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가뭄에 단비? - 1.
9월 초, 비가 사흘간 틈틈이 내리며 무더위에 지친 사람과 자연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비가 걷히고 난 하늘은 여전히 뙤약볕이 ‘쨍쨍’했고, 무덥고 습한 공기도 여전해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그리고 이유는 달라도 남몰래 그런 한숨을 내쉬는 이가 시청 3층에도 하나 더 있었다.
“한숨 좀 그만 쉬세요, 시장님.”
“네? 아, 제가 또 한숨 쉬었습니까?”
“네. 그랬습니다.”
“하하.”
자기가 한숨 쉬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던 도훈이 영배의 지적에 쓰게 웃었다.
“그렇게 서류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숫자 안 바뀝니다.”
“... 당연히 그렇겠죠.”
도훈이 손에 든 서류에는 이런저런 숫자가 항목별로 적혀 있었다.
서류의 제목에는 ‘2021년도 대흥시 예산안 초안’이라고 적혀 있었다.
내년도 예산‘안’을 완성하기 위해 시청 각 부서에서 요청한 예산들이 수집되어 작성된 최초의 서류.
이 서류를 기초로 각 부서와 논의도 하고 간부회의에서 점검도 해서 예산안을 차츰 완성해 나간다.
어떤 부분은 깎이고 어떤 부분은 늘어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아예 삭제되는 등의 진통.
중간에 의회와 협의도 꾸준히 거쳐야만 의회에서 논의될 때 순탄히 통과될 수 있었다.
물론, 예산안을 마련해 나갈 때 의회와 꾸준히 협의한다고 일사천리로 통과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논의 중간에 이런저런 제안이나 건의, 반대에 수정 요구가 잇따르는 게 예산안 논의라는 건 이미 취임 첫해에 도훈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다만, 지금 도훈이 한숨을 쉬는 건 예산안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해도 자립도가 30%를 못 넘네요.”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시장님. 대한민국에서 기초, 광역을 합쳐서 재정자립도 50%가 넘는 자치단체가 겨우 스무 개를 간신히 넘는 게 현실인 걸요.”
재정자립도라는 건 지방정부가 재정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얼마나 자체적으로 조달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
쉽게 말해 1년에 100원을 쓰는 어느 지자체의 재정자립도가 50%라면, 그 100원 중 지자체가 직접 마련한 돈은 50원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나머지 50원은 지방교부금, 지방양여금, 국고보조금 등을 통해 조달된다.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잖아요. 애를 써도 좀처럼 나아지지를 않으니까 하는 말 아닙니까.”
“나아지지 않다뇨. 예산 효율화에 노력한 불과 2년 사이에 4%나 올랐는데요.”
“그건 우리 시가 작고 예산도 비교적 크지 않으니까 그렇게 보인 것뿐이죠. 실제 액수는 많지 않잖아요.”
“어디 가서 1,500억이 비교적 크지 않다고 하시면 큰일 납니다.”
“... 쩝.”
영배의 말에 도훈이 입맛을 다셨다.
대흥시의 1년 예산은 2020년을 기준으로 1,500억 원에 살짝 못 미쳤다.
내년도 예산은 1,500억을 돌파할 게 거의 확실한 상황.
대흥시 인구가 전국에서 세 번째로 적으니 다른 자치단체에 비교했을 때 ‘크지 않다’고 했지만, 액수만 놓고 보면 절대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 많이 나아졌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도훈이 취임한 첫해, 대흥시의 재정자립도는 25%에 살짝 못 미쳤다.
취임하자마자 의회와 함께 예산 효율화 작업에 골몰했기에 ‘자립도 4% 증가’라는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도훈의 성에는 안 차는 게 현실.
재정자립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해당 지자체는 국가나 광역 단체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재정활동을 펼 수 있는 범위와 여력이 크다는 뜻이 된다.
전체 예산 중 인건비 등의 ‘경직성’ 예산을 빼고, 국가에서 받는 돈 중 특정 분야에만 사용할 수 있고 다른 목적으로 전용할 수 없는 부분을 또 빼면 대흥시는 자체적 재정활동의 여력이 ‘우스운’ 수준에 불과했다.
“중앙정부에서 지자체에 돌려주는 국세의 비율을 조금씩이나마 인상하고 있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우리 시에서 세율을 올리거나 새로운 세목(稅目)을 만들 수도 없잖습니까.”
