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가뭄에 단비? - 2.
예상하지 못한 실무 협상을 준비하게 된 때문에, 거기다 상대가 월요일에 꼭 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도훈과 비서실 직원 그리고 지역경제과 직원들이 토요일에 모두 출근했다.
기업 측에 제시할 각종 세금 감면, 행정적 지원 등의 혜택을 논의하기 위해 세무회계과나 기획감사실, 건설교통과 등에서도 몇몇 담당 직원이 참여했다.
그러다 보니, 졸지에 매년 예산안이 논의되는 시기를 제외하고 도훈이 가장 많은 직원에게 주말 근무를 시키게 됐다.
“오 계장님은 가능한 선에서 세금 감면 등 세금 쪽으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혜택을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그거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군요. 오전 중에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좋네요. 그거만 마치면 곧바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계장님한테도 그렇고 직원들한테도 그렇고 갑작스럽게 출근하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시장님. 잘 풀리면 우리 시에 경사라고 할 만한 일 아닙니까. 이 정도도 못하면 대흥시 공무원이 아니죠.”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고요.”
“얼른 끝내서 서류 시장실에 올려보내겠습니다.”
“네, 고생하세요.”
도훈은 직접 사무실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도 하고 사과도 할 겸, 업무지시를 내렸다.
반년마다 한 번씩 직원들에게 시정평가서를 받을 때마다, ‘일 좀 적당히 하라.’, ‘근무 시간이 많다고 일 잘하는 거 아니다’는 지적을 빠짐없이 받았던 도훈이었지만, 비서실 이외 다른 부서 직원에게 직접 잔업이나 주말 근무를 지시한 적이 거의 없었던 도훈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큰 공장을 유치할 기회라는 걸 이해한 때문인지 갑작스러운 출근 및 업무지시에도 반발하는 직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역경제과 빼고는 다 오전에 마칠 수 있을 것 같다는 겁니다.”
“다른 부서에서 필요한 서류를 제시간에 마무리해준다는 전제하에, 지역경제과도 오늘만 일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무실을 다 돌고 시장실로 올라가는 도훈에게 영배와 두진이 말했다.
“그러게요. 다행입니다.”
답하는 도훈의 목소리가 심드렁해서 영배와 두진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조금 전까지 직원들과 이야기할 때는 그런 태도가 아니었는데, 지금은 왠지 살짝 짜증이 난 듯하다고나 할까.
두진이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시장님? 기분 안 좋으신 것 같은데요?”
“솔직히 좀 이해가 안 되고 짜증도 나고 그러네요.”
“VH 엔지니어링에요?”
“네.”
직원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도훈은 VH 엔지니어링 쪽에서 실무 협상을 하자는 게 진심일지 의심됐다.
또한, 얼마나 사정이 급한지는 몰라도 곧바로 월요일에 실무 협상을 하자고 조르는 게 짜증스러웠다.
금요일 늦은 오후, 도훈은 상대가 월요일에 실무자를 보낸다는 말을 듣고 일정을 뒤로 미뤄보라고 지역경제과 과장에게 말했었다.
월요일에 협상하게 되면, 그 준비를 위해 지금처럼 여러 직원이 쉬지도 못하고 출근해야 하니까.
도훈의 지시를 받은 지역경제과장은 VH 엔지니어링 측에 그런 뜻을 전했는데, 그쪽에서 월요일 외에는 도저히 시간이 안 난다고 답해왔다.
결국, 아쉬운 쪽은 이쪽이니 도훈은 어쩔 수 없이 그 일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이렇게라도 해서 결과가 좋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렇게 되길 바라야죠.”
“... 흐음.”
“이미 출근해서 일하고 있잖습니까. 다들 기대하는 마음으로 불평도 안 하고 추가 근무를 하는데 너무 마음 쓰지 마시죠, 시장님.”
“... 쩝.”
짜증스러워하는 도훈과 그런 도훈을 말리는 두진을 바라보며 영배가 피식 웃었다.
“... 왜 웃나?”
