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먹구름 - 1.
‘재선’에 도전하기로 한 걸 축하한다고 찾아온 안준식에게 어디서 들었냐고 물은 도훈.
도훈은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말라고 안준식에게 신신당부해 돌려보낸 뒤 김용진에게 곧바로 항의 전화를 걸었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했냐고 싸늘한 목소리로 추궁했더니 김용진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 아, 어제 김 시장이랑 헤어진 다음에 강 도지사님이 이상한 소리를 하시잖아요. 김 시장이 다음 선거에 출마할 거라는 얘기를 소문내지 말라고 하길래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뜬금없이 안 의원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 그래서요?”
- 그래서는 뭐가 그래섭니까? 요즘 안 의원을 시장 후보로 밀자는 사람이 있긴 한 모양이지만, 당사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 그래요?”
도훈이 반문하자 김용진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 네. 안 의원은 단체장보다는 의원이 맞는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행정보다 입법이 자기한테 더 맞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농담 아니고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농담으로 이런 말도 했겠죠. 몇 년 뒤에 자기가 국회의원 후보에 도전할지도 모르니까 긴장하는 게 좋다고 말이에요.
“......”
안준식은 김용진과 매우 친했다.
김용진이 아니었다면, 안준식은 민의당에 들어와 시의원이 되는 대신 여전히 대전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을지 모를 정도.
- 듣자 하니, 강 지사님이 그런 안 의원을 놓고 별의별 상상을 다 했더군요. 하도 웃겨서 안 의원한테 그 얘기를 해줬어요. 나랑 안 의원이랑 얼마나 배를 잡고 웃었는지 모릅니다.
“......”
- 어쨌든, 그 와중에 김 시장 선거 나갈 거라는 얘기도 나왔고요.
“......”
뭐라 더 추궁할 말이 없었던 도훈은 김용진에게도 ‘제발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라.’고 거듭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장실에서 김용진과 통화하고 비서실로 나가니 영배와 두진이 뻘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왜?”
“안 의원이 조금 전에 전화했는데, 오늘 저녁에 밥 먹는 거냐고 물어보더라고. 아까 그 얘기를 마무리하는 걸 깜빡했다면서.”
“... 뭐라고 답했어?”
“일단 저녁에 정해진 일정은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그랬더니?”
“축하도 축하지만, 날도 더운데 고생한다며 보신하러 가자고··· 자기가 쏜다고 너한테 꼭 전해달라고 하더라.”
얘기를 듣고 난 도훈이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실장님이나 형이나 그런 사람 놔두고 경쟁자니 어떠니 하는 생각을 했던 거야.”
“... 쩝.”
“커, 커험!”
“뭐, 어떤 사람은 그게 인지상정이지 않냐고까지 하더라고요.”
“......”
“......”
“제 걱정해서 그런 생각을 하셨을 테니 잘못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저까지 그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네요.”
도훈이 말문을 잃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늘 안 의원이랑 저녁 같이 먹을까요? 맛있는 거 산다는데?”
“... 다음에 하지.”
“그러는 게 좋겠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는 게 맞을 것 같아.”
“흠,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당장은 안 의원 얼굴 보기가 껄끄러운 모양.
도훈은 피식 웃으며 답하고 일어나 바로 안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의원님. 접니다. 네. 말씀 들었는데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아 오늘 말고 다른 날 하잡니다. 네.”
담담히 웃으며 안준식과 통화하는 도훈의 등을 두진과 영배가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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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주가 시작됐고, 곧 9월이 됐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건 예년과 똑같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올해 여름에는 간간이 비라도 내린다는 것.
그렇게 9월 첫주의 어느 날 점심 무렵에도 비가 내리며 아침부터 뜨겁게 달궈진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비가 제법 거세게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후땡’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애연가들이 시청 청사 옆 자판기 근처 벤치 지붕 밑에 모여 있었다.
“휴우, 그나마 좀 낫다.”
“그러게. 올해는 비라도 자주 와서 다행이야.”
“그러게요. 작년엔가 재작년엔가는 과일이 다 화상을 입었잖아요. 태풍도 안 오고 소나기도 안 오고···. 어휴, 그때 어떻게 견뎠나 모르겠어요.”