“나도 알아요. 갑자기 어디서 세금 왕창 낼 기업체가 입주할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요.”
공약한 것도 아니고 취임 이후 천명한 적도 없지만, 도훈은 재정자립도를 끌어올려 대흥시의 독자적인 재정활동 여력을 키우고 싶었다.
재선 도전 결정을 하기 전에 ‘시장은 한 번’이라고 마음먹고 있을 때부터 가졌던 생각이었다.
시의 살림은 결국 ‘예산’으로 하는 것이니, 그 예산의 여력을 키우는 게 미래 대흥시의 발전을 위해 ‘투자’할 힘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기야 재정자립도 높이는 건 단체장이면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이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부시장님이나 실장님은 아직 연락 없죠?”
“네.”
도훈이 오늘따라 이런 해묵은 고민을 다시 꺼낸 건, 오늘 비서실장인 두진이 전경완 부시장과 함께 충남도청에 갔기 때문.
내년도 도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를 관련 부서에 문의하고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소파에 앉아 대화하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각해 자기 책상에서 눈치만 보던 지연이 끼어들었다.
“실장님이 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는데, 아무래도 우선순위에서 좀 밀리는 감이 없지 않겠나 싶다고 하시던데요?”
“네. 저하고도 그런 얘기 잠깐 하셨어요. 우린 주민센터랑 소방서를 새로 지었잖아요.”
“그랬죠.”
도훈이 취임하고 새로 지은 운계면 주민센터와 대흥시 소방서에 국비는 물론, 도비도 지원됐다.
오래전부터 필요성을 인정받았던 사업이니만큼 지원받는 데 무리가 없었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이제 그 사업이 완료됐으니 다른 시의 요청을 먼저 고려할 차례라는 뜻도 된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납득‘만’하고 가만히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게 맞는 거긴 하지. 맞긴 하지만··· 우리 사정이 좋은 것도 절대 아니라는 게 문제지.’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지연이 푸념했다.
“예산 따내는 게 전쟁이라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하하, 아직 예산 시즌도 아닌데 그런 말씀 하는 건 이른 겁니다, 지연 씨. 예산 시즌이 되면 그때야말로 진짜 전쟁이죠.”
“그 정도인가요?”
“그럼요. 주민센터 신축 예산이랑 소방서 신설 예산, 오래전부터 필요성 인정받았다고 쉽게 받은 게 절대 아니거든요. 도는 그나마 좀 쉬웠어도, 국비는 행자부랑 기획재정부 담당 부서에 몇 번씩 찾아갔었어요.”
“... 네.”
“그나마 김용진 의원이 많이 도와줘서 우리는 좀 나았죠.”
영배가 지연과 이야기하는 걸 도훈이 가만히 듣고 있는데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이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실장님이세요?”
“네.”
도훈이 ‘혹시’하는 기대를 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 방금 미팅 끝냈습니다. 부시장님은 잠깐 볼 일이 있다고 하셔서 제가 전화 드리는 겁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갔어야 하는데···.”
- 아뇨. 제 할 일인데요. 그리고 안 오시길 잘한 것 같습니다.
‘안 오길 잘했다’는 두진의 말에 도훈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미팅의 결과가 그 한 마디로 그대로 읽혔으니까.
“그 정도였습니까?”
- ... 네.
원래는 오늘 도청에 전경완 부시장이 아닌 도훈이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도청 담당 부서가 도훈의 방문이 부담스럽다는 은근한 뜻을 전해와 도훈이 아닌 전경완 부시장이 시장 비서실장과 함께 가게 됐다.
‘부담스럽다고 할 때 느낌이 오긴 했지만···.’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두진에게 다시 수고했고 조심히 돌아오라는 말을 했다.
도훈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분위기로 감을 잡은 영배와 지연이 말을 아꼈고 몸을 일으킨 도훈이 창가로 가 밖을 내다봤다.
“... 어렵네.”
그렇게 중얼거린 도훈은 오랫동안 꼼짝 않고 창가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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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와 부시장과 두진이 도청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그 주 금요일.
도훈이 외부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비서실에 지역경제과 과장이 와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과장이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답했다.
“공단에 입주를 희망하는 기업이 있어서 달려왔습니다.”
대흥시의 공단은 터는 잘 닦였으나 산업체가 차지한 자리보다 빈 공터가 더 많은 수준.