“아니, 그게···. 평소라면 시장님은 별다른 감정 표현 안 하고 담담하고 저나 실장님이 그런 감정 표현을 아주 다채롭게 하잖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좀 반대가 된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런가? 하하.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
영배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기에 도훈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계단을 올랐다.
시장실에 돌아오니 지연이 자료를 출력해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다.
직원들이 검토하고 정리해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도훈도 다른 지자체의 선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지자체가 기업체에 혜택을 주고 싶어도 정부의 규제 내에서 해야 했고, 정부의 지원책에 힘입어 부담을 줄일 수도 있으니 그쪽도 살펴봐야 했다.
직원들만 일 시키고 도훈은 그 결과를 기다리며 한가히 시간을 보낼 입장은 아니었던 것.
“이게 다입니까, 지연 씨?”
“일단은 그렇습니다, 시장님. 출력하지 않아도 되는 자료는 제가 지금 자료실에 내려가서 가지고 올 거예요.”
“그건 조 비서관이랑 같이 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연과 영배가 나간 뒤 도훈은 의자에 앉아 서류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두진도 마주 앉아 자료를 검토하다 도훈을 흘끔 하고는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못마땅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서류를 잡으니 역시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집중하네.’
도훈이 못마땅한 반응을 보인 건, 그만큼 공장 유치의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여긴 때문일 터.
VH 엔지니어링 측에서 다른 지자체에도 공장 입주의향서를 보냈다는 걸 보면, 분명 ‘유치 경쟁’을 하겠다는 뜻일 텐데 대흥시는 전국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작은 도시.
그에 걸맞게 시 살림의 규모가 작으니 공장 유치를 위해 내밀 수 있는 카드도 적을 수밖에.
‘그렇다고 가만히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 수는 없지.’
도훈이 영배나 두진 앞에서는 투덜거려도 직원들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지금도 저렇게 서류에 집중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터.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성사만 된다면 좋은 기회인 건 틀림이 없다.
도훈도 그런 생각이기에 직원들을 출근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네.’
가만히 중얼거린 두진이 서류에 시선을 가져갔고 도훈처럼 집중하기 시작했다.
협상에 대비해 ‘안’을 만들고, 논의 끝에 그 안을 수정하고 폐기하고 다시 만들고 논의하는 일이 주말 내내 이어졌다.
도훈과 몇몇 사람들이 주말을 꼬박 실무 협상 준비에 투자한 가운데, 월요일이 밝았다.
-----
월일 오후,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업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도훈은 이동하는 밴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 끝났다고요? 벌써요?”
- 네.
핸드폰으로 연락한 지역경제과 과장의 말에 도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VH 엔지니어링에서 온 실무자 셋과 시청 담당자들이 마주 앉은 게 30분쯤 전의 일.
도훈은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기에, 상대 실무자들이 도착해 회의 시작한다는 보고도 끝났다는 보고도 전화로 받았다.
“... 얘기가 잘 안 된 겁니까?”
- 그렇다기보다는 저쪽에서 ‘논의’보다 ‘검토’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논의가 아니고 검토요?”
- 네, 시장님.
“아니, 오늘 실무 협상하기로 한 거였잖아요. 협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까? 검토만 할 거면, 굳이 이렇게 찾아올 필요 없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안을 정리해서 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 그, 그렇지요.
“날짜도 미루자니까 굳이 오늘이어야 한다고 해놓고 논의가 아니고 검토? 이게 지금 무슨 경웁니까?”
상대가 누가 됐든지 간에 도훈이 이렇게 대뜸 화를 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당연히, 보고하는 과장은 할 말이 없을 터.
화가 난 도훈이 씩씩거리는데 과장의 풀 죽은 말이 들려왔다.
- ... 죄송합니다, 시장님.
“아닙니다. 제가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냈습니다. 제가 죄송하네요. 과장님한테 화낸 거 아니라는 거 아시죠?”
- 네.
애꿎은 과장에게 화낼 게 아니라는 걸 도훈이 속으로 되새기는데 과장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 일단 알겠습니다.”
도훈이 통화를 마치자 옆에 앉았던 두진이 물었다.
