영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한숨을 내쉬며 답하자 도훈은 속으로 웃었다.
‘... 이 정도만 할까?’
도훈이 이렇게 영배를 ‘갈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의 동호회에서 다시 도훈을 초청할 분위기인데, 지금의 영배라면 무조건 다 가자고 할 것 같아서였다.
홍보 효과가 좋다는 것도 알겠고 그게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알겠는데, 데이트를 못 하는 것도 문제고 주말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안 되지 않겠는가.
운동한 뒤 그냥 쉰다면 몰라도 도훈에게는 홍보보다 더 중요한 시장의 일상 업무가 있다.
당연히, 이달 들어 운동에 근무까지 마치고 나면 주말 저녁마다 파김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아무리 효과가 좋아도 좀 적당해야지. 숨 좀 쉬자.’
도훈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개인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잉.
발신자를 확인한 도훈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 바쁘냐?
“아뇨.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 음, 너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면 내가 대흥시에 갈까 하는데.
“여길 오신다고요? 무슨 일 있으세요?”
- 내가 내일 대전에 다녀올 일이 있거든. 갔다 오는 김에 너랑 얼굴 보고 잠깐 얘기 좀 하려고 그래.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요?”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도훈을 찾아오겠다는 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 뭐겠냐, 인마. 늙어가는 애비가 굳이 노총각 아들 얼굴 보고 하고 싶은 얘기가.
“... 하하.”
머쓱하게 웃고 난 도훈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 제가 내일은 일이 있는데요.”
- 일? 사무실에 출근하는 거야? 밖에서 만날 필요 없어. 시청에 내가 들려도 되니까.
“그게 아니라···.”
- 인마. 내가 이렇게라도 널 닦달해야 속이 편해. 네 엄마 산소에 갈 때마다 할 말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나는 채근하고 있다고 말이야.
“쩝. 사실은요···.”
도훈은 내일 데이트가 있다는 걸 말했다.
10월 내내 주말에 바빠서 이달에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라는 것도.
그러면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나실 줄 알았다.
그런데···.
- 내일 나랑 점심 먹자.
“... 예?”
- 점심이 싫으면 저녁을 먹든지.
“... 예?”
- 점심이든 저녁이든 둘 중 한 끼는 나랑 먹을 줄로 알고 데이트 계획 짜라. 그 아가씨한테 얘기 잘해서 승낙 꼭 받아. 알았지?
“......”
- 아, 내가 억지로 끼어드는 거니까 뭐가 됐든 비싸고 맛있는 거 먹어도 된다. 내가 사마. 그렇다고 내 취향 챙길 필요 없다. 그 아가씨 취향대로, 나 파스타도 먹어봤고 피자도 먹어봤다.
“... 아, 아버지.”
- 안된다고 하지 마, 인마. 이번엔 나도 물러설 수 없으니까.
“......”
- 결정해서 시간, 장소 연락해. 내일 대전에서 보자.
뚝.
할 말을 ‘두두두’ 쏟아낸 도훈의 아버지가 전화를 끊었고, 도훈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 왜 그래? 아버지하고 통화한 거 아니었어?”
운전하던 영배가 물었고, 도훈이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 맞는데···.”
“맞는데 왜?”
“... 우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아서.”
“... 뭔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영배에게 도훈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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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점심 무렵, 대전 모처의 카페.
도훈이 앉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아버지가 인상을 쓰고 물었다.
“왜 너 혼자야? 설마 승낙 못 받았어?”
“그게 아니고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지 미리 좀 들어보려고요. 아무리 제 아버지시지만, 이렇게 무턱대고 만나자고 하시는 건 세경 씨에게 예의가 아니잖아요.”
“... 그 아가씨는 어디에 있는데?”
“잠깐 자기 볼일 보고 있어요. 1시에 만나기로 했고요.”
“흠.”
“저랑 얘기하셔서 제가 안 되겠다 싶으면 절대 못 만나십니다.”
“인마. 아비가 아들 애인 좀 보겠다는데, 그게 어때서?”
“설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도훈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버지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했다.
“커험.”
“아버지 애인이 아니고 제 애인이잖아요.”
“......”
“아버지답지 않게 갑자기 왜 이러세요?”
“... 쩝.”
도훈의 아버지 김인식 씨는 자식들에게 쿨한 편.
아주 가끔 ‘타협’이 안되고 자기 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때가 있긴 했지만, 그건 자식들에게나 그렇지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오늘 도훈과 세경을 갑자기 만나겠다는 건 본인도 ‘무리한 일’임을 알고 있다는 뜻.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가 입맛을 다시다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이다.”
“예.”
“요새 머리가 돌아가는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만, 아주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다.”
“정정하신 분이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몸은 아직 쓸만한데, 머리가 예전보다 못해. 그러니까 그걸 깜빡하고 있었지.”
“... 도대체 뭘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답했다.
“너 나한테 시장일 때 결혼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 했었지?”
“... 결혼이 아니라 연애가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였죠, 그때는.”
“그래. 연애도 어려운데 결혼은 더 어려운 것 아니겠냐?”
“... 아마도요? 근데 그게 왜요?”
감을 못 잡는 아들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는 아버지.
“너 또 선거 나간다며?”
“네.”
“선거 나가서 당선되면 또 시장하는 거잖아. 현직으로.”
“그렇죠.”
“그때도 결혼 어려울 거 아니냐?”
“... 어, 그게···.”
아리송한 표정으로 뭐라 대꾸를 못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연타를 날렸다.
“혹시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 네.”
“선거 떨어져서 백수가 됐다고 쳐. 그때 홀가분한 마음으로 결혼할 거냐?”
“......”
“그 아가씨는 모르겠다만, 그쪽 집에서 좋게 생각하겠어? 사위 후보가 백순데? 그것도 선거에서 진 백수.”
“......”
말문을 잃은 도훈에게 아버지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운 좋게 시장에 재선됐다고 쳐. 그럼 네 결혼은 또 임기 끝난 다음으로 미룰 거야?”
“......”
“그 임기 마치고 또 뭘 할 줄 알고?”
“......”
“너도 너지만, 그 아가씨는 무슨 죄야?”
“... 어, 그게 그러니까···.”
어벙해진 아들을 놔두고 도훈의 아버지가 커피로 목을 축였다.
“내 결론은 이래.”
“... 네.”
“너랑 그 아가씨가 지금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다만, 결혼까지 생각한다면 굳이 미룰 이유가 없어. 선거에 떨어지는 경우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재선돼도 지금이랑 달라질 게 전혀 없으니까. 안 그래?”
“... 그, 그게···.”
“식도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하객들 안 받고 조용히 치르면 전혀 문제 될 거 없어. 신혼 여행을 마음 편히 가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그건 네 팔자니까 어쩔 수 없겠지.”
“... 그, 글쎄요.”
“글쎄요는 얼어 죽을! 내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뭐야? 그 아가씨랑 결혼할 생각이 있어?”
“......”
“아, 좋은 것도 있어. 이걸 꼭 좋다고는 할 수 없겠다만, 그 아가씨 결혼하고도 계속 직장생활 할 거 아니냐?”
“... 그렇죠.”
“너는 대흥시에, 그 아가씨는 도청에서 근무해야 하니까 한집에서 같이 살기는 힘들다고. 천상 얼마간은 주말부부를 해야 한단 말이지.”
“... 네.”
“그럼 당장 신혼집을 구할 필요가 없잖아. 안 그래?”
“... 그, 그런가요?”
“당연하지, 인마! 그러니까···.”
멍청한 표정의 도훈에게 아버지가 자신이 정리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 인마, 알아들어?”
“......”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