“여름에 에어컨 트는 게 이제는 사치가 아니게 됐으니 말 다했지, 뭐.”
“냉방이 인권이라는 말도 생겼잖아?”
두런두런 중얼거리던 이들 중 하나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시장님, 재선 도전할 거라는 얘기 들었어?”
“그런 얘기가 요새 돌긴 하더군요.”
도훈이 다음 선거 때 출마할 거라는 얘기가 이번 주 들어 시청 청사 내부에 돌기 시작했다.
공무원도 직장인이다 보니 ‘상사’가 어떤 사람이냐에 민감하긴 마찬가지.
그 민감함을 잘 드러내지 않긴 하지만, 이번 소문은 대흥시 행정의 최고 책임자와 관련한 것임에도 다른 때에 비해 그 반응이 매우 심심했다.
“재선에 도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지. 시장 한 번만 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런 시장이 어디 있기나 할까? 보통은 한 번이라도 더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하하. 우리 시장님이 시장이 된 과정이 좀 독특하긴 하죠.”
“좀이 아니지. 매우 독특하지. 난 시장 선거 직후에 그··· 어느 방송인지는 기억 안 나는데, 뉴스에 나온 인터뷰 보고 웃다가 배꼽 빠지는 줄 알았었어.”
“하하, 그게 화제가 되긴 했죠.”
“그러고 보면, 우리 시장님 되게 번듯한데 숨겨진 똘끼가 있어.”
“하하. 틀린 말은 아닙니다.”
소문을 접한 직원들은 대개 ‘진짜냐?’, ‘잘 됐다!’고 반응하기보다는 ‘그런가 보다’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연임 제한에 걸린 것도 아니고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닌데, 한 번만 하고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게 더 이상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도훈이 시장이 된 동기와 과정이 독특하다는 건 다 인정했지만, 직원들이 생각하는 도훈의 ‘똘끼’는 딱 거기까지.
젊은 나이, 행정에 경험이 없는 것 등 이런저런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최소한 대흥시 공무원 사회에서는 그런 우려는 진즉에 씻은 듯이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게다가 아직 다음 지방 선거까지 2년 가까이 남아 있는 시점이니, 재선 도전이 이슈가 될 정도로 민감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그러더라고요. 시장님이 한 번도 재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어서 좀 걱정했는데, 이번에 소문 도는 걸 보고 걱정 덜었다고요.”
“아, 그래? 정말 시장님이 재선에 관한 이야기한 적 없어?”
“아마도요. 저도 어렴풋이 시장님이 어떤 뉴스에서 재선 도전할 거냐는 질문에 첫 임기를 제대로 마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답하는 거 본 기억이 있어요.”
도훈은 이런저런 언론으로부터 ‘재선 도전’에 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지금의 임기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것에 집중하겠다’는 식으로 답해왔다.
“뭐, 시기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랬겠지. 그리고 그런 얘기 잘 안 하는 스타일이잖아.”
“하긴요.”
쏴아아아.
“어? 비 세지네.”
“이거 현관까지 가기 전에 다 젖겠는데···.”
“하하, 저는 혹시 몰라서 우산 가져왔죠.”
잠시 대화가 끊겼고, 내리는 비에 정신이 팔렸던 직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우리 시장님이 정치에는 흥미가 없어 보이는데 정작 정치를 못 해서 그러시는 것 같진 않단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일은 잘하는 양반이지만, 지난 2년간 이런저런 공격을 당하기도 했지 않아?”
“그건 그랬지. 뜬금없이 ‘소 어쩌고’ 했던 적도 있잖아.”
“그거야 인터넷에서 그런 거지만, 대흥시장의 정치라면 대흥시 의회를 상대하는 일 아니야. 의회나 의원들하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면서도 별 탈이 안 났잖아.”
“그런가?”
“그럼. 반대로 의원들은 여럿 탈 났지.”
“하긴···. 서 의원도 그런 경우지.”
듣고 있던 후배가 뒤늦게 끼어들었다.
“서 의원은 좀 극단적인 경우고, 제가 알기로는 본회의장에 시장님 세워놓고 싸움 건 의원 중에 이겨본 사람이 없는데요.”