“회의 결과는 알겠는데 또 무슨 일이 있답니까?”
“VH 엔지니어링 실무자 한 사람이 저를 만나러 온다네요. 제게 전할 말이 있다고요.”
“네? 무슨 말을요?”
“저도 모르죠. 그쪽에서는 제가 오늘 협상 자리에 나올 거로 생각했었나 봅니다. 직접 전해야 한다고 비서실에다 제 다음 일정이 어디냐고 물어보고 아까 출발했다는데요?”
“... 그래요? 협상은 어설프게 해놓고 무슨···.”
“그러게 말입니다.”
도훈과 두진의 대화에 영배가 끼어든 건 바로 그때.
“그럼 저 사람인가 보네요.”
목적지에 도착해 속도를 줄이는 밴의 저만치 앞에 승용차 한 대가 서 있고,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도훈이 차에서 내리자 남자가 얼른 다가와 인사했다.
자신을 VH 엔지니어링 이사라고 밝힌 중년 남자에게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 담당자들이랑 얘기 다 하신 줄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이십니까?”
화는 났지만, 꾹 참고 담담히 묻는 도훈에게 중년 남자가 엉뚱한 말을 했다.
“저녁에 시간을 좀 내주셨으면 해서요.”
“저녁이요? 오늘 말입니까?”
“네.”
“무슨 일로요?”
“VH 그룹 기획실장님께서 시장님과 함께 식사하시길 청하십니다.”
“... 그룹 기획실장이요?”
“네.”
좀 머쓱한 표정인 중년인이 설명했다.
원래 오늘 미팅에 도훈이 직접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VH 쪽에서는 논의를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고.
그 설명은 도훈을 이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성미를 돋웠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쪽 대표로 자리한 지역경제과장이 결정 권한을 갖고 있었는데요. 그런 말 안 하던가요?”
“아뇨. 듣긴 했는데요···.”
이미 예정된 일정이 있었기에, 도훈은 미리 협상에서 양보할 수 있는 최종선을 정한 뒤 그 안에서 협상 대표로 나선 지역경제과장이 판단하도록 했다.
어차피 첫 번째 만남일 뿐이니까.
혹여 ‘논의’가 길어진다면 조금 늦게라도 시청에 돌아가 협상에 참여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으나 협상은커녕 논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설사 도훈이 직접 참석했더라도 그 최종선을 넘어서는 양보나 혜택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제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우리 과장님과 다른 결정을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 그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저희가 오늘 방문 드린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 그게···. 죄송한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도훈의 눈빛이 조금 사나워졌고, 중년 남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양해를 구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등을 보이고 잠시 통화하던 남자가 돌아서더니 핸드폰을 도훈에게 내밀었다.
“받아보시죠, 시장님. 그룹 기획실장입니다.”
도훈은 중년 남자에게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거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꾹 참았다.
보아하니, 이 사람도 지시를 받아서 이러고 있는 것일 뿐인 듯해서.
애써 화를 억누른 도훈이 핸드폰을 받아들고 입을 열었다.
“김도훈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VH 그룹 기획실장 이민상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시장님을 뵙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녁에 만나 뵙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장 유치와 관련한 일입니까?”
- 하하. 그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도훈은 성질이 난 상태인데, 상대는 아는지 모르는지 유들유들하기만 했다.
그게 더 도훈의 화를 키웠지만, 도훈은 전혀 티 내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쪽 입장은 다 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획실장님과 제가 마주 앉는다고 입장이 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도훈의 부정적인 답에 상대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 음. 아무래도 이 말씀을 드려야 하겠군요.
“... 말씀하시죠.”
- 저희가 공장 이전 후보지로 대흥시를 생각하고 있는 건 진짜입니다.
“그런데요?”
- 그리고 그런 생각은 김도훈 시장님이 현 대흥시 시장인 것도 고려한 겁니다.
“... 네?”
뭔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는 도훈의 반문에 상대가 다시 말했다.
- VH 그룹은 엔지니어링의 공장 이전에도 관심이 있지만, 시장님께서도 관심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말에 도훈은 얼마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