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자기 PR - 1.
도훈은 어느 시의원으로부터 VH 그룹 기획실장과 나눈 얘기가 흘러나갔는지 조사하지 않았다.
이미 결론이 난 일에 대해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원하지 않았어도 출처를 알 수 있었다.
“대자당 지역위원장이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닌답니다. 우리 시에 그런 능력이 있는, 때로는 모험도 할 수 있는 시장이 필요하다는 얘기요.”
“그래요?”
“네. 지역위원회 사람들이 입이라도 맞춘 듯, 일제히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 흠. 뭐, 알겠습니다.”
조회를 시작하기 전, 차를 마시며 영진이 꺼낸 말에 도훈이 담담히 답하는데 영배도 말을 보탰다.
“그쪽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민의당 신규 당원 중 일부도 맞장구를 친다던데요.”
“음.”
“웃긴 건 제일 그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장민호 의원이라는 겁니다.”
“... 장민호 의원이요? 진짜로?”
“그렇다네요. 아무래도 안 의원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안 의원 없는 자리에서 장민호 의원이 안 의원 추켜세우는 얘기를 많이 한다더라고요.”
“확실한 겁니까, 그 얘기는?”
“90% 이상이라고 하던데요.”
“... 하하.”
도훈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서태기가 민의당에서 제명되고 의회에서까지 제명된 지금, 그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장민호는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양상택이 사퇴하기 전에는 양상택, 서태기, 장민호가 뭉쳐 다녔지만, 양상택의 사퇴로 둘이 되더니 이제는 장민호 혼자 남은 셈.
장민호가 지역에서 유력한 집안에 재산도 좀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의회에서 혼자서도 무리 없이 의정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더군다나 민의당 대흥시 지역위원회만 놓고 보면, 개혁적 성향의 당원이 늘고 발언권도 세지고 있으니 장민호는 당연히 위기감을 느낄 터.
그는 그 타개책으로 안준식과 가까워지는 걸 택한 듯했다.
“일부러 알아봤어요?”
“아뇨. 누가 말해준 겁니다.”
“누가요?”
“있습니다.”
영배가 소식통을 밝히지 않았지만, 도훈은 더 채근하지 않았고 곧 두진이 조회에 쓸 서류를 챙겨와 소파에 앉아 조회가 시작됐다.
“오늘 오전과 오후에 각각 예산안 관련 회의가 하나씩 있습니다. 점심은 엊그제 회의 때 못 나눈 얘기도 마저 할 겸 교육장님과 함께하기로 했고···.”
조회는 언제나처럼 10분이 채 걸리지 않고 끝났다.
첫 일정이 내년 예산안 관련한 문화체육과 회의에 참여하는 것이어서 도훈이 두진, 영배와 함께 문화체육과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안에 도훈이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아, 시장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인사하는 도훈을 보고 반색한 사람은 바로 탁구동호회 회장.
청사 옆 체육관에서 운동하다 왔는지, 운동복 차림인 그에게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하하. 우리 동호회 행사 지원 좀 해달라고 여기 왔는데 좀 거들어주세요.”
“... 행사요?”
“아, 시장님은 아직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매달 우리 동호회 회원끼리 시합하잖아요? 그런데 이달 시합은 인근 OO 시 동호회하고 대항전을 하기로 했거든요.”
“어디에서 하기로 하셨는데요?”
“우리보다는 OO 시 시설이 훨씬 나아요. 그래서 우리가 그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긴 하죠.”
대흥시와 딱 붙어있는 OO 시에는 크지 않은 간이 건물이지만, 탁구대만 여러 대가 비치된 탁구 전용 체육관이 둘이나 있었다.
시에서 만든 전용 체육관이 둘이나 있으니 대흥시보다 탁구치는 사람도 많고 동호회 숫자도 많았다.
비정기적으로 대흥시와 OO 시 동호회의 친선시합이 벌어지곤 했는데, 상대 전적에서 OO 시 측이 일방적으로 앞섰다.
비선수 출신으로는 실력이 좋은 편인 도훈도 그 친선시합에 나가본 적이 있었는데, 역시 승보다 패가 많았다.