후배의 말에 선배 직원이 핀잔을 줬다.
“이 친구야. 시장님이 무슨 싸움꾼인가? 그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
“아, 그런가요? 조심하겠습니다.”
“내 앞에서 말고 다른 데서 조심해. 그리고 자네가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시장님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이나 얘기에는 전투적이지만, 상대 주장이 일리가 있다 싶으면 일단 ‘듣고 보는’ 스타일이잖아. 의원은 몰라도 시장님은 ‘기필코 이겨야겠다’는 생각 같은 거 안 하실걸?”
“하긴, 얘기를 잘 들어주는 스타일이긴 하죠.”
“그렇지. 난 다른 거 다 떠나서 지금 시장님이 자기주장을 말하기보다 상대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어.”
도훈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가 더 오가던 어느 순간, 내내 듣기만 하고 대화에 끼어들지 않던 한 직원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선거까지 한참 남았어. 그런데 뭐 그리 벌써 호들갑이야.”
“호들갑이요?”
‘호들갑’이란 말을 꺼낸 직원은 담배 피우던 이들 중 가장 선배였다.
그 때문인지, 조금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 선택에도 다른 이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 나도 지금 시장 좋은 사람이고 노력한다는 거 인정하는데, 세상 돌아가는 것과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닌가?”
“......”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 간다면 재선되는 게 큰 무리가 없겠지만, 세상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실수라도 한 번 크게 하면··· 또 모르지.”
“......”
“그리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도 있고. 혹시 알아? 우리 시장도 변할지?”
“에이, 설마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후배의 반응에 선배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자네 생각이 맞았으면 좋겠어. 시장이 잘해서 성공하면 시장 본인에 시민도 좋고 우리도 좋으니까.”
“네.”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난 시장 칭찬을 잘 안 하게 되더라고. 혹시라도 부정 탈까 봐.”
“... 아, 그래서 호들갑이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 시장 좋아하고 잘 되길 바라는 자네들 마음 알겠는데, 너무 그렇게 열심히 칭찬하지 말게. 여기 직원이라고 다 시장 지지하는 건 아닐 것 아닌가. 그리고 어떻게 보면, 시민들이 보기에 좀 민망하기도 하잖아.”
“... 네.”
“조용히, 마음속으로 잘되길 바라면서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그게 바로 우리도 잘되고 시장도 잘되는 가장 빠른 길일 테니까.”
“......”
후배들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자 선배 직원이 좀 머쓱한 표정이 됐다.
“이거 내가 괜한 얘기를 한 게 아닌가 싶네.”
“아뇨. 틀린 말씀 아닌데요,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음, 나 먼저 들어갈게.”
“어? 비 많이 오···.”
탁, 탁, 탁.
말리는 후배의 말을 못 들은 척, 선배 직원이 거센 비를 뚫고 달렸다.
그런 선배를 바라보던 직원 중 하나가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가 김 선배 아니랄까 봐. 하여튼, 저 선배만큼 신중한 사람이 없다니까.”
빗속을 뚫고 먼저 달려간 선배 직원은 다른 동료들에게 ‘신중함’의 대명사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원래도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는 게 공무원의 ‘모범적인 처신’으로 일컬어지지만, 조금 전 그 선배 직원은 시청 직원 중에서도 거의 최고를 달릴 정도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터.
남겨진 사람 중 막내가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들어간 선배와 마주 대화하던 그 직원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공무원이지만, 이전 시장들하고 지금 시장님하고 너무 비교되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걸 제일 잘 아는 게 우리 아니겠어요? 잘하는 건 칭찬해도 되지 않을까요?”
“자네 말도 맞고, 저 선배 말도 맞아. 다만, 김 선배는 적당히 하라는 뜻이겠지.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네.”
막내 직원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실제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살짝 어색해지려는데, 때마침 비가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직원 하나가 얼른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가자고. 마침, 비도 덜 오네.”
“그러죠. 이러다 점심시간 다 가겠습니다.”
“가시죠.”
다들 청사 현관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이내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비가 점점 개어가고 있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런 먹구름 가득한 하늘 아래, 불이 밝혀진 대흥시 청사가 오늘따라 스산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