작은 기업체 하나라도 신규 입주는 반가운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과장이 시장에게 보고하려고 직접 달려올 정도는 아니었다.
“어떤 기업이기에 과장님이 직접···.”
“좀 큰 기업입니다, 시장님.”
도훈은 과장과 함께 시장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이게 의향서입니다.”
과장이 내민 서류를 받아든 도훈이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VH 엔지니어링이라···.”
공단에 입주의향서를 낸 기업의 이름은 ‘VH 엔지니어링’.
2010년대 초반에 천만 불 수출실적을 달성한 기업으로 재벌은 못 되나 ‘VH 그룹’이라는 철강, 건설, 통신기기, 식품 등의 사업을 하는 그룹의 계열사였다.
“이 회사가 중국에 공장을 갖고 있었는데, 인건비 등이 계속 오르며 경쟁력이 떨어져 동남아 쪽에 공장 이전지를 찾다가 차라리 국내로 유턴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확정된 거랍니까?”
“발표만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거 좀 이상한데요?”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기업이 아니라지만, 의향서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꽤 큰 규모의 기계제작 공장이 들어서게 될 터.
이런 규모라면 발표만 남기 전 단계에서 새로운 공장 후보지를 물색하고 다닐 리가 없었다.
“남양주시와 거의 이야기가 다 됐는데, 회사에서 요구한 지원책에 시가 갑자기 난색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하게 대체지를 찾는 모양입니다. 사실, 의향서를 제출한 게 우리 시만 아니라고 합니다.”
“... 어느 정도를 요구했기에 시에서 막판에 협의를 거부한다는 거죠?”
“뒷장에 나와 있습니다.”
뒷장을 넘긴 도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세금 감면 혜택이나 지원을 바라는 부분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대충 확인한 도훈은 서류를 두진에게 넘겨줬고, 두진이 다 읽기를 기다렸다.
검토를 마친 두진도 그다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두진이 서류를 도훈 앞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 이거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과장님?”
“단기적으로는 좀 힘에 부치겠지요. 하지만, 공장이 입주하고 계속 운영된다면, 얻을 수 있는 게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여기 보니까 이 회사가 짓겠다는 공장도 공장이지만 협력업체도 따라와야 한다는데···.”
“네.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고용 창출이나 인구 증가 등 우리 대흥시 경제에 플러스 효과가 분명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과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공장이 입주하면 가져올 긍정적 효과들을 설명했고 도훈은 담담히 듣기만 했다.
아무래도,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여러 지자체를 경쟁시키는 듯한 인상이 강했으니까.
‘살림 규모가 큰 곳이 더 많은 지원을 할 수 있겠지.’
내심 부정적이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은 도훈이 과장에게 답했다.
“이걸 받아주겠다는 얘기는 마시고, 실무 협상을 진행하자고 해보세요.”
“어···, 그러면 그쪽에서 응하지 않을 확률이 큰데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과장님 말씀대로라면, 이건 지자체 간 경쟁을 유도해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겠다는 생각인 것 같으니까요. 아니면, 원래 이야기가 되고 있던 남양주시를 압박하는 방편일 수도 있고요.”
“그게 그러니까···.”
“과장님이 흥분할 정도로 큰 기업인 건 맞지만, 저희가 이런 조건을 넙죽 받아들일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하지만, 실무 협상을 하겠다면 우리도 좀 더 준비해야 할 테니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있겠죠.”
도훈의 담담한 말에 과장이 좀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시장님. 제가 공무원이 되고 이렇게 큰 기업의 의향서는 받아본 적이 없어서 흥분했나 봅니다.”
“그게 왜 죄송해하실 일이에요. 당연한 거죠. 내심, 저도 고민이 돼요. 하지만, 냉정히 생각하고 꼼꼼히 따져봐야죠.”
“... 알겠습니다.”
과장을 다독여 내보낸 뒤 도훈도 살짝 아쉬운 표정을 했다.
유치가 어려울 것 같아서 그렇지, 실제 유치가 된다면 과장의 말대로 대흥시 살림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 어렵겠죠?”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두진도 도훈과 비슷한 생각인 모양.
이번 주에 놓지 못했던 고민 때문에 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두 사람은 오후 업무에 집중했다.
그리고 퇴근하기 직전, 매우 예상 밖인 소식이 들려왔다.
“응한다고 했다고요?”
- 네, 시장님! 내주에 실무자가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다시 흥분한 과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