“과장님, 지원 가능하시겠어요?”
“네. 다행히 요청 금액이 많지 않습니다.”
“됐네요, 그럼. 제가 거들 것도 없네요.”
도훈이 웃으며 답하는데, 동호회 회장이 눈을 빛내더니 도훈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럼, 시장님은 다른 쪽으로 좀 거들어주세요.”
“네?”
“이번 시합날짜가 마침 마지막 주 토요일입니다. 어때요? 오래간만에 한 게임 하시는 거?”
“글쎄요.”
“아이고, 시장님! 우리 올봄 시합 때 한 게임도 못 이기고 다 졌어요!”
“... 그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시장님, 우리 동호회 에이스잖아요. 오죽하면 내가 바쁜 시장님한테 이러겠어요!”
“... 하하.”
“아, 웃지만 말고요. 올봄에 완패하고 내가 며칠간 밤에 잠을 못 잤어요.”
“... 하하하.”
도훈은 확답을 못 하고 웃기만 했고, 회장은 한참이나 도훈에게 참가를 종용하다가 끝내 약속을 못 받고 자리를 떴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의 회장이 나가자마자, 문화체육과 과장이 머쓱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지원 요청 때문에 오셨다는 건 그냥 핑계고요. 저분, 일부러 시장님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제가 이 시간에 여기 오는 걸 어떻게 알고요?”
“그제 저한테 시장님 뵐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시장실로 찾아가시지 그러냐고 했더니, 친선시합 일로 찾아가는 건 오버 같다고 해서 오늘 회의에 시장님 오신다는 걸 말씀드렸죠.”
“아, 네.”
“잠깐만 이야기하고 가신다길래 말씀드렸는데, 저렇게 간절하게 매달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괜찮습니다. 봄 친선대회 때 전패하신 게 얼마나 분했으면 저러셨겠어요.”
“하하하.”
다들 웃는 가운데 도훈이 손사래를 치고는 자리에 앉았고 곧 회의가 시작됐다.
“그 부분은 1/3 정도 삭감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예 사업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고요. 삭감한 예산으로도 사업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전남의 한 지자체의 경우에···.”
예산과 관련한 논의인지라 다른 때보다 훨씬 집중된 분위기에서 많은 말이 오갔다.
원래 회의를 길게 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 도훈이지만, 주제가 주제다 보니 회의는 한 시간이 훌쩍 넘게 걸린 다음에야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시장실로 돌아가는데 영배가 뒤에 처졌다.
회의 때도 집중을 못하고 다른 생각에 빠지는 모습을 봤기에, 도훈이 팔을 툭 치며 물었다.
“조 비서관, 무슨 생각을 그리해요?”
“아, 음. 탁구요.”
“... 탁구요?”
“네. 시장님 친선시합 나갈 생각 없으시죠?”
“... 그다지요? 왜요?”
영배가 빤히 도훈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나가죠, 친선시합.”
“네?”
“탁구 시합에 나가자고요.”
“......”
어이없다는 표정이 된 도훈 대신 두진이 물었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린가, 그게? 갑자기 탁구 대회에 나가자는 얘기가 왜 나와? 자네 장난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진지합니다, 저.”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 시장님의 장점을 살리려고요.”
“... 뭘 살려?”
“시장님의 장점이요. 다른 사람과 확연히 비교되는.”
“......”
도훈과 두진이 말문을 잃은 가운데, 영배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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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장과 점심 겸 회의를 마치고 시청으로 복귀하는 승합차 안.
“... 그렇잖아요. 요즘 도는 소문은 그걸 시장님의 단점이라고 부풀려서 이야기하는 방식 아닙니까.”
“......”
“그렇다면 ‘단점이 맞네 틀리네’ 입씨름할 필요 없이 시장님의 장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대응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점심 먹는 내내 별말이 없던 영배는 차에 오르자마자 열심히 자기주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입, 안 아픕니까?”
“전혀요.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시장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 에휴.”
도훈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푸념하건 말건 영배는 다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시장님 장점이 여럿입니다만, 젊고 건강하다는 걸 극명히 드러낼 기회가 맞잖습니까. 안 그래요, 실장님?”
“...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네.”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럴 겁니다!”
영배가 목소리를 높이자 도훈은 한숨을 내쉬었고, 두진은 좀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으며 운전하는 영진은 소리 없이 웃었다.
영배는 지금 도훈에게 탁구 대회에 출전해 멋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젊고 건강하다는 장점을 ‘어필’하자는 주장을 다시 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두진이 입을 열었다.
“그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되겠나? 시장님이 탁구 한다고 해도 몇 사람 못 볼 것 같은데 어필이 되겠어?”
“일단, 영상을 찍어서 시장님 공식 SNS 계정에 올리면 됩니다. 그리고 혹시나 시합성적이 좋으면 아마 탁구동호회 사람들이 알아서 홍보 열심히 해줄 겁니다.”
“흐음.”
두진이 잠깐 생각하다가 도훈에게 시선을 주고 물었다.
“전에도 그 시합 참가하신 적 있다고 하셨죠? 혹시 가장 결과가 좋았던 게 어느 정도였습니까?”
“......”
“왜 그렇게 보세요?”
“... 실장님까지 조 비서관 말에 넘어가실 줄은 몰랐거든요.”
도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두진은 진지한 표정 그대로 답했다.
“조 비서관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시장님이 홍보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아는데요. ‘자기 PR’이란 말이 나온 지 아주 오래됐습니다.”
“......”
“그 소문이 사라질 듯 사라질 듯하면서도 계속 도는 건 그런 말을 계속 하고 다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 그러기가 쉽겠죠.”
“그렇다면 우리도 뭔가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사기 치는 것도 아니고 과장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 하하.”
도훈이 헛웃음을 흘리는데, 조수석에 앉은 영배는 생기가 도는 표정으로 또 다른 우군을 만들고자 했다.
“홍 주무관님 생각은 어떠세요?”
“... 저요?”
“네.”
영배는 물론, 도훈과 두진의 시선도 영진을 향했다.
갑작스럽게 주목받게 된 영진이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커, 커험. 나쁘지는 않을 것···.”
“거 보세요! 홍 주무관님도 좋다고 하시잖아요!”
영진의 말은 영배의 환호와도 같은 외침에 막혀버렸다.
그래서 ‘... 같긴 한데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말은 입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시장님, 모두 찬성입니다.”
“... 지연 씨가 남았잖습니까. 그리고 내···.”
“제가 아까 지연 씨에게 물어봤습니다. 당연히 찬성이에요.”
“...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은 겁니까?”
영배에게 항변하는 듯한 표정의 도훈.
영배는 그런 도훈의 표정을 깔끔히 무시했다.
“네,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장님은 홍보와 관련한 거면, 뭐든지 싫다고 하시잖습니까.”
“......”
“결심하시죠. 탁구 대회 나가는 겁니다.”
“내가 지금 탁구 안 한 게 거의···.”
“아, 연습하면 되죠. 하던 가락이 있으니 감각만 되찾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얼마든지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
“시장님, 하시죠!”
“......”
말문을 잃은 도훈이 두진에게 시선을 줬다.
영배만큼 열정적인 표정은 아니었지만, 두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도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
“... 알았어요. 합시다.”
“잘 결정하신 겁니다!”
결국, 도훈은 집요한 영배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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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마지막 주 토요일, 대흥시 인근 OO 시의 탁구 전용 체육관.
사람들이 체육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통 친선시합 때 참여하던 인원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 양 팀 다음 단식 경기 선수, 앞으로 나와주세요.
“파이팅!”
“김도훈 파이팅!”
“시장님 파이팅!”
“우리의 에이스, 실력을 보여주세요!”
탁구라켓을 들고 탁구대로 다가가는 도훈의 등 뒤에서 여러 사람이 소리쳤다.
아주 절실한 눈빛을 하고 소리치는 사람들 사이에는 비서실 직원들도 있었다.
그리고···.
“도훈 씨 파이팅! 잘해요!”
“... 하하, 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세경에게 답해 주고 돌아선 도훈이 푹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내가 어쩌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